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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째 끊임없는 연기 변신,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하자 있는 인생’ 현숙역

프로는 아름답다, 채시라는 프로다

드라마가 끝난다. 이제 모든 담화는 과거의 것이며, 배우는 보직을 잃은 실업자에 불과하다.
대중은 금세 잊는다. 불과 며칠 전의 대사와 표정·울음 같은 것들은 한바탕 외계의 소동쯤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파가 멈춘 뒤에도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려면 거의 필사적이어야만 하는 바닥.
그리고 채시라(47)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사진제공 : KBS / 장소협조 : 김청경 헤어페이스 / 스타일리스트 : 김영미
“망가져도 좋다. 전작과 무조건 달라야”

육박전이었다. 지난 2월, 채시라가 3년 만에 KBS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로 돌아왔을 때 시청자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경악. 극 중 고등학교에서 절도 누명을 쓰고 잘린 중졸의 왈가닥 김현숙(채시라)은 열아홉에 덜컥 애를 낳고,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린다. 인생을 만회하기 위해 도박에 손댈 땐 ‘타짜’의 관상이 되더니, 경찰에 쫓기며 찢어진 슬리퍼를 끌고 골목을 전력질주할 땐 ‘맨발의 기봉이’가 되고, 눈물 콧물로 반죽된 화장을 하고 동네 불량배들을 향해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땐 ‘조커’로 급변한다.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이 파격은 드라마를 첫 방송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로 밀어 올렸다.

“배우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배역”이라고 했다. 작정하고 망가진다. 억척을 적극 피력하는 뽀글 파마도 가발이 아니다.

“제 머리카락이 약간 곱슬이긴 한데 더 볶은 거예요. 처음엔 무직에 무식한 캐릭터니까, 외모를 제대로 건사하지 않는 단순 생머리로 할까 했었어요. 제작진이랑 오래 상의하다가 생활감을 주려고 볶았어요. 파마도 둥글둥글한 게 아니라, 살짝 옆으로 삐뚤빼뚤하게 했죠. 김현숙의 인생처럼요.”


전작 SBS 〈다섯 손가락〉(2012)의 표독스러운 재벌가 며느리나 KBS 〈천추태후〉(2009)의 고려 왕후에선 짐작조차 안 되는 돌변이다. 매일같이 TV로 모니터링을 해준다는 남편 김태욱(46)조차 드라마를 보다 “좀 더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

“외모 생각 안 하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도 계세요. 근데 계산도 필요 없고, 날것으로 연기하면 되니까 좋아요. 표현의 한계가 없어요. 예전부터 시트콤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 역할이 시트콤보다 훨씬 세요.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

아직도 채시라를 떠올리면 코를 톡톡 치며 ‘코리아나’를 외칠 것 같지만, 인터뷰 당일 그는 단출한 니트 한 벌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맨발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집에선 아무 티셔츠나 걸치고 있어요. 현숙이의 스타일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편한 게 좋잖아요.” 극 초반 액션신을 위해 한겨울 자갈밭을 구르고, 겁을 상실한 채 다리 밑으로 뛰어내릴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에 MBC 〈여명의 눈동자〉 찍을 땐 화장 하나도 안 하고 정글에서 진흙탕에서 엄청 굴렀거든요. 〈천추태후〉 찍을 때도 대역 없이 활 쏘고 치고받았어요. 검불이나 흙더미엔 거부감이 별로 없어요. 여배우 얼굴에 뭐 묻어 있으면 왠지 처연해 보이는 효과도 있고요.”

이후 채시라는 〈topclass〉 5월호의 표지 사진 촬영을 위해 또 한 번 시간을 냈다. 이번에는 배우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옷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다양한 표정과 포즈가 카메라에 잡혔다. 사진기자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역시 프로였다.


