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자>에서 고뇌하는 과학자 역 유연석

진실의 직구를 던지다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유연석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스타가 된’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다.
차라리 볼 하나하나를 정성껏 던지는 투수에 가깝다.
<응답하라 1994>로 비로소 스타가 된 이 ‘중고 신인’의 차기작은 영화 <제보자>.
이번에도 그는 묵묵히 직구를 던진다.

사진제공 : 메가박스 플러스엠
“<응답하라 1994>는 제게 ‘9회말 투아웃 삼진 아웃’ 같은 작품이에요. 선수에게 9회말 투아웃은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고, 투수에게 삼진은 홈런만큼이나 짜릿한 순간입니다. 이 작품은 데뷔 10주년을 맞은 제게 그런 기쁨을 선사해줬어요.”

지난해 <응답하라 1994>의 촬영을 마친 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연석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 <올드보이> 이후 10년,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중고 신인’으로 9회를 견뎠다. 그리고 마침내 삼진, 이 꾸준한 투수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그라운드에 새기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서른 즈음 스타의 반열에 오른 유연석의 다음 행보는 영화 <제보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등을 만든 임순례 감독의 신작이었고, 2005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 스캔들’을 담은 내용이었다. 유연석이 연기한 심민호는 과학자이자 연구원으로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알린 제보자. 평소 존경하던 선배 박해일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어 감사했다고 소감을 전했지만, 분명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촬영을 마친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는 그리고 많이 남는 영화였어요. 근래에 그런 작품이 얼마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 질문도 던지게 돼요. ‘나는 진실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을까’에 대해서요.”


시사회를 마친 후 대체적인 평은 ‘시작과 동시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곁가지를 치지 않고 밀어붙인다’는 것이었다.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건, 게다가 결론까지 나와 있는 이야기다 보니 배우에게는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도, 기회도 없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영화를 찍을 때 ‘심민호’의 캐릭터가 부각되거나 드러나는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더 중요했죠. 제보가 중심이었으니까요. ‘심민호가 말하는 진실’이 얼마나 잘 전달될까 자체가 고민이었죠. 과학자로서의 양심과 아픈 딸에 대한 부성애, 그 감정선에 대한 정리가 어려웠어요.”

그는 또래의 미혼 남성들보다 아이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지난 5월 에티오피아에 다녀와서는 아이들의 사진만 모아 <아이(eye)>라는 사진전을 열었다. 군 복무 중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라이카 M3부터 시작된 카메라와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카메라 앞뿐 아니라 렌즈 뒤에 선 느낌을 간직할 수 있어서다.

“아픈 아이를 둔 부모님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최근에 사랑받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도 다 찾아봤어요. ‘딸바보’ 아빠의 느낌은 어떤 걸까 궁금해서 주변에 딸 가진 지인들한테도 많이 물어봤고요. 결국 심민호가 결심하게 된 계기가 ‘딸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거니까요.”


<올드보이> 유지태의 아역으로 스크린 등장

임순례 감독은 제보자 심민호도, 이를 세상에 알리는 PD 윤민철(박해일 분)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동시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그린다. 때문에 이들은 우리처럼 고민하고, 고뇌하고, 때로 절망한다. 극 중에서 유연석은 곧잘 손톱을 물어뜯는데, 영화 촬영 전 여러 연구소를 다니며 관찰한 이들의 습관을 담은 것이다.

“테이크가 많이 간 장면은 ‘제보자가 방송국에 가서 제보하는 장면’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장면이니까 다들 공을 많이 들였죠. 저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그저 팩트만 이야기하자’로 정리했어요.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고요. 진실 외에 다른 장치가 필요 없으니까요.”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와 배우는 참 닮아 있다. 그저 우직하게 “내가 가진 것은 진실뿐”이라고 말한다. 여태껏 유연석이 작품을 대해온 방식도 그렇다. 2003년 <올드보이> 유지태의 아역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뒤, 한 작품 한 작품 공들여 작품을 쌓았다. 세종대학교 연기예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동대학원에 재학 중인데, 같이 공연했던 학우들과는 지금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건축학 개론>의 ‘강남오빠’도 <늑대소년>에서 순이를 괴롭히던 ‘지태’도 그렇게 탄생했다. 단막극이든 저예산 영화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그러기 위해 그보다 많은 수의 오디션을 봤고, 숱하게 떨어지기도 했다.


“조바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실은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익숙해졌어요. 작품을 쉬지 않고 하다 보니까, 그 시간이 지나가더라고요. 작품 하나에 일희일비하던 마음이 좀 무뎌졌어요. 제일 힘들 때는 작품이 없을 때예요. 출연료가 적어도, 흥행에 대한 기대가 없어도 제가 연구해야 할 캐릭터가 있으면 힘들지 않아요. 그러면서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소중하고요. 그런데 그런 기회조차 없을 때가 힘들죠. 오디션도 무척 많이 봤죠. 부지기수로 떨어지고요. 나중엔 떨어지는 게 속상한 게 아니라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열 번 스무 번 떨어지고 한 번 붙는 게 맞았던 거죠.”

