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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

마지막 꿈은 발레학교 설립입니다

무게가 없는 듯 가볍게 들려 올라가는 가녀린 몸, 음악에 따라 노래하듯 춤추는 몸의 선율. 발끝을 올린 채 몸을 곧추세워 춤추는 발레를 보고 있으면, 이 땅에서 천상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몸짓을 보는 듯하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은 발레리나였다. 재일교포 2세로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발레학원을 찾았다.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발레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외길. 그러나 그는 지금, 몸을 허공에 띄우고 발끝으로 춤추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땅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한발 한발 험한 땅을 개척해나가는 한국의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 있다.

그가 처음 국립발레단 단장이 된 것은 1996년, 서른일곱 살 때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단장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그. 2001년까지 단장을 지내며 ‘발레 대중화’의 초석을 쌓았던 그는 2008년 국립발레단에 돌아왔다. 단장을 공모할 때 ‘손 들어’ 응모했다 한다. 지난해 말 3년 임기를 마치고 그는 다시 단장직을 맡았다. 국립 예술기관의 수장을 12년 동안 하는 유례없는 인물이 된 것이다. 1987년, 트렁크 하나 들고 한국으로 건너와 국립발레단 단원이 되었던 그. 부모님의 나라이긴 하지만, 언어도 문화도 낯선 이 땅에서 그는 어떻게 우리나라 발레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지난 1월 말, 최태지 단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자리 잡은 국립발레단을 찾았다. 관객의 발길이 시작되지 않은 예술의전당의 아침은 휑뎅그렁했다. 텅 빈 오페라극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있는 국립발레단으로 올라갔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연습실들과 사무국, 단장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하나 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이 나타나더니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발레단의 2011년 첫 정기공연은 2월 24일부터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지젤〉이다. 발레단은 〈지젤〉과 3월 1일 열리는 〈스프링 스페셜 갈라〉 공연 연습으로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한번 공연이 끝나면 2~3kg씩 몸무게가 줄어들 정도로 체력소모가 심하며, 열정적으로 몰입해야 하는 공연. 무대에서 가장 가볍고 우아한 몸짓을 보여주기 위해 무용수들은 무대 뒤에서 매일같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최태지 단장 역시 그랬다. 쉰을 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군살 없이 우아한 몸이었다. 꼿꼿한 자세도, 일본식 억양이 섞인 말투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할 때는 사랑에 빠진 소녀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의 모습이 됐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반짝였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었다. “무용수도 아닌데, 어떻게 몸매를 그렇게 유지하시느냐?”고 묻자 “언제나 머릿속은 분주하고, 긴장하고 살기 때문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지젤〉은 그에게나 국립발레단에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작품이다. 지난해 9월과 10월, 국립발레단은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서울 예술의전당과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볼쇼이발레단과 합동공연을 펼쳤다. 볼쇼이극장 무대에 올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역은 김주원・김지영・김현웅 등 국립발레단 단원, 군무는 볼쇼이발레단이 맡았다. 최태지 단장은 이 무대로 그동안의 염원을 풀었다.

“공연을 앞두고 심장마비되는 줄 알았어요. 발레계를 이끌면서 ‘이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었지요. 유서 깊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 대단한 수준의 관객들 앞에 섰으니까요. ‘꿈인가, 생시인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걱정되지 않았나요?

“주변에서 ‘괜찮을까?’라며 걱정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러나 볼쇼이극장의 예술감독을 역임하신 유리 그리가로비치 선생님과 10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모스크바 콩쿠르 심사도 여러 번 맡으면서 ‘우린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긴장은 되었지만 ‘이젠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2008년 볼쇼이극장장을 모셔다 우리 발레단을 보여주며 어느 정도 밑작업도 해놨지요.”

볼쇼이발레단은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시절부터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 투어를 다니던 볼쇼이발레단이 일본에 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구해 공연을 봤다. 1996년 국립발레단 단장이 되었을 때 그는 볼쇼이발레단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오기 위해 유리그리가로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던 2000년에서야 ‘해보자’는 허락을 받았다. 그에게 로열티를 주고 만든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로미오와 줄리엣〉 〈라이몬다〉 〈스파르타쿠스〉 등 다섯 작품이 국립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가 됐다. 볼쇼이 무대는 로열티를 지불하는 것까지 거절당했던 발레단이 세계 최고 발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자리였다.


