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클라우드 아틀라스〉 출연한 배우 배두나

이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한 해에 영화 두 편을 하니까 기분이 좋네요.”
지난해 4월 〈코리아〉에 이어 1년이 채 가기 전에 또 한 편의 영화로 국내 관객을 만나게 된 배두나(33)가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9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상영을 맞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두나를 만났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몹시 추운 날씨였지만, 창밖 겨울 풍경이 배두나의 경쾌한 목소리와 어울려 오히려 청량했다.
〈매트릭스〉 만든 워쇼스키 남매 감독이 배두나 먼저 찾아

“재작년, 몇 다리 건너서 워쇼스키 남매 감독의 연락이 저에게 닿았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소속 매니지먼트회사가 없었을 때였습니다.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영화관계자를 통해 (〈인류멸망보고서〉에서 만났던) 임필성 감독에게 ‘미국 영화감독이 배두나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어요. 누가 연출하는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임 감독이 그저 저에게 시나리오를 읽어보겠느냐고만 해서 받아왔더니 라나-앤디 워쇼스키 남매의 이름과 톰 티크베어 감독(공동연출)의 이름이 쓰여 있더군요. 그런 다음에 화상미팅으로 미국에 있는 워쇼스키 남매와 인터뷰를 했어요.”

배두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 라나(48)와 앤디 워쇼스키(46)는 〈매트릭스〉로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감독들이다. 한때 형제 감독으로 불렸지만, 라나가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으면서 이제는 남매 영화인으로 꼽힌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었느냐고 해서 재미있게 봤다고 대답하고는 다짜고짜 ‘저를 어떻게 아세요?’라고 물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부터 〈복수는 나의 것〉 〈공기인형〉 〈린다 린다 린다〉 등 제 출연작을 줄줄이 대면서 다 봤다고 하더군요. 〈클라우드 아틀라스〉 중에서 ‘손미’ 역할이 나오는 두 장면을 촬영, 녹화해서 파일과 테이프를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오케이’했죠.”

출연이 확정되고 나서 배두나는 영국 런던에서 3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았지만, 오디션 당시만 해도 배두나의 영어 실력은 유창한 편이 아니었다. 당연히 통역을 동반하고 화상미팅을 가져야 했지만, 배두나는 “감독이라면 오디션에서 배우가 상대의 말을 듣고 반응하고, 대꾸하는 날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해 통역 없이 제 느낌 그대로 영어로 듣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배두나는 자신의 방에서 랩톱 컴퓨터를 켜놓고 혼자 화상미팅에 응했다. 대단한 용기다.

“CF 감독인 오빠(배두한)가 캠코더로 찍어준 ‘셀프 테이프’를 미국으로 보냈어요. 며칠 동안 연락이 없기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잊을 만하던 때에 다시 시카고로 와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으라는 전갈을 받았어요. 물론 비행기 티켓 한 장을 같이 보냈더군요. 제가 ‘할리우드 진출’에 목매는 배우도 아니고, 만일 (항공비 및 체재비 지원 없이) 그냥 오라고 했으면 안 갔겠죠. 하하. 무슨 역할을 맡을지도 모르겠고. 또 스크린 테스트가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거든요. 수십 명의 지원자를 받아서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2~3명으로 압축해서 최종 오디션을 보는 과정이더군요.”


배두나는 그렇게 2011년 5월 홀로 시카고에서 테스트를 받았고, 한 달 후 출연 확정을 통보받았다. 워쇼스키 남매 감독이 후일 “‘셀프 테이프’를 누가 찍어줬냐”고 묻길래 배두나는 “오빠가 해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독이 “오빠에게 ‘굿잡’(good job)이라고 전해달라”고 했단다. 배두나는 “캐스팅되면 오빠에게 ‘맥프로’(애플사에서 나온 최고급 노트북컴퓨터 기종)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저나 오빠나 모두 잊어버렸다. 그냥 아예 잊어야 할 텐데…”라며 웃었다.

