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 나는 배우, 스크린의 여행자, 정재영

글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사진 : 김선아 

배우 정재영(44)은 연이은 영화 촬영에도 얼마 전 틈을 내 벼르던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모처럼 마음먹은 보름간의 가족 여행이었고, 미국행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즐거웠던지 소년 같은 함박웃음으로 지난 여행길을 떠올리며 “진정한 서양을 다녀왔다”고 능청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행이라면 국내든 해외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1년에 한두 번은 가자고 해왔지만 불규칙한 영화 일정에 짬을 내기 어려워 매번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대리 충족하던 그였다. 이번 미국 여행길에선 그랜드캐니언을 비롯한 대자연의 풍광을 마음껏 감상했다. 보통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돈만 있으면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 돌아가기 싫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왜 자연을 두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작다고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좋았다”는 정재영. 연기 외에는 뭐든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고, 특별히 열광적으로 빠져드는 취미도 없다지만, 여행만은 늘 꿈꾸고 바라는 것이다. 마음만큼 몸과 시간이 허락해주질 않지만,

정재영은 비유컨대 스크린의 여행자라 할 만하다. 매번 다른 인물이 돼서 항상 다른 인생의 길을 간다. 관객에겐 두 시간쯤의 동승이지만 그에겐 모든 작품이 몇 개월 동안 겪어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여정이다. 그 길 위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헤어지고, 그 길로부터 떠나와 또 다른 길로 접어든다. 특별히 요 몇 년간은 시간의 여행자였고, 장르의 여행자가 됐다. 지난해 개봉했던 〈열한시〉에선 ‘타임슬립’(시간 이동)을 겪어 24시간 후의 미래로 떠난 과학자였고, 4월 17일 개봉한 〈방황하는 칼날〉에선 딸을 잃은 비련의 아버지로 ‘비극의 현재’를 살았으며, 4월 30일 개봉하는 사극 〈역린〉에선 조선 정조시대의 내시가 됐다. 〈방황하는 칼날〉과 〈내가 살인범이다〉(2013년)가 범죄 스릴러였고, 올초 개봉했던 〈플랜맨〉은 로맨틱 코미디였으니 SF(〈열한시〉)와 사극(〈역린〉)까지 장르의 횡단도 미 대륙만큼이나 폭이 넓다. 카메라가 그를 붙들어주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여행자가 됐으리라. 하지만 스크린의 여행이면 어떠랴. 길에서 인생을 겪는 자, 여행하는 자 특유의 사람냄새가 그의 연기에 올올이 배어 있으니 말이다. 어느덧 영화 데뷔 18년차의 배우. 모든 것에 싫증을 잘 내지만 유일한 한 가지, 연기에는 진 빠지는 법이 없다는 정재영을 봄날의 어느 날,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누구라도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어 할 만한 소탈한 웃음과 뻐기는 법 없이 격의 없는 대꾸가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정재영이 데뷔 시절을 떠올리며 해줬던 말이 기억났다.


“〈박봉곤 가출사건〉 때였어요. 제가 단역을 맡았는데, 안성기 선배를 현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를 상대하시는 장면이었는데,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단역이 애드리브(즉흥연기)를 하는 데도 받아주시더군요. 스타라면 밤 촬영 때 찍는 장면이 없으면 차 안에 있다가 나오실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항상 웃고 동료, 스태프를 재미있게 해주셨어요.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제가 저 위치까지 가면 안성기 선배처럼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지금 환갑이 되셨는데도 재미있게 하시는 비결이 아닐까요?”