동년배의 배우들이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동안 무대 가장자리에 서 있던 시간도 길었다. 나중에는 ‘크든 작든 작품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소처럼 묵묵하게 일한다고 그의 오랜 팬들은 유연석을 ‘유연소’라 부른다. 이미지 관리한다고 악역을 마다하지도, 인기를 끌겠다고 ‘칠봉이 캐릭터’를 오래 껴안고 있지도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처음에는 특징이 없는 얼굴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덕분에 다양한 얼굴이 나올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해요. 악역도 내가 ‘나빠야지’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면 이해가 돼요. <응답하라 1994>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저는 제가 해오던 방식대로 하려고 해요. 악역 이미지를 바꾸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칠봉이 캐릭터를 오래 갖고 가야 한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꽃보다 유연석, 비로소 빛을 보다

최근 포털사이트에서 유연석의 연관검색어는 ‘라오스’다. 배낭여행을 꿈꾸는 청춘들의 종착지이자 tvN <꽃보다 청춘>에서 그가 <응답하라 1994>에 함께 출연한 손호준, 바로와 함께 떠난 곳이기도 하다. 연출자인 나영석 PD는 이들의 여행을 “<꽃보다> 시리즈의 정답 화면”이라고 정의했다.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배우 신구는 “여행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떠나야 한다”고 말했는데, 바로 그 푸르른 젊음이 화면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연석은 여행 내내 여행 서적을 끼고 다니며 일정을 짜고, 초짜 여행자인 손호준과 어린 동생 바로를 살뜰히 챙겨 화제가 됐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고, 물건을 살 땐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소매를 걷어붙였으며, 푸른 계곡에 뛰어들 땐 너른 어깨를 자랑하며 ‘막 찍어도 화보’ 컷을 만들었다.

“제가 좀 꼼꼼한 성격이에요. 원래는 스케줄을 꼼꼼히 짜야 움직였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그렇게 급작스럽게 (몰카에 속아) 떠나면서 연기관이나 인생관에 영향을 받았어요. 그동안 너무 생각이 많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여행은 지금 당장 떠나는 게 중요합니다(웃음).”

<꽃보다 청춘>에서 화제가 된 장면 중 하나는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던 ‘연석맘’(프로그램에서 두 친구를 엄마처럼 챙겨 생긴 그의 별명)이 돌변했을 때다. 이를테면 안 그래도 빠듯한 예산인데 손호준이 담뱃값을 달라고 칭얼거릴 때나, 출연진에게는 고작 72만원의 용돈만 건넨 제작진이 자기들끼리는 고가(?)의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 유연석은 안연석(본명)으로 변신한다. 손호준에게는 나지막히 “꺼져”라고 말하고, 제작진의 아이스크림 하나를 몰래 슬쩍해 버스 안으로 도주한다. 이미지 관리가 숙명인 배우의 삶, 지금 생각해봐도 그 순간만큼은 “배우 유연석이 아니라 그냥 안연석”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가 여행지에서 이렇게 ‘훈훈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여행의 즐거움과 슬픔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이 처음이던 손호준이나 바로에 비해 그가 의젓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난해 <응답하라 1994>로 별안간 스타가 되었을 때는 훌쩍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구름에 뜬 듯 황홀한 기분에 빠지지 않고, 직접 대지를 밟으며 자신의 꿈에 대해 돌이켜봤다. 그때의 여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남는다. ‘꿈은 꾸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에티오피아 여행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지금의 내 꿈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해보게 됐고요. 그때 결심한 게 앞으로도 제가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생기면 독립 영화인가, 저예산 영화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 만드는 과정이나 마음은 똑같거든요.”

그렇게 정리한 뒤 선택한 작품이 바로 <제보자>다. 연기에 대한 태도도 그대로, 작품에 임하는 자세도 그대로, 심지어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오지랖도 그대로다. 초등학교 전교회장 출신인 유연석은 지금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중요하다. 그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제보자> 촬영은 추운 겨울에 이뤄졌는데, 유연석은 극 중 아내로 출연한 배우 류현경에게 점퍼를 건넸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고 우습게 말하면 오지랖인데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친구들 앞에 나서서 뭔가를 도모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일이 잘 이뤄져나가면 행복을 느껴요. 저랑 있을 때 제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요. 이번에 <제보자> 할 때 (류)현경씨 같은 경우는 제 와이프 역이고 하니까 더 신경을 썼죠(웃음).”


어깨만 100평, 그 오지랖의 넓이

그의 바람대로 그의 행보는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꽃보다 청춘> 이후로는 ‘유연석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테마로 한 기사들이 쏟아진다. <꽃보다 할매>의 이서진, <꽃보다 누나>의 이승기를 압도하는 탁월한 ‘짐꾼’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 이서진보다 다정하고 이승기보다 똑똑하다(?)는 평을 듣는 그는 ‘제작진도 모르게 돈을 불리는 기술’을 선보여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길을 걷는 많은 무명의 배우들에게 그의 존재는 더욱 힘이 된다. 한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언젠간 기회가 온다고, 그렇게 늘 던지던 대로 직구를 던지면 ‘9회 말에도 삼진은 터진다’고 그의 넓은 어깨가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선배가 어떻게 연기를 해왔는지 아는데 그렇게 걸어온 선배가 이렇게 되어줘서 고맙다’고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연기 열심히 하라고, 희망이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고요.”


<제보자> 이후에도 유연석의 작품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한석규와 함께 출연한 <상의원>, 임수정과 함께한 <은밀한 유혹>, 곧 촬영에 들어갈 <그날의 분위기> 등이다. 지난 경기를 얼마나 환호 속에 끝마쳤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셈이다. 다시 새로운 경기가 시작됐고, 유연석이 마운드에 섰다. 와인드업, 그의 직구가 곧게 스크린을 가른다.
  •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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