‘한국 스타의 할리우드 영화 출연’ 하면 요란하고 떠들썩하기 마련이고 배경에는 아시아시장을 노린 미국 영화사의 마케팅 전략과 한국 배우 소속 매니지먼트사의 대대적인 홍보나 지원 활동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두나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출연에는 이 모든 과정이 전혀 없었다. 세계적인 미국 영화감독이 물어물어 한국 배우의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배두나는 배짱 좋게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다. 베를린에서 진행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촬영현장에서도 배두나는 한국어와 독일어・영어가 모두 가능한 현지 공식 어시스턴트(조수) 한 명 외에는 두지 않았고, 서투르더라도 감독들과 직접 의사소통을 했다.


내 성격은 충동적, 연기는 직감적”

영화 〈코리아〉에서 탁구를 가르치며 같이 땀을 흘렸던 현정화가 왜 배두나를 일러 “전진 속공형”이라 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배두나는 자신에 대해 “성격은 충동적이고, 연기는 직감적”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전혀 예상 못했던 행동을 해서 곧잘 놀래키곤 한다”고도 했다. 커튼 젖힌 환한 창 같은 큰 눈이 주는 느낌 그대로, 배두나는 꾸미는 법 없이 솔직하고, 주저하는 법 없이 대담하다. 남달랐던 할리우드 영화 도전기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매우 비범한 대작이다. 1억30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300억원이 든 최대 수준 규모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상업성과 오락성에 치우치지 않고 스크린 속에 웅장한 시공간을 창조하며 철학적 주제를 구현했다. 우주와 인류의 삶을 6가지 장르와 에피소드, 3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속에 담아내려는 웅대한 영화적 야심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담겨 있고, 배두나는 영화의 주제와 이상을 집약한 캐릭터이자 아이콘이 됐다.

이 영화는 1849년 노예해방에 나선 백인 변호사의 이야기로 시작해 1936년 유럽(영국 및 벨기에)의 천재 음악가, 197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핵발전소의 비밀을 캐려는 여기자, 2012년 영국 요양원의 전체주의적 규율에 저항하는 남자, 2144년 서울에서 인간 지배체제에 반란을 일으킨 클론(복제인간)을 거쳐 문명이 멸망한 2321년 원시 종족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500여 년에 걸친 시간과 지구의 전 지역을 아우르는 공간에서 톰 행크스와 핼리 베리, 짐 스터게스, 벤 위쇼, 휴 그랜트, 수잔 서랜던, 휴고 위빙 등 배우들은 각각의 에피소드에 모습을 바꾸어 거듭 출연하며 ‘윤회사상’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배두나는 2144년 서울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클론(복제인간) 종업원 ‘손미’ 역할이다. 반군 대장 장혜주(짐 스터게스 분)의 도움으로 탈출해 체제를 바꾸는 혁명군의 메시아가 된다.

배두나는 극중 “우리의 인생은 우리 각자의 것이 아닙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죠. 과거와 현재도요. 우리의 모든 악행과 선행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거죠”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주제다. 워쇼스키 감독은 배두나를 가리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영혼”이라고 했다. 배두나는 손미뿐 아니라 1849년 에피소드에선 백인 변호사의 미국인 아내 ‘틸다’로, 1973년 이야기에선 멕시코인 종업원으로 등장하고, 마지막 문명 종말 시대에선 원시 부족이 떠받드는 여신이 된다.


배두나는 미국식 영어뿐 아니라 영국식 영어와 스페인어, 미래사회 가상으로 설정된 영어까지 소화했다. 전작이었던 〈코리아〉에서 북한 탁구선수 리분희 역할을 맡아 ‘북한말’까지 해야 했고, 일본어로 연기한 일본 영화 출연작도 벌써 두 편(〈공기인형〉 〈린다 린다 린다〉)이다. 언어와 외국어에는 이골이 날 지경이다. “다음 영화는 프랑스나 독일 영화를 해야 하나?”며 짐짓 능청을 부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저 스스로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 다르다고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난 평범할 뿐인데. 다만 배우로선 비현실적인 인물뿐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캐릭터를 다 해보고 싶어요.”