18년 전, 무명배우였던 스물여섯 살의 정재영은 두 번째 출연작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이름도 없는 ‘불량배’로 몇 컷 등장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던 선배가 안성기다. 주연이든 조・단역이든 막내 스태프든 일일이 이름을 불러줘 가며 차별 없이 응대했고, 스스럼없이 말을 섞었다. 그리고 지금, 정재영은 그때의 안성기만큼 나이와 이름, 그리고 영화경력을 얻었다. 얼추 비슷한 나이가 됐고, 한국영화계에서 액션과 코미디, 휴먼드라마, 스릴러 등 장르를 불문하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주연배우가 됐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공연한 박시후가 정재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재영 선배를 처음 만났는데, 그전에는 차가울 줄 알았죠. 그런데 현장에서 슬리퍼 신고 동네 형같이 편하게 대해주셨어요. 저에게 첫 영화니까 좋은 추억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하셨죠. ‘내 딴에는 편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는데, 넌 어땠냐’고 물어주시기도 했고요. 얘기도 많이 하고 허물없이 지냈어요.”

무장을 해제한 채 ‘푸핫’ ‘흐흐’ 웃는 폼은 듣는 사람도 경계를 풀게 한다. 이웃집 형 같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고, 사람 좋은 선배 같고, 믿음직한 오빠 같은 사람이 바로 정재영이다. 그런 그도 화를 내는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두 번 귀동냥으로 듣기도 하고 목격도 했는데, 모두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 상대에게 정재영이 참고 듣다 결국 ‘버럭’ 한 경우다. 둥글둥글, 허허실실인 것 같지만, 경우 없는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만은 않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연기했던 인물들은 모두 친구로 남아

배우로선 최근 부쩍 개봉작이 많았다. 최근 1년여간 4~5편이 몰렸다. 장르도 다양했다.

“예전보다 더 몰아 찍거나 더 많이 출연한 것은 아니죠. 몇 개월 찍고 좀 쉬었다 다시 촬영하는 리듬은 유지했지만 공교롭게 개봉 시기가 몰려서 다작을 한 것처럼 보인 거죠. 장르를 바꿔가며 촬영하니까 색다른 재미는 있어요. 말하자면 여자나 남자나 외모, 취향, 직업, 성격 모두 다른 상대를 늘 바꿔가며 만나면 얼마나 좋겠어요(흐흐). 물론 좋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기억에 남는 영화를 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죠.”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지만, 쉽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아내와 사별하고 애틋하게 키워온 여고생 딸이 어느 날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또래 남학생 몇 명에게 유린당한 채 죽은 것이다. 경찰 수사 중 형사보다 한발 앞서 가해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아버지는 공범 중 한 명을 찾아갔다가 우발적으로 소년을 죽인다. 피해자・희생자의 유족에서 ‘살인자’가 된 남자. 그는 또 다른 가해자 소년의 행적을 찾아 나서고, 경찰은 또 다른 범행을 막기 위해 남자를 추적한다.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시나리오는 매력적이었고 완성도가 높았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살인자가 돼 쫓기는 심리 연기와 추운 겨울 숲 속을 헤매는 장면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얘(주인공이 뒤쫓는 가해자 소년)는 왜 한겨울에 산으로 도망가서 힘들게 해? 괌 같은 곳으로 가지 말야”라고 스태프들과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찰과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가해자 소년을 대면하는 장면은 연극을 포함해 20여 년 이상 연기만을 해온 배우에게도 힘든 연기였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 집중도 안 되고, 감정이 이해는 되지만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장면이었죠. 영화를 찍으면서 이 정도로 애를 먹은 경우는 몇 번 없었던 것 같아요. 작품 촬영 처음부터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됐으니까요. 싸움도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남자가 딸이 유린되고 죽어가는 동영상을 보고 가해자 소년을 몽둥이로 살해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 마음을 갖고 계속 영화가 진행돼야 하니까 말이죠.”

