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앨범 〈Lento〉로 세계를
매혹하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글 : 이선주 TOPCLASS 기자  / 사진 : 나승렬 

“프랑스에서 처음 재즈 공부를 시작할 때는 ‘나는 아무래도 재즈에 맞지 않는 사람 같다. 내 목소리로는 빌리 홀리데이 같은 스윙재즈의 필링을 낼 수가 없어. 1년만 배우고 한국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즈로는 앞이 보이지 않았죠. 그때 선생님이 ‘네 목소리로도 충분히 재즈를 할 수 있어’라며 유럽 재즈 보컬리스트들의 음악을 들려줬습니다. 아기 같은 목소리까지 가지각색 자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더군요. 거기에 용기를 얻어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재즈는 사실, 모든 것이 가능한 음악입니다.”
프랑스에서 재즈를 배운 한국의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그는 이제, 앨범을 낼 때마다 프랑스 재즈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앨범이 나오기 전 예약판매만으로 1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연주를 많이 하는 재즈 뮤지션이다. 지난 3월 한국과 프랑스에서 동시 발매한 새 앨범 〈Lento〉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유력 문화잡지 〈Telerama(텔레라마)〉는 이번 음반에 만점(별 4개)을 매겼고, 프랑스 대표 재즈전문채널 ‘TSF JAZZ’는 〈Lento〉를 꼭 들어야 할 음반에 올려놓으면서 하루를 ‘나윤선 데이’로 선정해 모든 프로그램에서 나윤선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프랑스 최대 재즈매거진 〈Jazzman〉은 이전 두 앨범 〈Voyage〉 〈Same Girl〉에 이어 이번 음반에도 최고의 음반에 붙이는 찬사인 CHOC(=shock)을 수여하며 “수퍼스타 나윤선이 곧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평했다. 예술가들에게 꿈의 무대로 꼽히는 파리 샤틀레극장에서 공연할 때는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 중에도 나가버릴 정도로 냉정한 파리 관객들로부터였다.

한동안 나윤선이란 이름 앞에는 ‘우리나라보다는 유럽에서 더 유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앨범 발매 후 서울 LG아트센터,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춘천 강원대 백령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그의 인기는 프랑스와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올해도 프랑스 전역과 독일・이탈리아・

스페인・스위스・룩셈부르크・덴마크・슬로베니아・ 터키・캐나다・미국・중국・뉴칼레도니아까지 세계 각국에서의 연주 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다. 그는 매년 전 세계를 다니며 100회 이상의 연주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이번 음반의 제목이기도 한 타이틀곡 ‘Lento’는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랴빈의 ‘프렐류드’를 편곡한 것이다.

“우연히 스크랴빈의 프렐류드를 들었는데, 귀에 익은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기더라고요. 어렸을 때 들었을 때는 20분쯤 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1분여밖에 안 되는 곡이었어요. 똑같은 음악이 이렇게 길게도 짧게도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요? 당시 바쁜 공연 일정으로 새 음악을 만들기는 어렵겠다 여기고 있었는데, ‘짧은 순간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충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느낌을 살려 이 곡을 3분 4초로 늘려서 편곡하면서 노랫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Lento’라고 제목을 붙였죠. 렌토는 이탈리아어로 ‘느리게’ ‘천천히’라는 뜻입니다.”

나윤선은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을 그저 부르기만 하는 보컬리스트가 아니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12곡 중 절반은 그가 노랫말을 썼고, 작사・작곡을 모두 한 것은 세 곡이다. 그 외에도 수록곡 대부분이 그의 편곡을 거쳤다. 앨범에는 클래식 음악인 스크랴빈 작품부터 얼터너티브 록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Hurt’, 조니 캐쉬의 컨트리 송 ‘Ghost Riders in The Sky’ 패티김이 부른 ‘초우’ 그리고 민요 ‘아리랑’까지 종횡무진 장르를 오간다. 그런데 그 모두, 나윤선만의 색깔을 지닌 나윤선의 노래가 됐다. 이전 앨범들에서 그의 목소리는 노래에 따라 팔색조로 변신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하게 변신할 수 있을까?’ 들을 때마다 감탄했다.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 그의 목소리는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 깊고 파워풀하다.