배두나는 이제까지 영화에서 주류사회 속의 ‘타자’(他者)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수는 나의 것〉에선 무정부주의 비밀혁명단체의 조직원이었고, 〈공기인형〉에선 사람의 감정을 갖게 된 공기인형(남성들의 성적 만족을 위해 제작된 여성 모양의 인형)이었다. 〈코리아〉에선 북한 탁구 대표선수였다. 일본 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선 평범한 한국 여고생이었지만, 일본 학교 속에 있었다. 〈괴물〉에서도 배두나는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삶의 속도와 감정을 가진, 느리고 소심한 여궁사로 출연했다.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안의 존재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타자’. ‘비주류’ ‘마이너’ ‘아웃사이더’ 같은 호칭도 함께 불려 나온다.

미국 영화감독이지만 워쇼스키 남매 감독의 감각도 배두나의 ‘타자’로서의 이미지에 강렬한 이끌림을 받았을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손미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클론’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간이 창조한 존재이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갖게 된 캐릭터다. 하긴, 배두나가 국내 연예계에 화려한 등장을 알렸을 때 역시 그는 기성 사회와 세대가 보는 ‘타자’였다. 기존의 감각과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 ‘신세대의 아이콘’이라는 것이 스타로서 배두나가 얻은 첫 이름이었다. ‘새롭다’ ‘다르다’는 시선, 배두나만 가진 개성적인 이미지는 그러나 약이자 독이었다. 그는 다른 배우로는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이미지를 가졌지만, 강렬한 개성 탓인지 작품의 흥행에는 실패할 때도 적잖았다. 배두나는 “나 스스로 고민도 많았고, 분석도 해봤다”고 했다.

“N세대의 아이콘이니 신세대의 상징이니 너무 이른 나이에 매스컴이 만들어낸 스타가 된 것이 아닐까. 난 왜 스무 살 무렵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대중적 인기는 물론이고 감독이나 평론가의 사랑도 받고 싶고 했던 것은 주제넘은 허영이 아니었을까. 자학도 많이 했죠. 흥행에 실패해본 배우가 아니면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스태프들에게 미안한지 모를 거예요. 〈괴물〉 댓글에 이런 게 있었어요. ‘〈괴물〉이 흥행하려면 무조건 배두나를 극 초반에 죽여야 한다’고 말이죠.”

배두나는 이제까지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거침이 없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청춘〉에선 파격적인 정사신을 연기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에선 나신을 드러냈다. 데뷔 때부터 여배우로서 대담한 길을 걸어온 것은 선배 배우인 어머니 김화영의 영향이 컸다. “난 온실 속에서 자란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에 불과했는데, 어머니께서 오히려 여배우는 벗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권하셨다”고 신인 시절을 회상했다.

세계적인 국내외 감독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한국뿐 아니라 일본・미국의 중요한 문제작에 출연한 스타. 여느 배우라면 부러울 만한 이력과 작품을 가졌지만, 서른세 살 배두나의 소망은 소박하다. ‘해외 진출’ 같은 말은 배두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미국・유럽・아시아 어느 곳에서건, 어느 나라 말로든 연기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이제는 외국어로 된 시나리오도 제법 받지만, “무엇보다 우리(한국)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배두나는 잘 알려진 대로 사진 찍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사진과 에세이를 담은 책도 벌써 몇 권 냈다. 그런데 다들 최신형이 나올 때마다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나 DSLR의 기종을 바꿔 미니홈피에 일회용 사진을 부지런히 올릴 때, 배두나는 필름카메라를 들고 초점을 맞추며 컴컴한 인화실에서 조심스레 현상작업을 한다. 그렇게 배두나는 느림의 미학도, 돌아가는 것의 미덕도 아는 배우가 됐다. 함께한 영화제작사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해준다 할 때 다른 배우들이 명품 시계와 가방 브랜드를 골라도 배두나가 “그럼 라이카나 한 대”라고 답하는 이유다. 배두나가 배두나인 이유다.

사진 : 김선아
  • 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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