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 엘리자벳〉 주연 김선영

천의 얼굴, 천의 음성을 가진 배우

소름 돋는다. 절제와 폭발의 양극단을 오가며 노래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의 감정선으로 빨려드는 경험을 한다. 그가 주역이 아닐 때에도 그랬다. 맡은 배역에 빙의된 듯한 그의 연기에 도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4년간 쉼 없이 굵직한 배역을 소화해온 뮤지컬 배우 김선영. 영화배우에 비유하면 전도연이나 김명민 과(科)다. 작품에서 인간 전도연과 김명민은 보이지 않는다. 허울을 벗고 배역 속으로 녹아들어 배역과 하나가 된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엘리자벳을 연기한 김선영도 그랬다. 김선영은 안 보이고, 엘리자벳만 보인다. 김선영은 바로 전작인 〈조로〉에서는 호쾌한 집시 ‘이네즈’였고, 〈미스 사이공〉에서는 평생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사는 남편 크리스의 아내 ‘엘렌’이었다.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정보
- 기간 : 5월 13일까지
- 장소 :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 시간 : 화, 수, 목, 금 오후 8시 / 토, 일 오후 2시, 7시
- 문의 : 1577-6478
지난 2월 말,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공연된 뮤지컬 〈엘리자벳〉의 열기는 대단했다. 막이 내리자 1500여 명의 관객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관람객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 중이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황후로 기억되는 엘리자벳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 이 뮤지컬은 “한국인의 정서와 이질감이 있을 것”이라는 관계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순항 중이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등 볼거리도 풍성하거니와 김선영・옥주현・류정한・송창의・김준수・김수용・최민철・박은태 등을 내세운 화려한 캐스팅도 흥행에 한몫한다.

공연 네 시간 전, 김선영을 만났다. 사진 촬영을 위해 우아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는 무대 밖에서도 엘리자벳의 아우라를 뿜었다. 걸음걸이와 손짓, 말투와 표정에서 무대 위 엘리자벳의 자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느낌을 전하자 “그런가요?”라며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엘리자벳이 무대에서 심오한 자기 정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잖아요. 심지어 영혼을 부르는 장면도 있고. 원래 성격은 밝고 단순한 반면, 사람들과 제 자신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엘리자벳도 그런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요. 실존 인물인 엘리자벳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가치관과 생각을 이해하려 하죠. ‘어렸을 적부터 공주로 자랐지만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이 사람의 일상생활은 어땠을까?’ 끊임없이 생각해요.”

김선영은 〈엘리자벳〉에서 16세 소녀부터 60대 할머니까지 연기한다. 양 갈래 머리를 땋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소녀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아들을 잃은 슬픔에 가득 찬 할머니. 이 극단의 캐릭터를 오가는 김선영은 실감나는 내면연기를 펼친다.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도 한다. 그의 노래는 노래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야기에 리듬을 실어서 전하는 느낌이다.

“노래는 음정 박자의 개념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게 노래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내가 저 사람의 이야기를 노래를 통해서 듣고 있구나’라고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음정 박자를 정확하게 지키다 보면 감정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균형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음정 박자를 버릴 때도 있죠.”


그의 노랫소리는 진폭이 크다. 낮게 읊조리듯 부르는 노래와 한 맺힌 절규에 차서 부르는 노랫소리의 크기는 천양지차다. 혼신을 다해 부르는 부분에서는 폭발적인 가창력이 뿜어져 나온다. 가녀린 체구 어디에 저런 괴력이 숨어 있을까. 그는 “체력은 중요하지만 체격과 목청이 비례하는 건 아니잖아요”라며 웃는다.

“정서적으로 얼마나 몰입하느냐가 중요해요. 몰입할수록 나도 모르는 초인적인 소리가 나와요. 부모님은 음악적인 재능은 없으시지만 목청 자체는 매우 좋으세요. 저도 부모님을 닮아서 목청은 좋지만, 감정이 끓어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를 내면 목도 상하고 소리가 안 나요. 감정이 충만해 있을 때 나도 깜짝 놀랄 만한 소리가 나오죠. 왜 누군가가 놀래키면 자기도 모르게 ‘꺅’ 하고 큰 소리가 나오잖아요.(웃음)”


극중 엘리자벳은 내내 죽음의 유혹을 받는다. 자유분방한 삶을 꿈꾸지만 궁에 유폐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엘리자벳에게 있어 자유의 박탈은 죽음이나 다름없다. 죽어야만 자유를 얻는 삶. 작품에서 죽음은 하나의 메타포다.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을 넘어서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갈망이다. 극중 ‘죽음’이 섹시한 남성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세 명의 죽음(류정한・송창의・김준수)과 모두 호흡을 맞췄다.

“일단 정한 오빠는 말이 필요 없죠.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줘요. 준수씨는 젊은 혈기가 대단해요. 끼와 혈기의 상징 같아요. 창의씨는 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느낌이에요. 연기자로서 안정감도 있으면서 새로운 모습에 도전하고 개척하려는 모습이 보여요. 세 명의 토드(죽음)를 만날 때 그들 각각의 장점과 매력을 보려 해요. 잘한다 못한다, 취향이다 아니다를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잖아요. ‘이 사람한테 이런 게 있으면 좋겠어’가 아니라 ‘이 사람한테는 이런 면이 있네’를 찾으려 하죠.”

