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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숨어 있던 괴물이 비집고 나왔다

‘바른 청년’ 김강우가 ‘미친 연산군’이 되기까지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 사진 :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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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달의 뒷면’이 있다.
폭군 연산의 뒤에 예술가의 광기가 있었다면, ‘바른 청년’ 김강우의 뒷면에는 짐승처럼 포효하는 야성이 있었다.

사진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어릴 적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가 좋아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가 배우가 됐다. 어릴 적에는 무척 다혈질이라 ‘헐크’라고 불렸는데, 크면서 조용한 청년이 됐다. 2012년 그가 주연한 영화 〈사이코메트리〉의 권호영 감독은 “예의 바르기도 하면서 다혈질인 김강우의 본성이 영화와 어울렸다”고 했다. 작년 겨울에 개봉한 영화 〈카트〉에서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투쟁하는 바른 청년이었다. 시사회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삼킬 만큼 몰입한 작품이었다. 차기작인 〈간신〉은 그 대척점에 있다. 김강우 속에 숨겨져 있던 헐크가 비집고 나와 화면을 채운다.

그가 연기한 연산군은 조선이 낳은 문제적 인물이다. 19세에 왕위에 오른 뒤 10년이 지나자 숨겨온 발톱을 드러냈다. 〈간신〉은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던 ‘연산군 11년’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연산군일기》에는 “임숭재와 (그의 아버지인) 임사홍을 전국 각지에 보내 아름다운 계집을 간택해 오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 명령을 받들어 전국의 1만 미녀를 강제 징집하는 간신 부자, ‘조선판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만들어온 민규동 감독이 사극을, 그것도 연산의 핏빛 기록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더욱 의외인 것은 연산 역에 김강우를 캐스팅한 것이다. ‘바른 생활 사나이’ ‘국민형부’로 불리던 이 배우는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종일관 눈을 희뜩이며 광기를 내뿜는다. 김강우 역시 시나리오가 찾아왔을 때 놀랐다고 했다. ‘나의 어떤 점을 보고…?’, 그 궁금증이 그를 작품 안으로 이끌었다. 깊숙이 숨겨둔 ‘나’를 누군가 꺼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렘도 있었다.


내 안의 광기를 꺼내는 작업


“제 성격과 보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요. 이 작품은 그 간극을 메우고 저보다 더 냉정하게 제 모습을 찾아주었죠. 저는 원래 다혈질이에요. 어렸을 때는 고집도 세고 거칠었어요. 지금까지는 이상할 정도로 바른 역할이 들어왔어요. 어릴 적부터 저를 아는 사람들은 ‘가식적’이라고도 이야기해요(웃음). 크면서 달라진 거죠. 가끔 이런 역할을 하면 억누르고 살던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쾌감 같은 게 있어요.”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의 톤은 사뭇 진중하다. 평소에도 여행 가고 책 읽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다고 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편인데, 여행을 가면 말이 많아진다. 지독한 길치라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먼저 말을 거는 편은 아니다. 낯가림이 심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큰 관심이 없다. 때문에 대중이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신기하다. “평소에는 참 재미없게 사는데” 말이다. 재미없게 살기론 민규동 감독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음주도 가무도 즐기지 않는다. 오직 영화만 아는 두 사람이 ‘연산’의 바닥까지 파고들어 만든 작품이 〈간신〉이다.

“연산에 대한 기록을 읽는데 어떤 소설이나 만화보다 흥미로웠어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었고요. ‘연산은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것과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죠.”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 선생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제명대로 살 수 있었을까?’ 연산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그러했다. ‘천재적인 예술가’ 라는 게 그와 민 감독이 찾아낸 폭군 연산의 뒷면이었다.


“연산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병약하고 호리호리하고 하얗다는 정도예요. 물구나무서서도 말을 탈 만큼 잡기에 뛰어났고, 연산이 춤을 추면 보는 이들이 울었다고 하고요. 경복궁에도 가보고 왕이 머물렀다는 곳에도 찾아가봤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처음 이미지를 잡기까지 고정관념을 깨기가 어려웠어요. 짐승들의 모습뿐 아니라 연쇄살인범, 독재자들의 자료도 찾아봤어요. 표현의 한계나 선을 두고 싶지 않았어요.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했죠.”

차라리 자신을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 가두자고 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에서 일주일 열흘을 지냈다. 벽에는 포악한 짐승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잠을 자지 않은 날도, 종일 하드코어 음악만 들은 날도 있었다. 그렇게 극한에 부딪혀서라도 알고 싶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잔혹하게 미치게 만들었을까.’ 검은 방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없다. 이제부터 만들자.’


외로움을 즐겨야죠, 그가 그랬듯이


“일로 가족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촬영 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외로웠는데, 즐겨야죠. 그 사람도 외로웠을 테니까요.”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다. 어린 두 아들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는 모든 작품을 아내와 의논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이번에는 삼갔다. 대신 감독과 논의했다. 밤이든 새벽이든 떠오르는 이미지와 톤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촬영에 들어간 뒤로는 서로 더 할 말이 없었다.

“두 달 넘게 조율을 하고, 현장에서는 거의 이야기를 안 했어요. 가기 전에 모든 신(scene)에 대한 합의를 보고 갔어요. 장면마다 써야 하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는데, 고갈되면 안 되니까요.”

