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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사로잡는 요망한 눈”

가공되지 않은 마력의 소유자 김고은

‘그 애는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 중 여고생 ‘은교’를 묘사하는 한 부분이다. 은교는 70대 시인 이적요와 17세 여고생 은교의 관계를 그린 작품으로 박범신이 개인 블로그에 연재했을 때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다. 정지우 감독이 〈은교〉(2012)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세간의 관심은 당연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자 상징이 되는 여주인공 ‘은교’였다. 대체 어느 여배우가 70대 남자를 번뇌에 빠뜨릴 만한, 순수하고도 관능적인 은교를 연기할 수 있을까.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휴학 중이던 김고은(24)은 영화계에서 일하는 선배를 통해 정 감독을 만났다. 〈은교〉 오디션이 있는 줄도 몰랐던 김고은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디션을 봤다. 그는 교내 무대나 학생영화에나 출연했을 뿐, 개봉 영화나 TV에선 단역조차 한 적이 없었다. 정 감독은 “김고은이 제 나이에 비해 자기 중심이 단단하고 호기심에 찬 눈을 갖고 있어서 맘에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눈이 요물”이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2012년 영화 〈은교〉로 스타덤

〈은교〉 개봉 후 김고은은 그해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조선일보가 연말에 실시한 영화 설문조사에서 그는 압도적으로 ‘올해의 발견’으로 꼽혔다. “등장과 함께 ‘가공되지 않은 배우의 마력이란 무엇인가’를 단번에 입증하며 정서의 폭이 남다른 연기를 보여줬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래 20대 여배우들이 ‘남자 주인공의 애인 말고는 맡을 만한 배역이 없다’고 아우성칠 때 그는 〈몬스터〉 〈협녀〉 등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에서 김혜수와 함께 여주인공으로 나섰다.

〈차이나타운〉은 거칠고 차갑고 무자비하다. 탯줄 달린 채 지하철 코인라커에 버려진 갓난 여자아기 ‘일영’(김고은). 라커 번호가 10번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팔려간 일영은 지하철 앵벌이를 하다 냉혹한 뒷골목의 지배자 ‘엄마’(김혜수)의 눈에 띈다. 엄마가 지배하는 차이나타운에선 밀입국, 사채놀이, 살인, 장기밀매가 일상이다. 일영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남의 몸에 칼을 긋고, 마작판 채무자 입에 박카스 병을 박는다. 그런 일영의 마음속 빈틈을 채무자의 아들(박보검)이 비집고 들어오고, 자신을 거역한 일영을 엄마가 폐기 처분하려 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돌진한다.


얼굴에 주근깨를 잔뜩 그리고서 머리를 하얗게 염색하며 카리스마를 최대한으로 발산한 김혜수와 팽팽하게 맞설 수 있는 20대 여배우를 찾는 게 이 영화의 관건이었다.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일영 역에 김고은을 염두에 뒀다. 그는 “김고은이란 배우는 〈은교〉 때 이미 보여준 것 같은데, 관객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더라. 일영은 이 영화에서 엔진이고 남들을 보게 만드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 나이 또래에서 김고은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혜수와 한 화면에 섰을 때 결코 떨어지지 않는 에너지와 강단이 있는 배우로 적격이었다”고 했다.

정 감독의 눈도, 한 감독의 말도 모두 맞았다. 김고은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요물이었다. 〈차이나타운〉 개봉 직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고은을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 녹취를 다시 들어봤을 때 당혹스러웠다. 인터뷰 절반은 그의 웃음소리로 채워져 있었고, 어느새 기자와 영화사 직원들까지 그를 따라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그가 재밌거나 웃겨서가 아니었다.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김고은은 방긋방긋 미소를 짓거나 기자의 눈치를 보며 준비한 답변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고, 모노로그라도 하는 것처럼 몸짓과 표정은 컸다. ‘이렇게 무방비한 여배우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김고은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그를 따라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가공되지 않은 배우의 마력’을 실감하게 된다.