처절할수록 빛난다


더럽게 꼬인 인생이 서러워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나 나나 인생 하자야” 대성통곡하다 졸도할 때, 도박하다 걸려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가 반성문을 쓰다가 악에 받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포효할 때 그렇다. 지난 3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낮술을 먹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한 아줌마가 회를 썰다 말고 칼을 쥔 채로 달려 나왔다. 채시라를 만나야겠다는 거였다. “자기도 고등학교 때 억울하게 퇴학당했는데, 드라마 속 저를 보면서 자꾸 옛날이 떠오르더래요. 제가 나중엔 꼭 잘됐으면 좋겠다고요.”


그런 그를 보며 1994년 MBC 〈서울의 달〉 옥수동 달동네에서 야채 장사하던 영숙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박토(薄土)가 다 된 삶을 개간하느라 거의 허물어질 뻔한 여자. 제비족 연인을 향해 “인생 두 번 있는 거 아니야. 한 번뿐이야. 똑바로 살어”라고 충고하던, 사랑 앞에서 또렷해지던 여자. 채시라는 “펄떡펄떡 살아 있는 캐릭터를 표현할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고 했다. “사실 제가 그렇게 힘겨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려움도 알고 힘든 것도 알죠. 사람에겐 그런 것들을 헤쳐나가는 캐릭터가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끝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더 애착을 쏟을 수 있죠.” 그는 성선설을 믿는다고 했다. “드라마 제목이 ‘나쁜 여자들’이 아니에요. ‘착한 여자들’도 아니고. 대체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뭘까 궁금했어요. 누구나 양면성이 있잖아요. 모두 하얗게 태어났지만, 어떤 환경을 맞닥뜨리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인생이란 게 종잡을 수가 없잖아요.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 여자들도 인생에 질곡이 있지만 결국 착해질 거예요. 희망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11월 드라마 섭외 요청이 왔다. 당시 다른 드라마 4개, 영화 2개의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 있던 때였다. “다른 시나리오는 읽다가 말았어요. 역할도 대개 재벌가 사모님 아니면 카리스마적 여성이었죠. 똑같은 거 찍느니 차라리 애들이나 제대로 뒷바라지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이 대본을 봤다. “앉은 자리에서 5시간 동안 시놉시스 포함해서 4부까지 내리 읽었어요. 에너지가 쭉 올라오더라고요. 하고 싶다. 해야겠다. 제 작품 선택의 기준은 간단해요. 전작(前作)과 다를 것.”


연예계 ‘수퍼맘’

채시라의 얼굴에서 처음 ‘엄마’를 발견한 건 2년 전쯤이었다. 2013년 4월 채시라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신문을 교육적으로 잘 활용하는 유명인을 찾아가 이것저것 묻는 기획의 일환이었는데, 그때 채시라는 이런 얘길 하면서 달뜬 얼굴을 하곤 했다.

“머리 감을 때 식초 몇 방울 떨어뜨려서 감으면 윤기가 나요. 얼룩 지울 때는 무를 썰어서 몇 번 두드리면 잘 지워지고요.”

그는 스스로를 “천생 애엄마”라고 했다.


채시라는 이미 연예계 ‘수퍼맘’으로 유명하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 속 채시라 역시 딸(이하나)을 교수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모두 내던지는 억척모로 나온다. “첫째(딸)가 중학교 2학년인데, 키(173cm)가 하나씨랑 비슷해서 때리거나 안을 때 감정이입이 잘돼요”라고 했다. 기억에 남는 신(scene)도 교육적(?)이었다. “골목에서 불량학생들 맞닥뜨린 다음에 ‘야구빠따’ 들고 막 휘두르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서 거의 반 미쳐서 소리 지르죠. 이 악마의 자식들아!” 그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다. “일진들 혼내주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애들 학교 보내는 엄마라 그런가 봐요.” 드라마 출연 전까지 그의 주업무는 방과 후 애들 숙제 봐주는 거였다. “숙제, 채점 도와주고 그랬는데 요즘엔 그러질 못하고 있다”면서 “잠깐이지만 아예 놔버렸다. 그런데 애들이 엄청 좋아한다”며 웃었다. “오히려 애들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저도 평온해지더라고요.”

