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인디밴드 보컬로 변신한 영화 <플랜맨>의 한지민

당신이 아는 한지민은 거기에 없다

글 : 박소영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배우 한지민을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단아’ ‘청초’와 같은 것들이다. 대표작 <이산> <경성스캔들> <부활> 등의 드라마에서 한지민은 곱고 참한 이미지의 여성을 주로 연기해왔다. 배우에게 ‘이미지’란 일면 관객에게 각인되어 있다는 뜻이면서, 그 자체로 한계이자 올무일 터. 한지민 역시 그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간 연기한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것,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1월 개봉한 영화 <플랜맨>은 그런 그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지민은 거기에 없다. <플랜맨>의 ‘소정’은 빈티지한 옷을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는 인디밴드 보컬이다. 검정색 네일아트에, 아이라인도 짙게 그렸다. 그러곤 예의 천사 같은 얼굴로 이렇게 내뱉는다. “아저씬 그럼 똥 마려울 때도 알람 맞춰놓고 계획한 대로 뿍 싸요?” 1월 7일 삼청동에서 만난 한지민에게 캐릭터에 대한 느낌을 전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실제로도 왈가닥 ‘오지라퍼’ 소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동안 사극에서 보여드린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보다 소정이의 모습을 많이 갖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정도로 지저분하진 않아요(웃음).”

<플랜맨>은 1초 단위로 삶을 계획하는 남자 정석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여자 소정이 만들어가는 좌충우돌 러브스토리다. 정석은 강박증에 결벽증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 지각·결석은 꿈도 못 꾸고, 물건은 모두 열 맞춰 정리해야 하며, 24시간 살균 스프레이를 달고 산다. 그런데 그런 정석이 계획이라고는 없는, 털털하다 못해 지저분하기까지 한 소정과 사랑에 빠진다.

“소정이는 예쁘게 보여서는 안 되는 캐릭터예요. 그런데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좀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인디밴드 보컬이라는 점도 끌렸고, 소정이가 부르는 노래 가사가 엉뚱하고 톡톡 튄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죠.”

어느덧 데뷔 10년을 훌쩍 넘긴 그다. 그간 한지민은 코믹・액션・공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꾸준히 도전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항상 비슷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라면 당연히 변화를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다른 것들을 해보고 싶었는데, 드라마에서는 한계가 있었어요. 멜로라인에 있는 여주인공은 대개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면이 강하거든요. 반면 영화는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잖아요. 그래서 캐릭터가 돋보이는 역할이라면 비중이 작더라도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소정의 매력은 그가 쓴 ‘소정스러운’ 가사를 통해 십분 발휘된다.

“알람시계 부숴버릴 거야. 다이어리 찢어버릴 거야. 개나 줘버려. 고양이나 줘버려(OST ‘개나 줘버려’ 중).” 정도는 애교다. 극중 유부남에게 속아 그를 사랑하게 됐다 버림받은 소정은 그에게 노래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마누라가 있으면 티를 내야지. 어디서 총각 행세야. 반지를 왜 빼니. 전화는 왜 끄니. 문자는 왜 씹니. 핸드폰 왜 두 개니(OST ‘유부남’ 중).”

“노래 중에 ‘유부남’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좋더라고요. 영화 속 대상은 유부남이지만 사실 많은 여성이 헤어진 남자친구를 생각하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어요. 뮤지씨가 노래를 만들었는데 가사가 굉장히 재미있고 참신해요.”

한지민은 극중에서 숨겨둔 노래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영화 촬영 6개월 전부터 보컬과 기타 레슨도 받았다. 혹독한 훈련 탓이었는지 손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후두염에 걸리기도 했다.

“원래 성대가 약한 편인데 무리를 했나봐요. 촬영하는 내내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나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쇳소리가 나오더라고요. 그 이후로 목이 돌아오질 않아요. 참고로 오늘 OST가 나왔어요, 여러분!(웃음) 오래 듣긴 힘드시겠지만, 한 번씩 들어봐주세요.”

한지민이 3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플랜맨>을 선택한 데는 상대배우 정재영의 영향이 컸다. 정재영이 ‘정석’ 역을 맡기로 했다는 제작진의 귀띔에 한지민의 눈이 번쩍 뜨인 것. 그에게 정재영은 꼭 한 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연기 선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앞섰다.


“<이끼>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거죠. 무서울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뵈니까 정말 편한 거예요. 천진난만하시고, 현장에서도 아줌마처럼 웃으시고(웃음). 코미디 영화로 만나길 참 잘했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감독님이랑 셋이 만났는데, <이끼>의 눈빛을 하고 계신 거예요! 작품 얘기를 하니까 눈빛이 180도 달라진 거죠. 깜짝 놀랐어요. 정재영 선배님은 한 신을 갖고 기본 한 시간을 얘기해요. 인물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면 절대 안 넘어가요. 선배님이랑 저, 둘이 나오는 신에 대해서 절반쯤 얘기했는데 7~8시간이 지나 있었어요.”