강하고 평범치 않은 배역을 연기


김고은이 지금까지 맡은 역할은 강하고 평범치 않다. 70대 시인을 유혹하는 여고생이나 살인마와 대적하는 시골 소녀, 그리고 차이나타운에서 사채빚을 받으러 다니는 고아 등은 모두 성인의 세계에서 유유하게 발버둥치는 순수한 존재였다. 영화들은 그의 고운 맨살을 드러내거나 피를 튀기는 장면으로 화제가 됐다. 그리고 세 편의 영화 모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그는 “내가 한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맡은 역할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쉬운 역할은 없다. 센 역할을 많이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캐릭터가 세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했다.

“세다, 안 세다란 기준으로 작품을 보진 않아요. 제가 하도 ‘멜로, 멜로’ 노래를 부르니까 영화사 대표님이 ‘멜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면서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를 건네주셨어요. 그냥 한번 읽어보라며. 이번 영화 시나리오는 김혜수 선배님이 엄마 역할을 맡는다는 것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일영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책을 읽듯이 봤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서정적이었어요. 더 나아가서 따뜻하고 뭉클하기까지 했죠.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고, 감정이 자꾸 맴돌았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다시 보게 되고, 되뇌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장면이 많은, 잔혹한 영화를 연달아 찍은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는 온몸을 들썩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이고, 머리야.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라며 소리쳤다. 그 질문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이골이 나고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니 슬퍼진다. 멜로나 로맨틱코미디를 무척 하고 싶었는데 시나리오가 안 들어왔다. 최근 개봉작을 살펴봐도 멜로가 별로 없었다. 〈장수상회〉(장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 정도밖에 없었다”고 했다.

“저도 맞고 때리는 거 말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걸 연기하고 싶어요. 분장용 피는 이제 냄새만 맡아도 알아챌 지경이에요. 입에 머금어보기도 했고, 온몸에 끼얹어보기도 했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성난 변호사〉에선 검사 역할을 맡고 머리도 길렀는데 멜로가 없어요. 있다면 〈썸〉 정도랄까? 멜로가 있다고 해서 혹한 작품이었는데. 그래서 감독님한테 ‘멜로 영화라면서요, 멜로 어딨어요’라고 따졌어요. 하하.”


영화의 완성도나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영화계와 평론가, 기자들은 〈차이나타운〉을 반겼다. 여배우가 주인공의 조력자나 여자친구가 아니라 온전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기 드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김고은의 차기작은 〈협녀〉. 이 작품은 전도연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데뷔 때부터 주목을 받은 김고은이 걸출한 베테랑 여배우들과 이루는 화학작용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김고은은 “나도 배우를 꿈꾼 학생이었다. 그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배우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동경했겠나.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고 해도 돌아가시거나 활동을 안 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옛날 작품으로 추억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작업하신 선배님들은 한국에서 여배우로서 정말 힘이 되는 분들이다. 동시대에 함께 연기를 하는 분들이고, 앞으로 다른 영화에서 또 볼 수 있는 분들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아직도 신기하고 벅차다. 기적 같은 일이다”라고 했다.

“김혜수 선배님은 분위기를 아우른다고 해야 하나요. 연기하면서 스스로 감당 안 되는 순간이 있어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선배님 덕분에 두려움 없이 연기할 수 있었어요.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했죠. 엔딩 장면도 정말 복잡했고 콘티가 따로 없었어요. 촬영 전날 잠이 안 올 정도로 어려웠는데 막상 현장에 가니 혜수 선배님께서 먼저 분위기를 주도하시고 제안도 해주셔서 두려움을 덜 수 있었어요. 불안한 느낌이 들 때마다 ‘좋았어, 잘했어!’라고 얘기해주셔서 위안과 확신이 들었어요.”