직전에 출연한 영화는 〈플랜맨〉이었다. 로맨스 영화다. 뭐든지 정리정돈돼 있어야 하고, 계획대로 해야만 하는 결벽증과 강박증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정재영의 몫이었다. 그가 ‘무계획의 인생,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을 만나 엮이는 러브 스토리. 정재영은 또래의 중년 배우, 연극 출신 영화배우로선 드물게 로맨스 영화를 제법 많이 찍었다. “의외”라는 표현에 웃는 얼굴로 “왜”라고 반문했지만, 청춘 스타나 꽃미남 스타 출신이 아닌 남자 배우에게 로맨스 영화의 몫이 확실히 적은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정재영은 〈아는 여자〉 〈나의 결혼 원정기〉 〈김씨표류기〉 등의 로맨스 영화를 찍었다.

“로맨스도 여러 가지가 있죠. 제가 하는 로맨스는 평범하거나 하자가 있는 인물의 것이죠. 저도 카사노바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원할까요? (류)승룡이의 카사노바(〈내 아내의 모든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제가 하는 로맨스는 평범하거나 소심하거나 하자 투성이인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들이죠. ‘정재영이도 할 수 있으니 너도 해봐’라는 위로를 던져준다고나 할까.”

연극으로 시작해 연기경력은 25년이 넘었고 영화 출연작은 35편을 찍었다. 그중 주연작만 20여 편이다. 황정민・임원희・최성국・안재욱・신동엽 등과 서울예대 동기이며, 지금 한국영화계의 거목이 된 송강호・최민식・설경구 등이 그랬듯 달랑 캔커피가 두 개인 데이트가 전부였던 가난한 연애시절을 거쳐 결혼했다. 배고픈 무대에서 수년간을 무명으로 지냈고, 단역과 조연을 거쳐 한국영화계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배우로서 치명적인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군복무 중이었다. 스물세 살 상병 시절의 이야기다. 고참이었던 그는 체력단련실에서 혼자 벤치에 누워 돌 역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힘이 빠져 내려놓지도 계속 올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결국 냅다 머리 위로 내려놓던 역기가 앞이마를 쳤다. 두개골 골절 및 함몰. 두 달간 ‘틱 장애’까지 왔다. 다행히 완치됐고, 지금은 우스개 삼아 떠올리는 일화지만 당시로선 배우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아찔한 위기였다. 병장 때는 5~6cm나 되는 대바늘이 발에 통째로 박히기도 했다. 스크린에선 한 치 틈도 없는 연기를 하지만, 왠지 정재영다운 ‘사람냄새’ 나는 에피소드들이다.


그는 서른다섯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장진 감독의 페르소나(영화적 분신)가 되기도 했고, 강우석 감독 영화의 ‘4번 타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말하자면 주연이든 조연이든, 범죄의 세계든 인간적인 희극이든 모자란 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든 서른다섯 개의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정재영은 자신이 연기한 작품 속 주인공들이 다 “마음속 친구”로 남는다고 했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내가 연기한 분신이 또 하나 늘었다는 성취감이 먼저 들죠. 평가를 떠나 잘됐든 못 됐든 그 인물은 오롯이 내 자취로 남으니까 말이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이 모두 친구가 되는 느낌이에요. 마음속에서 늘 저를 지켜보고, 또 내가 바라보는 친구 말이죠. 언제나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 요즘 같으면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이 가장 마음이 쓰이지만, 지나고 나면 불쌍한 친구도 있고, 그냥 내버려둬도 잘살고 있을 것 같은 친구도 있어요. 예를 들면 〈플랜맨〉 〈결혼 원정기〉 〈김씨표류기〉 〈아는 여자〉의 주인공들…. 이들은 저 정재영보다 모자란 친구들이고, 연민이 가는 친구들이죠. 반면 〈이끼〉의 이장, 〈공공의 적〉 깡패, 〈실미도〉의 부대원, 뭐 이런 친구들은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거 같고.”

이제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을 친구로 남기고, 〈역린〉에서 정조의 최측근 내시 ‘상책’을 사귀러 떠난다. 말하자면 그들은 스크린의 여행자 정재영의 길벗인 셈이다.

글 이형석 / 사진 김선아
  • 201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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