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피아프〉 주역으로 열연하는 뮤지컬 배우 최정원

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는 피아프의 삶이 제 삶 같아요

최정원(43)은 관객의 뜨거운 박수를 간절히 원하는 뮤지컬 배우다. 공연이 끝난 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아가씨와 건달들〉의 ‘6번 아가씨’로 데뷔했는데, 첫 공연하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자, 아들레이드”라는 단 한 마디 대사였지만, 무대에 섰다는 사실에 모든 것이 감사했다. 그리고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굳건히 한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키스미 케이트〉 〈시카고〉 〈토요일밤의 열기〉 〈지킬앤하이드〉 〈맘마미아〉 〈아이러브 유〉 등 27편의 대형 작품에 주역으로 출연하는 톱스타가 되었다. 무서울 정도로 작품에 몰입해온 그의 지난 세월은 무대의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연기 잘한다”는 말보다 “감동 받았다”는 말이 자신을 배우로 살아가게 한다고 말한다.
최정원이 울고 있다. 무대 한가운데 쓰러진 채 바르르 떨고 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의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하다. 눈물은 쉴 새 없이 뺨을 따라 흐른다. 단 한 번의 사랑이라 믿고, 평생을 그리워한 연인 마르셀 세르당의 죽음을 접하고 괴로워한다. 연극 〈피아프〉에서 프랑스 샹송 가수인 주인공 에디트 피아프 역을 맡은 최정원은 고통스러워한다. 극복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피아프는 애처롭고 애절하기 이를 데 없다.

“아침 비행기를 타지 말았어야 했어. 그를 보냈어야 했어. 내가 그를 죽였어….”

피아프는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친다. 그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었다. 신음을 토해내며 다시 노래한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무대의 조명은 모두 꺼진다.

“난 남자 없이 못 사는 여자야. 당신도 날 떠나겠지? 그다음에는 누구를 사랑하지?”

프랑스 파리의 카바레클럽 물랭루주, 피아프로 분한 최정원은 샴페인을 병째 들고 휘청대며 소리친다.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하고 싶다고 애원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마저 23세의 남편과 사랑을 나눴던 피아프를 변호하듯 속삭인다.

“무대에서 느끼는 환희를 돈으로 보상받는 것은 불가능해. 난 돈을 벌기 위해 노래하지 않아. 사랑이 필요해….”

이 연극은 오랜 친구이자 연하의 남편과 옛 이야기를 나누던 피아프가 흔들의자에서 숨을 거두며 끝난다. 이어 아코디언과 피아노는 피아프가 작곡한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연주한다. 최정원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또 자신의 무대를 지켜봐 준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조심스럽다. 연극은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피아프로 관객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공연 보셨나요? 어땠어요?”

최정원은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취재진에게 자신이 출연 중인 연극 〈피아프〉의 관람 소감을 묻는다. 그는 어떤 작품이든 열정을 다해 몰입하지만,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말한다.

“2년 전 우리나라에서 〈피아프〉가초연됐을 때도 피아프 역을 맡았어요. 당시 놀란 점은 피아프가 남긴 말들이 평소의 제 생각과 너무 닮았다는 거예요. 예를들어 자신의 무대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거나, 노래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요. 한마디로 저와 코드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을 작곡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를 연기하는 것이라 더욱 부담스러웠고, 피아프를 실제로 본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피아프가 되어 무대에 서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다.

“피아프는 작은 참새라는 뜻이에요. 그는 150cm도 채 안 되는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목소리만큼은 시끄러운 카바레클럽 어느 공간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카랑카랑했죠.”

그가 표현하고픈 피아프는 작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다. 그는 자신이 지금 피아프를 연기하기에 좋은 나이지만, 아직 마흔일곱 살까지 살아보지 않았기에 말년 연기가 조금 어려웠다고 한다. 극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연인 세르당이 죽은 후 피아프가 ‘사랑의 찬가’를 부를 때다.

“이번 〈피아프〉의 첫 공연을 본 남편이 해준 말이에요. ‘에디트 피아프가 보고싶고 그립다’고요. 무대에서 제가 최정원이 아닌 피아프로 보이고, 그로 인해 관객이 피아프를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추억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는 피아프가 ‘하늘나라’에서 대한민국, 서울의 충무아트홀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 한다. 그리고 피아프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희망도 들려준다. 그는 지금 피아프에게 푹 빠져 있다.

“두 시간 반 동안 무대를 지키면서 계속 소리치고 뛰어다녀야 합니다. 커튼콜 때 객석에서 ‘피아프’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행복해요.”


고등학교 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꿨어요

그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끼는 어느 곳에서나 그를 춤추고 노래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군방송을 통해 처음 본 흑인의 춤은 충격이었다. 틈만 나면 화면 속 흑인을 흉내냈다. 롯데월드예술단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관계자로부터 “흑인의 춤을 이토록 잘 추는 한국인은 처음이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연기를 시작했어요. 연극 무대에서 아역 배우로 3년 정도 활동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셔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만 두어야 했죠. 그러다 고등학교 때 뮤지컬 배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마침 롯데월드예술단에서 첫 번째 오디션을 할 때 지원했죠. 운 좋게도 최연소로 합격했고, 2년 동안 월급을 받으면서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뮤지컬 연습생이죠(웃음).”

