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

분명한 원칙과 따뜻한 카리스마를 겸비한 명장

2002년, 세계 최고의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스페인)가 지키는 골문 구석으로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끄는 마지막 승부차기가 정확하게 꽂혔다. 피 말리는 승부를 종결지은 주장 홍명보는 처음으로 무뚝뚝한 표정 대신 환한 웃음을 선보였다. 그리고 2012년 8월, 그는 올림픽대표팀의 감독이 돼 다시 한 번 그 웃음을 재현했다. 10년 전처럼 기성용의 마지막 승부차기가 축구종가 영국의 골문 구석을 깨끗하게 갈랐다. 환한 미소에 피는 주름이 크고 깊어진 만큼 홍명보는 그라운드 위의 카리스마 넘치는 수비수가 아닌, 벤치에서 젊은 재능들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명감독으로 변해 있었다. 멕시코·스위스·가봉·영국 그리고 숙적 일본까지 차례차례 넘어서며 한국 축구의 염원인 올림픽 메달을 선사했다. 이번에도 한국 축구 신화의 주인공은 홍명보였다.

위기의 끝에서도 결국 성공을 만들어내는 사람. 실패란 단어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사람. 홍명보는 늘 그랬다. 누군가는 “홍명보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라며 그런 성공을 지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근거로 분석한다. 그러나 홍명보의 성공에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 성공해야만 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있다. 그에게 실패가 없을 리가 있을까. 다만 실패가 단지 실패로 끝나버리는 사람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홍명보는 그것을 극복해내고 만다는 것이다. 홍명보에게 실패란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필연적인 고비일 뿐이다.


실패를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홍명보는 감독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2009년 초보감독이던 그는 아마추어 선수 일색이던 20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고 이집트 U-20 월드컵에서 8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다. 남북단일팀이 출전해 8강에 진출한 1991년 포르투갈 U-20 월드컵 이후 최고 성적이었다. 냉철한 검증의 첫 관문을 통과한 그에게 아시안게임은 올림픽으로 가기 위한 다음 관문이었다. 문제는 금메달을 목표로 한 그 대회에서 동메달 획득에 그쳤다는 것. 다른 국가들이 23세 이하 선수들을 선발한 것과 달리 홍명보 감독은 21세 이하 선수들을 주축으로 했고, 결국 UAE와의 4강전에서 경험과 골 결정력 미숙으로 패했다. 여론은 그를 매섭게 몰아쳤다. 언론은 감독으로서의 기술적, 경험적 결함을 지적했고, 팬들은 21세 이하 선수들을 주축으로 삼은 그의 결정으로 인해 기회를 낭비했다는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홍명보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분명 실패죠. 그러나 그것은 결과의 문제입니다. 당시 저는 의미 있는 실패라고 생각했어요. 2009년에 처음 감독이 되고부터 목표는 일관되게 올림픽 메달이었습니다. 당시 제게 주어진 선수들은 구자철・윤석영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대학생이었죠. 국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설령 실패하고 비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아시안게임을 국제경험을 쌓아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는 과정으로 삼자고 코칭 스태프와 대한축구협회를 설득했죠.”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에 홍명보 감독은 “나는 빵점 감독”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낮췄다. 정면 돌파였다. 그리고는 “진짜 승부는 올림픽이다. 만일 거기에서 실패한다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다 지겠다. 다신 감독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배수의 진으로 책임감을 밝혔다. 아시안게임에서의 실패를 거울 삼은 ‘빵점 감독’은 1점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아시안게임 후 홍명보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은 2011년 3월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이었다. 거기서 1-0으로 승리한 뒤 홍명보 감독은 올림픽 4강전에서 브라질에 패하기 전까지 무패 가도를 달렸다. 무려 21경기 연속, 16개월간 패배가 없었다.

21경기 무패 행진 동안에도 위기가 그를 흔들었다. 이번엔 외부 환경이었다. 조광래 전 국가대표 감독과의 차출 갈등이었다. 올림픽 예선과 월드컵 예선이 겹치면서 국가대표팀은 차출 우선순위를 강조했다. 구자철・기성용・지동원 등 유럽파와 국가대표로 선발된 홍정호・김영권・윤빛가람 등을 차출할 수 없었다. 2차 예선에서 홍명보 감독은 천신만고 끝에 요르단을 꺾고 최종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반박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도 불평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다. 핵심 선수들을 뽑을 수 없게 되자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기보다 하나의 팀으로서의 역량을 극대화했다. 감독으로서의 그의 철학인 ‘All for one, One for all(하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가 가장 강조된 시기다. 홍명보 감독은 박종우・황석호・김기희・백성동 등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스타로 등극한 숨은 얼굴들을 발굴하며 최종예선을 조 1위로 통과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간 이 시기야말로 감독 홍명보가 익어간 계절이다.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춘 카리스마


홍명보는 최고의 리더이자 보스다. 그와 함께 생활해본 이라면 한결같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뒤에서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리베로라는 포지션의 특성과 신중하면서도 원칙을 강조하는 홍명보 개인의 성향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국민들이 대부분 홍명보를 떠올리며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 홍명보에게선 카리스마를 쉽게 찾을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철저히 감췄기 때문이다.