학교 얘기 나온 김에 학창 시절을 꺼냈다. “학교 다닐 때는 되게 소극적이고 선생님이 뭐라도 시킬까 봐 두려워서 고개 숙이고 있던 그런 학생이었다”고 했다. 극 중의 채시라는 정반대다. 선생이 “성적순 번호표를 교복에 붙이고 자리도 성적순으로 배치하겠다”고 하자 김현숙은 되받는다.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가 발전을 안 할 것 같은데요.” 당연히 찍히고, 미움받고,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는 빌미가 된다. “현숙이는 정말 용기 있는 아이예요. 자기 색깔도 있고.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인정받고 잘 컸을 텐데. 나는 저러지 못했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그런 학생을 만나면 박수 쳐주고 싶어요.”


어릴 적 꿈은 영어 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가나초콜릿’ 모델로 데뷔했다. 드라마 데뷔작은 1983년 KBS 〈고교생 일기〉다. “교복자율화 당시의 얘기를 다룬 드라마라 극 중에서 교복을 입고 촬영하진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채시라는 교복 세대 겸 교복자율화 세대. “1990년 MBC 〈두 권의 일기〉에서야 교복을 입어봤죠. 겨울 동복 입고 양 갈래 머리 땋고. 애들이 대걸레 들고 양동이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핑 돌아요. 아, 내가 저랬었지.” 어릴 적 꿈은 영어 교사, 외교관이었다. “팝송을 좋아했어요. 댄스 음악도요. 그래서 영어 과목을 좋아했어요.” 드라마 속 김현숙처럼, 미국 팝가수 레이프 가렛의 ‘Surfin U.S.A’를 열창하던 소녀는 어느덧 중학교 2학년 딸,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엄마가 됐다.

“요즘 웬만한 집 가보세요. 자식 많아봐야 하나 아님 둘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다들 지극정성인데, 요령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는 ‘줄다리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늘 ‘숙제 먼저 해’와 ‘간식 먹고 할게요’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요. 잘 당겨야 하는데, 실패할 때가 있어요. 컨디션 좋을 땐 굉장히 인자한 엄마가 됐다가, 어쩔 땐 엄청 혹독해지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저도 인간인지라 쉽지가 않네요.” 딸 채니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제가 뭐라고 하면 이젠 막 반항을 해요. 그럼 ‘아니,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이렇게 나오나’ 싶죠. 이거 드라마에서 연기할 때 느끼는 거랑 똑같아요. 얘 좀 더 크면 진짜 나한테 들이받고 험한 말 하는 거 아니야?” 말을 잇기 전에 채시라가 쿡쿡 웃었다. “그래서 자식한테만 매달리면 안 돼요. 어떻게든 내 만족을 찾아야겠구나,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야겠구나 이런 생각?”


이제 이 여배우는 지천명을 앞둔 나이가 됐다. 초조하지는 않다. “나이 들면서 더 풍부해진 것 같아요. 동네 구멍가게 운영하다가 큰 수퍼마켓으로 넓힌 것처럼요.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요.” 그러다 ‘순리’라는 단어를 꺼냈다. “순리를 무시하면 안 돼요. 지금 내게 섭외 제안이 들어오고, 그게 어떤 역할이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해야죠. 나이 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배역을 할 수 있다는 거요.”

‘내가 배우였구나.’ 그는 이번에 깨달았다. “집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다시 현장에 돌아오니 에너지가 끓어오르네요.” 곧 드라마가 끝난다. 다시 실업의 고비를 넘기며, 존재론적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급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새 학기를 맞아 초등학생 아들의 학부모 설명회에 가는 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쯤 학교에 가서 도서 봉사활동도 할 것”이라며 웃었다. 전파와 무관하게, 그가 총천연색으로 살아 넘치는 이유로 들렸다.
  • 201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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