중국 공연을 다녀온 후 잠시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세월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제 목소리도 점차 중저음이 되는 것 같고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보조개가 패는 귀염성 있는 얼굴에서 세월을 읽을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축하무대에서 가수 인순이, 뮤지컬 배우 최정원 등과 함께 ‘아리랑판타지’를 불렀던 그는 돋보이는 미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미모는요. 제가 얼굴이 덜 알려진 사람이라 화제가 되었을 뿐이지요”라며 민망해한다.


항상 새롭게 도전하며 늙지 않는 음악 할래요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2013년 3월 파리 샤틀레극장 공연.
사진 : 정상환.
무대에서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관객을 사로잡지만, 그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처음 무대에 설 때는 관객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괜찮은데, 말을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곡 소개는 다른 멤버가 하곤 했다”고 한다. 사진촬영도 어색해해 남동생인 사진작가 나승렬이 거의 독점으로 촬영하고 있다. 대중매체에 나가는 것도 꺼린다는 그는 “거리를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안심하는 표정이다. 보통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제 음악을 좋아해주시는 분도 오랜 팬이 많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재즈뮤지션의 명성은 유명세로 생기는 게 아니라, 직접 들어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퍼진다고 한다.

“재즈연주는 즉흥성이 많아 공연 중 연주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호흡을 맞춥니다. 귀를 열고 다른 사람의 연주를 잘 듣고 있어야 가능하지요. 그런데 연주자들끼리만 호흡을 맞추는 게 아닙니다. 제가 노래 부를 때 관객들도 저와 호흡을 같이 하지요. 제가 숨을 멈출 때 같이 멈추면서요. 그때 거짓말같이 이심전심이 이루어지는데, 저와 그들 사이에 에너지가 흐르는 게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와 닿습니다.”

이번 앨범에 ‘초우’와 ‘아리랑’이 들어간 것은 스웨덴 출신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와 베이시스트 랄스 다니엘손(Lars Danielsson)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윤선이 느리게 부르는 아리랑에서는 맑고, 투명하고,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스칸디나비아의 감성이 묘하게도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아요. 아리랑을 울프 바케니우스가 멋지게 편곡해왔더라고요. 아리랑은 멜로디가 단순하고 열려 있어 뮤지션들이 자신의 색깔을 담을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다양하게 편곡할 수 있어 좋아하지요. 아리랑의 가사에는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희망 등 인간의 온갖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데, 가사를 모르고 듣는 외국인들에게도 그게 전해지나 봐요. 자장가로 듣는 사람도 있고, 즐겁게 듣는 사람도 있고,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화와 국적의 경계를 넘어 이렇게 음악만으로도 소통이 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지요.”

울프 바케니우스, 랄스 다니엘손뿐 아니라 아코디언 주자 벵상 페라니, 타악주자 그자비에 드장드르 나바르가 가세한 이번 음반은 전곡을 ‘one take’로 한 번에 녹음했다. 연습도 여러 번 하지 않아 그 자리에서 호흡을 맞춘 곡도 있다 한다. 콘서트 실황녹음처럼 녹음한 음반이라 더욱 현장성이 느껴진다.

“재즈의 묘미가 즉흥성, 현장성입니다. 연주자들 사이의 호흡에 따라 같은 곡이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죠. 똑같은 곡을 다시 연주해도 똑같은 연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연습을 거듭하면 연주자들이 각자 ‘이렇게 연주해야지’라며 계산하게 되는데, 그러다 오히려 호흡이 흐트러지기도 하지요.”