정재영과 한지민의 찰떡 호흡은 현장에서도 유명했다. 한지민이 정재영을 ‘현장의 꽃’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정재영은 한지민을 함께 작업한 상대배우 중 가장 예쁜 배우로 꼽았다.

“정재영 선배님이 저를 ‘짐느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짐느님이 뭐예요?’ 이렇게 물으면 제 팬카페에선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또 우리 영화는 인간과 여신의 만남이라고 하시고. 처음엔 민망했는데 지금은 적응이 돼서 즐기고 있어요. ‘어? 오늘은 왜 칭찬 안 해주시지?’ 이런 생각도 들고요. 다음 작품 하실 때 지켜봐야죠. 다른 여배우를 칭찬하시는지 안 하시는지(웃음).”


실제 사랑에는 적극적이지 못해요

영화 속 소정은 사랑에 적극적이다. 정석이 짝사랑하는 여자를 보며 애태울 때 그를 돕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정석을 밴드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지민이 연애할 때의 모습은 어떨까.

“소정이처럼 적극적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선을 많이 긋는 스타일이거든요. 좋아해도 고백을 잘 못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려요. 상대방은 저한테 호감이 있는데 제가 좀 늦는 경우도 있고, 타이밍이 안 맞죠(웃음). 초반에 적극적이기보다 천천히 신뢰를 주는 편이에요. 싸우는 것도 싫어하고요. 싸우면 이메일을 써서 제 마음을 알려요. 화가 나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니까 조금 떨어져서 생각해보는 거죠. 이메일을 쓰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고, 쓰는 동안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해요. 저 손편지 좋아해요. 근데 요즘엔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드문 것 같아요. 답장을 잘 안 해주더라고요(웃음).”

연예계에서 한지민은 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우로 알려져 있다. 사실 한지민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그간의 행보가 한몫했다. 한지민은 문화·예술인 봉사모임 길벗에서 활동하며 굶주리는 지구촌 아이들을 위해 매년 두 차례 거리 모금에 나선다.

“많은 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일 많이 안 해요, 저(웃음). 그냥 오래 하니까 많이 하는 줄 아시는 것 같아요. 처음 봉사활동을 한 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보육원 봉사를 마치고 거기 있던 친구한테 ‘또 올게’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때 그 친구의 대답이 충격이었어요. 그런 말 쉽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약속해놓고 아무도 안 온다고. 우리가 으레 하는 말이 그 친구에겐 상처가 됐던 거죠. 그 이후로 봉사에 관심을 가졌어요. 연기를 하면서부터는 사회사업과 배우 일을 병행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했는데, 운 좋게도 노희경 작가님, 배종옥 선배님과 함께 모금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많은 걸 배웠죠. 제가 가진 배우라는 타이틀에 엄청난 영향력과 호소력이 있다는 것. 배우로 일하면서 이 일을 하면 효과가 더 클 거라는 것.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하자고 제 자신과 약속했어요. 그런데 모금 활동을 하다보면 화도 많이 나요. ‘왜 안 낼까, 5000원짜리 커피를 들고 있으면서 왜 1000원을 안 내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웃음).”


현재는 배우로서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나가고 있지만,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 그는 남모르게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연기를 놔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죄책감마저 느꼈어요. 이걸 소화하기엔 내 그릇이 작은데 너무 큰 것들이 주어지니까 해낼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연기를 하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죠. 그러다가 ‘하다보면 조금씩 늘지 않을까’ 하는 시기가 왔고, 그때부터는 욕심을 좀 냈어요. 주어지는 역할 하나하나를 감사하게 생각할 줄도 알게 됐고요. 시간이 빨리 가요. 앞으론 점점 더 빨라질 것 같아요. 서른한 살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 뒤로는 너무 빨라요. 볼살도 빠지고(웃음).”

한지민은 30대가 된 후 볼살을 잃었다고 애교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의 옷을 입은 성숙한 여배우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이산>이나 <경성스캔들>을 보면 제가 통통했더라고요. 그런데 체구가 작은 데다 통통하기까지 한 걸 감독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가냘프고 여성스러운 선이 나오는 배우들이 부러웠고요. 저 이젠 좀 여자 같죠?(웃음)”

한지민의 본격 행보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그는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올해 개봉 예정인 또 다른 영화 <역린>에서 한지민은 젊은 대비 정순왕후로 분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이다.

“역할이 작아요. 사실상 단역이에요(웃음). 그런데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선택한 건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과 시나리오 때문이에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같이 출연하는 선배님들도 꼭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던 분들이거든요. 안 해본 캐릭터라서 욕심도 났고요.”

한지민이 바라는 배우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그는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관객의 예상을 뒤흔들까.

“스토리 안에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흡인력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아저씨>의 원빈, <감시자들>의 한효주 캐릭터도 좋아요. 예쁘게 보이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작품 속에서 혼자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 201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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