앞뒤 재지 않고, 마음 닿는 대로


네 살 때부터 10년간 중국에서 살았던 김고은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첸카이거 감독의 〈투게더〉를 여러 번 봤고 볼 때마다 울었다. 그때부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계원예고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연극무대에 서게 됐다”고 했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땐 너무 떨려서 ‘이걸 평생 하면 정말 힘들겠다’ 싶었죠. 두 번째 무대에 섰을 때부터 날개를 단 것처럼 날아갈 것 같더니 막이 내려간 뒤에도 무대에서 내려가기 싫어졌어요. 그때 그 감정을 붙잡고 싶어서 계속 연기하는 거예요. 앞뒤 재지 않고, 제 마음 닿는 대로 하는 건 제 캐릭터들이랑 비슷하네요.”

〈은교〉 이후 김고은은 얼굴과 이름을 알렸지만, 정작 그는 “하나도 변한 건 없다. 다만 좀 신기했다. 작품이 계속 들어오니까”라고 했다. 그에 대한 기사는 쏟아졌지만, “내 연기에 대한 평가는 꼼꼼히 읽지만, 읽고 신경을 안 쓴다”고 했다.

“나쁜 얘기라도 ‘어쩔 수 없지 뭐’라면서 넘겨요. ‘내가 다 보여주지 않았어, 더 보여줄게 있는데’라고 생각해요. 연기가 재밌거든요. 아니, 연기하는 건 참 재밌어요. 하지만 이건 사회생활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지칠 때가 있어요. 몸이 지치고 마음이 지쳐서 모든 게 다 귀찮고, 누구도 만나기 싫고. ‘내가 벌써 지쳤나? 설마? 연기가 재미가 없어졌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봤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연기는 재밌는데 아직 그걸 일로 받아들이질 못한 거죠. 저는 배우니까 일로써 저한테 요구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실수할 때가 있어서 속상해요. 요즘은 어릴 때부터 이런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돌들은 어떤 정신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고, 그들이 대단해 보여요.”


영화를 찍지 않을 때 그는 여행을 가거나 흘러간 드라마를 본다. 최근 오키나와와 보라카이를 다녀왔고, 시간이 별로 없을 땐 제주도에라도 짧게 다녀온다. 혼자 다니는 걸 걱정하는 부모님 때문에 “일로 바빠서 연락이 안 된다”고 살짝 속이기도 하고 혼자 다녀온다. 날이 좋을 때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서 서울 곳곳의 ‘비밀 장소’에 나가 음악을 듣는다. 그는 “공교롭게도 나는 매년 이 시기에 인터뷰를 한다. 날씨가 정말 좋을 때이다. 여기 이렇게 있음 새장에 갇힌 새 같다. 오늘처럼 햇볕이 좋은 날에는 막 설레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촬영 없이 혼자 있을 때 드라마를 몰아 봐요. 〈커피프린스 1호점〉은 열 번 정도 봤을 거예요. 그걸 보고 있을 때 저는 계속 웃고 있어요. 악역도, 악에 받친 사람도 없는 드라마라서 그런가 봐요. 영화를 시작한 이후로 이 드라마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 센 영화를 하다 보니까 이런 게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하고 싶은 영화에 대해서 묻자 그는 “코미디가 하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개그에 대한 재능을 아직 보이지 않은 그가 이런 얘기를 해맑게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거봐요, 저 웃기죠?”라면서 또 웃었다. 〈은교〉를 찍었을 때도 그는 인터뷰에서 코미디 배우를 하고 싶다면서 기자를 웃기려 들었다. 왜 김고은이 잔혹하고 슬픈 어른들의 세상에서 자라지 않는 소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갔다. 소설 《은교》에 나온 문장처럼 그를 묘사하자면, 그는 소녀 같았고, 여동생 같았으며, 때로는 여배우 같았다.

“좀 성숙해져야 할까요? 하하. 앞으로도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복잡하게 생각을 안 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도 시간에 따라서 변할 테고, 거기에 알맞은 대처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연기를 일로 받아들이면서 부담과 책임감이 더 커지고, 그 과정에서 저한테도 쌓이는 게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아직은 연기가 재밌으니까요. 그걸로 충분해요.”
  • 201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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