엘리자벳으로 더블 캐스팅된 옥주현에 대해서는 “좋은 재료를 가진 배우”라며 “비주얼적으로도, 목소리로도 재료가 좋아서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잘 어울린다”고 평했다. 김선영은 1999년 뮤지컬 〈페임〉으로 데뷔한 이후 〈렌트〉 〈토요일밤의 열기〉 〈마리아마리아〉 〈와이키키 브라더스〉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나인〉 〈영웅〉 등 국내에서 공연된 유명 뮤지컬을 거의 섭렵하며 주연급 역할을 맡아왔다. 14년간 정상을 지켜온 뮤지컬 배우.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뮤지컬을 시작한 지 4년차 됐을 때 뮤지컬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대를 알 때가 됐는데도 모르겠더라고요. ‘뮤지컬 배우 김선영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소개하지 못했어요. 노래하는 사람은 맞는데 배우가 아닌 것 같았어요. 노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출발했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이 가시지 않았죠. 그러다 〈마리아마리아〉에서 마리아 역을 맡았어요. 90% 이상 모노 연기로 끌어가는 역할이에요. 이 작품을 통해 연기의 참맛을 알았어요.”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배우다. 한 분야의 중심에 편입되면 놓치기 쉬운 질문들을 끊임없이 한다. ‘도대체 뮤지컬이란 뭘까?’ ‘무대에 선 매 순간이 예술이었으면 좋겠다’ ‘이 길이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가?’ 등 근본적인 물음들을 안고 산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여기에서 찾는다. “제 스스로 외모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노래도 저만큼 하는 사람은 많아요. 이런 끊임없는 고민 덕분에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고만고만하게 생긴 배우, 고만고만하게 노래하는 배우에 머물렀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김선영은 청주에서 나고 자랐다. 눈이 큰 아이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많고 끼도 많았다. 낯을 많이 가리고 부끄러움도 많았지만 불쑥불쑥 의외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세 오빠의 막내 여동생으로 때로는 공주처럼, 때로는 선머슴처럼 자랐다. 골목을 누비며 뛰어놀다가도 감수성 예민한 소녀의 모습을 보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오빠들로부터 감성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닐곱 살 때부터 들국화와 퀸,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노래를 들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민중가요를 따라 부르면서 왠지 모를 애잔한 슬픔을 느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는 툭하면 눈물을 흘렸고, 특히 아름다움을 대할 때마다 감성의 뇌관이 터졌다. 노래를 좋아하던 소녀는 혜천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굵직한 배역을 도맡는 뮤지컬 배우가 됐다. ‘사고뭉치’ 소녀는 뮤지컬을 하면서 ‘바른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는 어른들의 말도 잘 안 듣고 좌충우돌이 많았어요.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피웠죠. 소위 비뚤어진 적도 있어요. 그런데 뮤지컬 배우를 하면서는 자연스레 자기 관리를 하게 되더군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니까요. 지금의 제 모습만 본 후배들은 저를 바른 생활만 하는 사람으로 알아요.(웃음)”

김선영은 극과 극의 배역을 맡아 내면에 잠재된 다양한 캐릭터를 꺼내 보인다. 엘리자벳과 바로 직전에 맡은 〈조로〉의 이네즈 캐릭터는 극과 극이다. 이네즈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호탕한 집시이지만, 엘리자벳은 자유를 억압당한 채 왕가의 엄격한 규율에 예속된 황후다. 두 역할을 할 때 김선영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걸음도, 목소리도, 표정도 다르다.

“제 안에 제가 너무 많은 거죠. 배우로서의 이점 같아요. 제 내면에 둘 다 있는 것 같아요. <조로>에서 유쾌하고 단순한 모습을 끄집어냈다면 <엘리자벳>에서는 제 심연의 극단적 우울을 꺼냈죠. 배역은 하나같이 드라마틱하잖아요.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런 극단적인 감정의 연기를 선보이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그런 감정을 끄집어내서 함께 우울해하고 함께 웃으면서 치유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배역을 맡을 때 배역보다 작품을 우선하는 건 이 때문이다. “좋은 배우란 없다. 그 배우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게 좋은 배우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아름다움에 약하다. 얼마 전에는 샤갈의 그림을 보고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고 한다.

“샤갈이 추구하는 주제가 사람이잖아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가슴에 확 와닿는 거예요. 너무 아름다웠죠. 샤갈에 대한 무한애정이 생기면서 ‘예술이라는 건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한편으로 ‘뮤지컬 무대는 나 혼자만의 놀이터가 아니다. 어떤 종류의 메시지가 됐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김선영은 연애 중이다. “60대, 70대가 되어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나이가 찼으니까 결혼하고 싶고 아이 낳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 사람과는 늙어서도 재미있을 것 같은 모습이 그려져요. 그 친구와 있을 땐 더없이 유치해지죠. 배우 김선영으로서 인생도 중요하지만, 인간 김선영의 인생이 더 중요해요. 배우 김선영의 모습도 인간 김선영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삶의 내용이 풍부하면 뮤지컬 배우 김선영의 연기도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사진 : 김선아
  • 201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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