촬영장에서도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앞으로 벌일 악행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역할 자체가 너무 세요. 계속 일을 벌이고 방점을 찍잖아요. 누구랑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독단적으로요. 완벽하게 준비한 뒤 현장에서는 저를 놓았어요. 그렇게 ‘탁’ 놨을 때 표정이나 행동에 광기가 나오니까요. 카메라 감독님께도 미리 이야기를 해놔요. 제가 어디로 움직일지 모른다고요.”


다른 사람의 눈에서 숱한 눈물을 뽑아낸 이 폭군은 마지막에 말 그대로 피눈물을 흘린다. 임숭재(주지훈 분)가 특별히 준비한 돼지들에게 둘러싸여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 장면은 그가 처음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체한 듯 마음에 걸려 있었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처럼 장면에 임했다. 돼지들은 배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배설하고 드러눕고 이탈했다. 혼자 연기하는 장면은 그나마 나았다.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이어진 촬영은 혹독했다. 끌려온 미녀들은 홑겹 한복을 입고 야외에서 덜덜 떨었다. 이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몰입이었다.

“상황에 최대한 집중해서 빨리 끝내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흐트러지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그 많은 보조출연자들의 눈빛을 조율할 수는 없어요. 그건 감독이 아니라 배우의 몫이에요. 온 힘을 쥐어짜서 초집중했죠.”

임숭재 역으로 함께했던 배우 주지훈은 “현장에서 김강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슛이 들어가지 않는 순간에도 그는 철저히 연산이었다. 연기가 너무 처절한 나머지 둘 다 울어버린 적도 있다.

“숭재와 칼춤을 추는 장면은 원래 우는 장면이 아닌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고요. 숭재도 울고요. 진심이었거든요. 계산하지 않고 나오는 진심이요. 연산은 살아생전 굉장히 많은 시를 남겼어요. 죽기 열흘 전에 쓴 글에는 극도의 허무가 묻어 있어요. 춤추며 한 말들은 실제로 연산의 시예요. 숭재에게 ‘멈춰달라’고, ‘죽여달라’고 하는 건 연산의 진심이었죠.”


흥행과 관계없이 나는 달린다


연산은 죽고, 김강우는 남았다. 남은 시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갔다. OCN에서 제작한 실종 느와르 〈M〉이라는 작품이다. 아이큐 187의 전직 FBI 요원 길수현 역을 맡았다. 강력범죄를 다룬 작품인데 연산을 거쳐서인지 되려 ‘소프트하게’ 느껴졌다.

“연산에서 이 작품으로 넘어오면 좀 치환이 되지 않을까 싶은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오래 쉬면 빠져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웠거든요.”

김강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그를 움직이는 건 흥행도, 작품성도 아니고 ‘궁금함’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많이 할수록 배우에게도 다양한 역할을 할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그의 최신작에도 교집합은 없다. 〈카트〉 역시 그런 마음으로 찍은 영화다.


“영화 보고 우는 사람이 아닌데 〈카트〉는 많이 울었어요. 〈카트〉는 소재도 좋을뿐더러 재미있었어요. 저는 ‘궁금해서’ 작품을 해요. ‘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예전에 영화 〈미스터고〉(2013)는 3D 촬영기법이 궁금해서 했어요. 주변에서는 말렸죠. 드라마(〈해운대 연인들〉(KBS)) 하면서 절대로 같이 못 한다고요.”

흥행에 대한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혹자는 그를 ‘저평가 우량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기의 질에 비해 흥행 스코어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

“흥행이 제일 스트레스 받는 부분인데, 거기에 집착하면 작품을 못 해요. 얻은 것도 있죠. 용감하게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흥행배우라는 부담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요.”


〈간신〉이 개봉한 자리에는 이미 외화 〈매드맥스〉와 〈스파이〉가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전도연·김남길이 주연한 〈무뢰한〉, 임수정·유연석의 멜로 〈은밀한 유혹〉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 그는 도리어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1000만 영화 한 편이 나오는 것 못지않게 200만 영화가 여러 편 나오는 게 영화의 ‘다양성’ 면에서는 좋은 일이니까. 주연배우의 입이 아닌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지만 그는 그렇게 믿는다. 대학시절 그는 연기는 정공법으로 하는 것이라 배웠다. 영화의 흥행만큼 중요한 게 장르적인 다양성이라는 믿음도 변함없다.

〈M〉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강하늘은 “중앙대에서 김강우 선배는 전설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그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게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작품을 통해 얻고 싶은 건 인기라기보다 배움이다.

“대학 때 〈햄릿〉을 공연했는데 굉장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요. 언젠가 왕 역할을 한다면 연산을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죠. 두 번 할 수는 없는 역할이니까요.”

그가 주인공으로 데뷔한 첫 작품은 MBC 드라마 〈나는 달린다〉(2003)였다. 그가 맡은 무철은 용접일을 하면서 매일 책 읽기와 달리기로 세상을 잊는 청년이었다. 뜨거운 용접을 하면서도 ‘앗’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구릿빛 얼굴에는 핏빛 역사가 씌워졌다. 무철과 연산 사이 수없이 많은 인물이 다녀갔다. 〈돈의 맛〉(2012)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백금옥은 비서 김강우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키워보자, 어디까지 올라오나 보게.”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이번에도 김강우는 끝까지 달렸다.
  • 201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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