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운트다운〉의 팜므파탈 사기범으로 돌아온 전도연

현재가 항상 최고이자 최선

그녀의 머리는 짧았다.

“짧은 머리 잘 어울린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이렇게 짧게 자른 거 처음이에요. (영화 <카운트다운>의) 허종호 감독이 ‘차하연’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신인감독이니까 저한테 ‘머리 자르세요’라고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단발이면 어떨까 해서 제가 먼저 자르겠다고 했죠. 달라진 제 모습에 적응하기까지 1주일이 걸렸어요. 머리 자르기 전에 딸한테 엄마 머리 자를까, 했더니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자르고 나서 ‘엄마 어때?’ 했더니 ‘언니 같아’라고 하더군요. 딸이요? 지금 세 살이에요.”

4년 전 〈밀양〉 개봉 당시, 지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그녀의 머리는 짧았다. 몇 년간 길러오던 것을 싹둑 잘랐다고 했다. 이유는 달랐다.

“(〈밀양〉) 마지막 장면에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만 고개를 너무 기울여서 (덮어썼던) 가발 말고 진짜를 잘라버렸어요. 이참에 아예 바꿔보자 했죠.”

“언니 같다”고 해줄 귀여운 딸도 없었고, ‘칸의 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는 짐작도 못하던 때였지만 당시도 마무리는 같았다. “다들 예쁘다고 하던데요?”

그게 배우 전도연(38)이다. 벌써 18년째다. 스무 살에 연기를 시작해 그동안 살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칸의 여왕’이라는 최고의 타이틀을 얻었다. 인생의 절반쯤을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배우 전도연의 희로애락도 다 그 시간 속에 있을 터. 그동안 많은 스타가 명멸해갔고 어떤 이는 삶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숱한 굴곡 속에서도 전도연으로 하여금 반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꿋꿋이 버티게 했고, 오늘도 예의 그 ‘미간을 찡긋하는’ 환한 웃음으로 대중을 만날 수 있도록 한 힘은 뭘까. 13번째 영화 출연작 〈카운트다운〉의 개봉을 맞은 전도연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예쁜 여자, 노력하는 여자

“지금은 다양한 개성과 색깔의 여배우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여배우는 이래야 한다는 전형적인 모습에 대한 요구가 있었죠. 그렇지만 저의 출발점은 달랐던 것 같아요. 저는 제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사랑했고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연기를 계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예뻐 보여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고집하고 싶은게 없으니까 버릴 줄도 알았다고나 할까. 연기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를 버리고 비우고 또 받아들이고. 전도연이 망가지든 훌륭해 보이든 오로지 그 인물을 위해서 말이죠. 일을 떠난다면 저는 예쁜 옷도 많이 사 입고 싶은 여자이지만 극중에선 ‘전도연’이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 좋은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해요.”

하지만 〈카운트다운〉에선 무조건 예뻐 보여야 했다. 캐릭터가 그랬다. 극중 미모의 전과사기범 차하연. 전도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모가 빛나는 여자여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입만 열면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인 여자다. 차하연은 옥중에서 태건호(정재영)라는 남자로부터 “돈을 줄 테니 간을 달라”는 장기이식 제안을 받는다. 태건호는 냉정한 채권추심원(채권자를 대리해 채무자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이)으로 열흘안에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의 남자다. 차하연은 제의를 수락하고 출소하지만, 태건호를 속이고 도망간다. 여기에 차하연의 과거 사기행각과 연루된 피라미드 범죄조직까지 얽히며 영화는 물고 물리는 추격전을 담는다. 남자들을 삶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팜므파탈’로서의 전도연, 과연 볼만하다. “역시 전도연,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 인물은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평가에 전도연은 “작품마다 항상 듣는 얘기”라며 웃었다. 이번 작품은 두 번째 칸 경쟁부문 진출작이었던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후 1년여 만의 작품이다. 〈밀양〉으로 ‘칸의 여왕’ 자리에 오른 후 그는 4년여간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와 〈하녀〉 등 두 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동안 무엇이 변했을까.

“(‘칸의 여왕’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큰 부담이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해요. 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고, 항상 ‘조금 더, 조금 더’를 요구하게 되지만 제가 매번 발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나면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저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돼요. 다만 아쉬운 것은 ‘칸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선 제가 출연하는 작품이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선입견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인지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줄었어요.”