2월 24 ~27일, 낭만발레의 대명사 〈지젤〉 공연

2008년, 유리 그리가로비치(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지젤〉은 1841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 후 낭만발레의 대명사로 꼽히는 작품. 시골처녀 지젤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후 충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사후(死後) 숲 속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죽을 때까지 춤추게 하는 윌리(결혼 전 죽은 처녀들의 영혼)가 된 지젤.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무덤을 찾아왔다 윌리들의 포로가 되는데, 지젤의 사랑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국립발레단이 2월에 공연하는 〈지젤〉은 낭만주의 발레의 시초가 되었던 파리오페라발레단 버전(파트리스 바르 안무)으로, 19세기 낭만발레의 오리지널 무대를 충실히 살려낼 예정이다.

“이제까지 클래식 발레를 대표하는 러시아로부터 기초를 배웠다면, 프랑스 발레는 발레의 원류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겁니다.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피우고 러시아로 건너가 고도로 발달한 예술이지요. 프랑스혁명 후 발레를 대중도 즐길 수 있게 만든 게 바로 파리오페라발레단입니다. 예산이 확보되자 ‘이제 프랑스 발레를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좋아했어요. 저는 완벽한 것을 하고 싶어요. 무대 세트와 의상, 조명,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발레는 종합예술이니까요. 이탈리아에서 무대 세트와 의상을 가져오고, 프랑스 발레 최고 안무가의 안무 그대로 합니다. 이탈리아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요. 내년이 국립발레단 창립 50주년인데, 그에 걸맞는 레퍼토리를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프랑스 낭만발레의 진수를 보여드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지젤은 발레리나들이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만큼 부담이 큰 역할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에서 지젤 역은 국립발레단의 김주원・김지영・이은원과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왈(수석 무용수) 라에티시아 퓌졸이 돌아가며 맡는다. 김주원과 김지영은 국립발레단의 ‘투톱’이라 불리는 대표 발레리나. 이은원은 19세의 신예로 주역으로 발탁됐다.

“1막과 2막의 지젤은 완전히 다르게 표현해야 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어떻게 용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일 거예요. 연애도 해보고, 배신도 당하고, 가슴 아프게 눈물도 흘려봐야 진짜 지젤의 마음을 이해할 테니까요. 김주원과 김지영은 이제 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무용수입니다. 그동안 여러 작품을 소화하면서 표현력을 갈고닦아 최고조에 이르렀으니까요. 발레리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말하면서 춤을 춥니다. 공연을 보면서 그걸 느끼셨으면 해요. 같은 작품이라도 각각의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지젤은 다릅니다. 김주원은 섬세한 감정표현에 특히 뛰어난 드라마틱한 발레리나이고, 김지영은 클래식과 낭만발레 모두를 최고로 소화합니다. 이은원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애기 때부터 봐왔는데, 그때부터 다이아몬드 같은 스타성이 느껴졌어요. 그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무용수를 볼 때 저는 지도자가 아니라 관객 입장에서 봅니다.”


우리나라 무용수와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를 같은 무대에 세우는 것에 대해 그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단”이라고 말한다.

“뉴욕의 아메리칸발레시어터는 자신들의 공연 때 세계의 스타 무용수들을 초청해 함께 세웁니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와 너무 비교되는 것 같아 외국 발레단의 무용수를 초청하는 게 두려웠지만, 이제 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세계 최고 발레단의 무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세계 무용계에서 우리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좋다고 칭찬을 많이 받아요. 클래식과 현대발레 양쪽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발레단이 많지 않은데, 우리는 꾸준히 다양한 장르를 해왔으니까요. 세계적인 발레단이 흔쾌히 함께하겠다고 할 정도로 수준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관객 수준도 높아졌고요.”


‘부모님이 그리워하는 한국에서 발레하자’는 마음으로 한국행

그가 국립발레단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 객원 주역으로 한국을 찾으면서였다. 그리고 1987년 국립발레단 단원이 된 그는 이곳에서 결혼하고, 딸 둘을 낳으면서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는 왜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왔고, 어떻게 학연・par 지연・혈연이 없으면 활동하기 어렵다는 한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도쿄에서 온 발레 선생님이 무척 아름다워 ‘발레를 하면 나도 저렇게 세련된 여성이 될까?’라는 기대로 시작한 발레. 일본에 온 볼쇼이와 로열, 슈투트가르트 등 세계적인 발레단의 공연을 보며 발레리나의 꿈을 키우던 그에게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안긴 사건이 생겼다.

“스물두 살 때였어요. 전국의 무용수 중 한두명을 뽑아 외국 유학을 보내주는 국비 유학생에 뽑혔는데, 마지막에 서류를 내려고 보니 ‘일본 국적을 가진 자’로 자격 제한이 있는 거예요. 그때까지만해도 내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너무너무 쇼크였죠. 제가 매우 상심해 있으니 부모님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주셨지요. 그러나 파리에서 돌아온 후에도 예전 같지 않았어요. ‘넌 한국 사람이지?’라는 시선이 어디에서나 느껴졌으니까요.”