“감독이 되면서 가장 먼저 선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줄였죠. 지금 선수들은 저와 다른 사고방식과 인생관을 갖고 있는 세대예요. 국가를 위해 이기라는 애국심에 호소해서는 그들의 진심을 끌어낼 수 없어요. 국가가 아니라 이 경기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인지시켜야 해요. 경기에 뛰지 못한 선수의 생각과 태도를 관찰하고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편하게 다가갔어요. 감독과 선수가 아니라 우리는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했죠.”

감독 홍명보의 리더십은 부드럽다. 훈련장 안팎에서 아버지처럼, 큰형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공식적인 미팅 자리에서 존댓말을 쓰기도 했다. 부진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을 다그치던 김태영 수석코치에게 절대 질책하지 못하게끔 지시했다. 선수들이 자신들의 진로는 물론, 사소한 고민까지 편히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는 “감독, 선수, 스태프, 하다못해 청소하고 빨래해주시는 아주머니도 우리와 같은 일원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믿어야 한다. 그게 밑바탕이 돼야 팀이 하나가 된다”며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갔다. 선수들이 자신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은 훈련장과 경기장에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상황에선 꾹꾹 눌러온 카리스마를 드러내기도 했다. 가령 영국과의 8강전 하프타임에 했다는 “봐. 저것들 X도 아니지?”란 거침없는 발언이나 일본과의 3, 4위전을 앞두고 했다는 “그냥 달려들어서 깨부숴버려”라는 자극적인 코멘트는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의도적인 언행이었다.

카리스마는 자칫 권위주의로 왜곡될 수 있지만 홍명보의 카리스마에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개인이 아닌 모두를 위해 분별 있게 쓰고, 그로 인해 발생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박주영을 올림픽대표팀의 와일드카드(연령 초과 선수)로 선발하는 과정에서였다. 홍명보 감독이 병역회피 논란과 소속팀 아스널에서 출전을 못해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지적을 받던 박주영을 선발하려고 하자 주변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아시안게임 당시 와일드카드로서 팀에 헌신했던 박주영을 끝까지 믿었다. 결국 그는 박주영을 설득해 기자회견을 열게 했고, 그 자리에서 박주영은 병역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해 여론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홍명보 감독은 그 기자회견에 박주영과 함께 참석했고 “만일 박주영이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내가 대신 가겠다”며 무한책임을 약속했다. 모두가 외면하던 자신을 껴안은 홍명보 감독에게 박주영은 스위스전과 일본전에서 선제골로 보은했다.


홍명보 안에 힐링 캠프가 있다


홍명보 감독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 하나는 “우리 팀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다. 그에게 선수는 성과를 위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깨물어 안 아플 리 없는 열 손가락 같은 자식들이다. 그는 자신이 한번 믿기 시작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안고 간다. 일본과의 올림픽 3, 4위전이 끝난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어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동메달 박탈 위기에 몰린 박종우를 지킨 유일한 사람도 홍명보 감독이다. 박종우는 IOC와 FIFA의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대한체육회로부터 시상식 참가 불가를 지시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귀국 기자회견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축구협회는 혹시나 박종우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킬까 싶어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숨기기 급급했다. 귀국 후 진행된 각종 만찬과 환영회에도 참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두 단체의 원칙이었다. 그때 홍명보 감독은 박종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까 무조건 오라”고 지시했고, 그 뒤 박종우는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한 이적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었지만 홍명보 감독의 생각은 단호했다.

“박종우 선수의 행동은 절대 고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선수는 우리 팀이 성과를 내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헌신을 다했습니다. 박종우 선수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동메달리스트입니다. 국내에서조차 외면받는 건 끝까지 함께한다는 우리 팀의 원칙에 어긋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선수가 박수받을 무대에 당당히 오게 하는 것이 감독으로서 제가 해야 할 마지막 의무라 생각했죠.”

귀국 후 홍명보 감독은 힐링캠프를 비롯한 방송가의 대표적인 토크쇼 출연 요청을 모두 고사했다. 작가들이 직접 찾아가 거듭 출연을 부탁했지만 어떤 방송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켰다. 힐링캠프의 경우는 대선 후보들조차 출연에 적극적일 정도로 높은 시청률이 보장되고 그로 인한 이미지 완성을 꾀할 수 있는 프로다. 광고주들을 움직일 기회였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방송 출연을 외면했다. 대신 그가 향한 곳은 주말에 K리그 경기가 열린 축구장이었다. “올림픽 동메달을 통해 겨우 잡은 축구에 대한 관심을 K리그로 연결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홍명보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대의와 명분이다. 홍명보 감독에게 대의명분은 곧 축구의 발전이다. 사적인 이익엔 연연하지도, 결코 움직이지도 않는다. 또 하나는 그가 지키고 싶고, 아끼고 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정치인, 기업인, 사회 저명인사들은 한결같이 홍명보를 원하지만 그가 찾는 것은 힘들 때 자신과 함께 고생한 주변인들이다. 감독, 그리고 인간 홍명보에게 힐링캠프는 자기 자신이며, 축구라는 자신의 무대에서만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올림픽이 끝난 뒤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제 나를 감독이라고 부르지 마라. 형이라고 불러라”는 부탁(?)을 따로 했다. 감독과 선수가 아닌 한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관계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스마트폰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감독 홍명보.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모르는 홍명보의 진면목이다.

사진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조선 DB
  •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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