엄살은 피워도 〈하녀〉 이후 전도연이 받아 들었던 시나리오는 예닐곱 편이다. 그중 〈카운트다운〉은 “가볍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인물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한다. 전도연은 자신에게 건네지는 시나리오는 모두 다 챙겨 읽고, 출연작을 결정한다. 보통은 열 편의 작품 제안이 들어오면 소속사에서 몇 편은 ‘알아서’ 걸러내고, 그 중 일부만 배우가 읽어보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모 감독을 만났는데 ‘시나리오 잘 읽어보셨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적이 없는 작품이었죠. 그다음부터는 어떤식으로든 제가 반드시 챙겨서 꼼꼼히 읽죠.”

전도연은 지난 2007년 결혼했고, 2009년 첫딸을 낳았다. 엄마이자, 아내로선 어떨까.

“노력하는 엄마, 노력하는 아내, 노력하는 여자이고 싶어요. 예전에는 결혼하면 그냥 좋은 아내 되고, 애 낳으면 저절로 엄마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살아보니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더군요. 모성애도 노력의 결과예요. 처음에는 내가 이상한 걸까도 생각했어요. 어떤 때는 애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런 제 자신 때문에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일할 때도 집중이 안 되고 집에 있어도 편치 않고 감당이 안 되더군요. 그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어요. 일도 잘하고 싶고 좋은 엄마, 좋은 아내 모두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몸은 피곤하지만 다 잘하고 싶어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탐하지 않는다

〈하녀〉 이후 제안 받은 작품 중엔 드라마도 네 편 정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중에서 세 편이 사극이었다. 전도연은 “너무 많은 여배우들이 잘 해내서 난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면서 “사극은 안 할 것”이라고 했다. 전도연은 그 말끝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선 욕심이 무한히 많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소극적인 배우일 수도 있겠죠. 저는 복권도 싫어해요.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 싫어서예요. 주식이나 부동산 재테크도 전혀 안 해요. 원래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만약’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물어봐도 “제가 연기 외에 뭘 더 잘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더니 잠깐 뜸을 들인 후 “배우가 아니라면 영화 프로듀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원래 제가 아침형 인간이거든요. 잠도 없고. 뭘 하나를 해도 꼼꼼하게 해요. 설거지나 청소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하고, 빨래도 얼룩 한점 없이 하얗게 되어야 직성이 풀려요. 책도 읽기 시작하면 꼭 마지막 장까지 덮어야 해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끝 모를 욕심. 전도연은 그렇게 매 작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왔다. 〈너는 내 운명〉을 같이 했던 박진표 감독은 〈밀양〉을 보고 나서 “무섭다, 무서워. 전도연은 내가 다 써먹은 줄 알았는데 더 있었네”라고 했다. 그렇게 전도연에겐 ‘현재가 최고’였다. 전도연은 “〈밀양〉 때 ‘이게 다야’라고 하는 순간이 가장 절망적이고 슬픈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전도연이 13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준 여성은 다채로웠다. 도시성에 감염되지 않은 원형적인 친근함 혹은 따뜻함(〈내 마음의 풍금〉 〈인어공주〉)과 방종하고 도발적인 성적 태도를 포함하는 위협적인 여성성의 세계(〈해피엔드〉 〈하녀〉 〈카운트다운〉), 그 양극단의 진폭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전도연은 특별하고 절박한 일상의 순간과 삶의 표정을 잡아냈다. 전도연이 작품 속에서 한 여성의 숨겨진 구원 혹은 사랑의 소망이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낼 때, 영화는 ‘동화’(〈접속〉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될 수도, 파멸의 ‘잔혹극’이 될 수도 있다. 2007년 〈밀양〉을 본 칸의 심사위원들은 아마도 전도연의 작은 얼굴에서 그 무지막지하게 다채로운 맥락을 읽어냈으리라. 전도연의 연기는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맥락이 가장 전도연스러운 표정과 얼굴로 수렴한다. 지난해 만난 전도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어요. 그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무엇을 얻고자 해서도 아니었어요. 그냥 그게 ‘나’이기 때문이죠. 배우란 남을 많이 의식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나를 지키는 것은 나 자신뿐이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이번엔 ‘전도연 2세’에게 어떤 작품을 먼저 보여주고 싶은지 물었다. 그 대답 또한 가장 전도연다웠다. ‘지금, 여기, 나’에 집중하는 배우 말이다.

“〈접속〉(영화 데뷔작이다)부터 차례로 보여줄 거예요. 저 또한 아이에서 성장한 거 아니겠어요. 처음부터 제가 커온 순서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요.”

사진 : 김선아
  •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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