그는 2년간 브로드웨이에서 건너온 뮤지컬 트레이닝 선생들에게 연기, 발성, 재즈, 탭댄스, 발레 등 뮤지컬 배우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 남들보다 그는 더 열심이었다. 예술단 동기들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온 터라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니, 오빠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는 대학 입학과 롯데월드예술단 입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뮤지컬 배우의 꿈을 바로 이뤄갈 수 있는 곳을 택했다.

“솔직히 하기 싫은 공부를 안 해서 신났죠. 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당시 다른 사람이 두 바퀴 턴을 할 때, 저는 네 바퀴를 돌았어요. 그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죠. 트레이닝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1989년에 〈아가씨와 건달들〉의 ‘6번 아가씨’로 데뷔했어요. 지금도 첫 무대를 잊을 수가 없어요. 관객이 보내주던 박수 소리를요. 그때 저는 대사가 한 마디밖에 없었지만, ‘6번 아가씨 팬클럽’이 따로 생길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기억도 나네요.”

그는 다음해 〈가스펠〉에서 첫 주역을 맡는다. 그러나 당시 설도윤(설앤컴퍼니 대표) 씨는 그에게 막 개국한 SBS의 쇼탤런트 특채를 권유한다. 뮤지컬 배우로 주역을 맡자마자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가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를 떠난 유일한 시기다.

“노래, 춤, 연기도 잘하는 사람을 뽑아 드라마나 프로그램 진행, 가수들의 코러스나 무용수로 활동하는 것이었지요. 당시 개런티가 상당했고, 그 돈으로 스쿠프라는 검은색 스포츠카를 샀죠. 그런데 텔레비전에 나와도 관객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한 번쯤 다른 길로 갔다 돌아온 것이 제게 오히려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배우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곳, 바로 박수가 있는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무대로 복귀한다. 그리고 1993년부터 올해까지 1년에 두 편꼴로 작품에 출연했다. 그의 팬이던 임영근 씨와 결혼하고, 외동딸인 임수아(13) 양을 출산한 기간을 제외하고 예외는 없었다. 그를 이야기할 때 국내 최초의 수중분만도 빼놓을 수 없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매가 그대로더라고요. 비결을 물었더니 수중분만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아이를 낳으면 꼭 수중분만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우연찮게 SBS에서 수중분만 다큐멘터리를 제안했어요. 임신 7개월 때부터 촬영했는데, 혼자 아이를 낳는다는 두려움이 없어졌고요. 통증이 거의 없었고, 한 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어요. 딸한테는 그 방송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네가 물에서 태어난 아이구나’라는 말을 하니까 아이도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아요. 저를 닮아 노래를 잘하는데 요즘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어요.”

그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일과 행복을 좇느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말한다. 딸에게 자장가도 못 불러주는 엄마가 배우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의구심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딸의 유치원 발표회에서 그는 이러한 마음을 떨쳐버린다.

“딸 친구들이 저에게 뛰어오면서 ‘수아 엄마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반갑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딸이 나서서 ‘수아 엄마 아니야.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위축됐던 마음을 떨치고 집에서는 아내와 엄마로서, 공연장에서는 배우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죠.”


지금까지 그는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키스 미 케이트〉 〈시카고〉 〈토요일밤의 열기〉 〈지킬앤하이드〉 〈맘마미아〉 〈아이러브 유〉 등 대형 작품 27편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작품의 면면을 보면 우리나라 뮤지컬의 역사를 쓸 수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뮤지컬이 발전하는 시기를 잘 만난 운 좋은 배우일 수 있고, 대학 입학까지 포기하며 연습실에서 땀흘린 준비된 인재라고도 볼 수 있다. 어느쪽이든 그에게 배우란 ‘선한 마음을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다.

“욕심과 미움, 의심을 버리면 연기 집중도가 높아지더라고요. 배우는 연기나 노래, 춤과 함께 선행도 연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단 한 번도 대본을 외우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대본을 기계적으로 외울까 봐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연극은 상대방과 주고받는 리액션인데, 일방적으로 대본을 외우고 그것에 의지한다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스스로 심하게 긍정적이라고 한다. “무대의 모든 일에는 똑 부러지지만, 그 밖의 일에는 허당”이라고 하더니 “인생이 뭐 있나요?”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친 후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그는 취재진에게 기분 좋은 칭찬을 건네며 방긋방긋 웃는다.

“모든 무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걸 못 느낀다면 무대가 일이 아닌 노동이 되겠죠. 꾸준히 영화나 드라마의 출연 제의를 받고 있어요. 물론 출연료도 상당한 매력이 있고요. 하지만 나를 바라보며 환호하는 관객이 있는 무대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끼가 많을까, 어떻게 그렇게 에너지가 넘칠까. 사진 촬영을 시작한 최정원은 단 한순간도 같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을 위해 끊임없이 춤을 추었다.

“‘공연을 망쳤을 때보다 잘되었을 때가 더 두려워. 끝내고 싶지 않은데, 끝내야 하니까….’ 피아프가 한 말이에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발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야겠죠. 무대와 박수를 위해서요.”

사진 : 김선아
장소·헤어·메이크업 협찬 : 이경민 포레 본점
메이크업 : 수영
헤어 : 곽원
스타일리스트 : 홍화두
  • 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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