‘부모님이 그리워하는 한국에서 내가 배운 것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는 국립발레단으로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소위 왕따였다. 우리말도 잘 못하는 재일교포가 주역을 독차지하는 것을 보는 동료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들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너무 부담스럽다. 난 주역을 안 해도 된다”고 하면 당시 임성남 단장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다독였다. 발레리나 시절,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삼키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발레단 단장이 된 후 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민이 있어도 먹고 자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단장으로 임명된다는 말을 듣고는 한숨도 못 잤어요.”

그 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한다. 말이 없고, 눈물이 많던 그가 달라졌다. ‘울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는 “한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다. 단장이 된 후 그는 발레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이제 자신은 무대에 선 발레리나가 아니라, 그들이 마음껏 활동하게 무대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 하나 망가져서 우리 애들(발레 단원들을 그는 내 애들, 새끼들이라 불렀다)이 얻을게 있다면 기꺼이 망가지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발레리나 때는 무대에서나 현실에서나 여성적이었는데,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가만있으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열심히 이야기하고 설득했다. 열 번 스무 번 연거푸 찾아가고, ‘와서 보시라’며 초청하기도 했다.


“제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더 귀담아 듣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1996년 그가 처음 단장을 맡았을 때 국립발레단의 공연은 연 30회였다. 지난해에는 130회를 공연, 2~3일에 한 번꼴로 단원들이 무대에 섰다. 대부분 스스로 표를 사서 오는 유료 관객들로 공연장이 찼고, 매진된 공연도 많았다. 공연마다 빠짐없이 보는 발레 마니아도 생겼다. 사람들이 발레에 대해 ‘어렵다’ ‘지루하다’며 멀리하던 때, 그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관객을 찾았다. 긴 공연이 지루하다면 짧게 줄여서 보여줬고, 내용을 몰라 어렵다고 하면 해설을 붙여 공연했다. “발레를 무슨 슈퍼마켓처럼 팔려 하느냐”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해설이 있는 발레’를 보고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전막 공연을 보기 위해 다시 발레단을 찾으면서 발레 팬이 늘어났다. 발레를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문화 소외층을 찾아 공연도 한다.

“바닥이 미끄럽지만 않다면 어디든 가서 공연했습니다. 발레를 즐기는 관객층을 늘리자는 뜻도 있지만, 무용수들에게 무대에 서는 기회를 많이 주겠다는 의도도 컸지요. 무용수는 자주 무대에 서야 관객의 박수를 받으면서 기량을 발전시키고 항상 긴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량을 닦은 무용수들은 국제 발레콩쿠르에서 수상하고,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 오를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연습때도 그는 무용수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그냥 봐 넘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 차례에서도 항상 집중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또 어디 가서도 ‘국립발레단 무용수’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이에 걸맞게 행동하라고 당부한다.

“제가 마귀할머니죠, 뭐. 안줏거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잃으면 안 되니까요. 발레단의 수준은 군무가 얼마나 흐트러짐 없이 호흡을 맞추는지에 따라 좌우됩니다. ‘난 주역이 아니니까’라며 해이해지면 안 될 일이지요.”


몸은 무대를 떠나 있지만, 마음은 무대에서 무용수들과 함께 춤춘다는 최태지 단장. 공연을 앞두고는 같이 긴장해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그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게 있다. 발레학교 설립이다. 2008년 ‘단단히 각오하고’ 다시 단장이 되었을 때부터 공공연히 밝혀온 포부다.

“지난해에도 울릉도・서산・김해 등 구석구석을 다니며 공연했는데,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도 있을 텐데. 기숙사 딸린 발레학교가 있으면 그런 아이들을 발탁해 키워줄 수 있어요. 세계적인 발레단은 발레학교를 두고 아이들을 일찍이 발탁해 훌륭한 무용수로 키워냅니다. 일본에서 성장한 저역시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후배들에게는 꼭 그런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또 발레단에서 활약했던 무용수들이 선생님이 되어 그동안 익힌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장이 될 수 있고요.”

그동안 걸어온 길에 대해 최태지 단장은 “하고자 했던 일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하나 이루어졌다. 참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발레학교 설립 역시 그의 꿈대로 이루어질까. 확실한 것은 그가 그 꿈을 위해 뛸 것이며,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고 다닐 거라는 사실이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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