공연장에서도 연주가 매번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한다. 지난 4월 중국 공연 때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중국에서는 아직 재즈가 대중화되지 않아 ‘저 여자 보컬리스트가 뭘 하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봅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마이크는 뭘 쓰느냐?’ 같은 구체적인 질문도 하고요. 공연장에서도 관객들이 소란스럽고 집중하지 않는 것 같은데, 끝나고 나면 거의 모두 앨범을 사고 저랑 기념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어떤 곡이 좋았다고 정확하게 말하고요. 사실은 열심히 들었던 거지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그는 이런 발견을 즐긴다. 그는 세계 각국의 청중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선사하기만 하지 않는다. 그곳 음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음악으로 녹여낸다. 그의 노래에서 한국의 민요와 가요뿐 아니라 프랑스 샹송, 미국의 팝음악과 컨트리뮤직, 세계 민속음악이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서 만난 새로운 음악, 새로운 악기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실험해본다. 함께 연주하는 멤버들에게도 “한 가지 악기로 여러 악기 소리를 내보라”고 주문한다. 항상 새롭게 도전하고 실험할 때에야 늙지 않는 음악을 할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숨을 내쉴 때만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들이쉴 때도 소리를 낼 수 있잖아요? 피그미족의 호흡법이 그렇대요. 요즘 그걸 연습해보고 있어요.”


오는 6월에는 〈Lento〉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매돼 미주지역에서 순회연주를 하는데, 그는 “재즈의 본고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흥미진진하다”고 말한다. 새 앨범은 총 35개국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몸에는 음악적 DNA가 새겨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합창단을 창설한 나영수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어머니는 1세대 뮤지컬 가수 김미정씨다. 음악적 자양분이 풍부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가 프랑스로 재즈유학을 떠나며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스물여섯 살이 되어서다.

“부모님은 ‘뭐든 너희들 원하는 일을 하라’며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어릴 적 부모님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찾아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친구였다.

“건국대 불문과에 진학해 오리엔테이션 때 노래를 불렀는데, 그걸 들은 과 동기가 ‘넌 음악을 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어요. 걔한테 떠밀려 샹송대회에 나갔다 대상을 타고, 데모 테이프를 보내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여주인공이 됐죠. 목소리 때문에 뽑혔지만, 춤에는 영 재능이 없어 안 되겠더라고요.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봐왔기에 함부로 덤비지도 못하겠고요. 클래식 음악을 하기에는 늦었고, 친구한테 ‘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재즈를 배우라’고 하는 거예요. 재즈는 대중음악의 원천이니, 그걸 배우고 나면 뭐든 할 수 있다고요. 그 친구가 재즈음악가 김정렬인데, 2007년에 낸 음반 〈메모리 레인〉에서 그 친구가 작곡한 노래를 불렀지요.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로 간 것은 샹송을 좋아해서예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 스쿨 CIM도 있고요.”

늦게 시작한 만큼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CIM뿐 아니라, 보베 국립음악원, 파리 나디아 앤 릴 불랑제 컨서바토리도 함께 다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했기에 더 집념을 가지고 파고들었다”고 한다.

“무대에 오르면 그가 학생이든,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아티스트로 존중해주는 풍토가 좋았어요. 제가 음악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와 열정, 독창성으로 재즈계를 두드리는 UFO(미확인비행물체)”라고 평한 그는 200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슈발리에 훈장(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훈장을 받기 위해서나 스타가 되기 위해 노래하지는 않는다. 앨범도 미리 콘셉트를 정해두고 만들지 않는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음악에 충실했고, 그게 모여서 앨범이 되었다 한다. 그에게 재즈에 대해 정의를 내려달라 했다.

“재즈는 여행입니다. 시작과 끝은 있지만,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죠.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그렇기에 살아 있고, 늙지 않는 음악이지요. 저는 학창시절 선생님이 떡볶이 집에 가지 말라면 곧이곧대로 가지 않을 정도로 꽉 막힌 학생이었습니다. 재즈를 하면서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현재에 충실하고 순간순간 즐기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게 또 매일매일 치열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재즈를 하시는 분 중에는 여든이 되어도 젊은이 못지않게 노래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는 예전 공연이나 앨범 등 자신의 음악조차 지나간 것은 돌아보지 않아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그 시간, 그 장소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그게 재즈정신인지도 모르겠다.
  • 2013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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