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팸어랏〉에서 아서왕 역 맡은 뮤지컬 배우 정성화

뮤지컬 하면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에요

정성화. 그는 이미 최고의 남자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았다. 2003년 뮤지컬 〈아이러브 유〉로 데뷔한 이후 〈올슉업〉 〈컨페션〉 〈맨 오브 라만차〉 등에서 주연을 도맡아왔지만 한동안 그에게 박히는 시선은 “어? 개그맨이 뮤지컬도 하네?”였다. 최근 4년 동안 각종 뮤지컬 시상식에서 매번 고배를 마신 것도 이런 이유가 없지 않다. 그러다 올해 6월,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그는 뮤지컬 〈영웅〉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최고 배우’ 타이틀을 공인받았다. 이제 그에게서는 ‘개그맨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코미디 뮤지컬 〈스팸어랏〉에서 정성화는 자신에게 딱 맞는 날개옷을 입고 펄펄 나는 듯했다. 어리바리한 아서왕 역을 맡아 무대를 누비는 그를 보며 관객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웃어댔다. 입꼬리를 내린 채 꽉 다문 입, 심각한 듯 힘을 준 눈썹만으로도 웃음이 팡팡 터졌다. 관객은 우스워 죽겠다는데 정작 자신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 뚝 뗀 진지함이 웃음을 배가시킨다. 돌이켜보면 정성화는 어떤 옷을 입어도 제 몸에 착 붙는 연기를 해왔다. 〈영웅〉에서 구국열사 안중근 역할도 기막히게 잘 소화하지 않았던가.

뮤지컬 <스팸어랏>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를 패러디한 코미디다. 1975년에 제작된 영화 〈몬티 파이톤과 성배를 찾아서〉를 원안으로 해서 만든 뮤지컬로, 2005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토니상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최우수 뮤지컬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최우수 연출상 등 3개 부문을 석권했다. 초연 당시 전석 매진에 브로드웨이 사상 사전 판매율 1위를 차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목 ‘스팸어랏’은 원작 영화에서 손님들이 뭘 주문해도 스팸을 산더미처럼 내오는 장면에서 따왔다.

국내 초연인 이 작품은 연극 〈아일랜드〉에 출연한 정성화를 보며 “저 친구와 〈아이러브 유〉를 해보면 어떨까?” 하고 그를 뮤지컬계로 이끈 오디뮤지컬 신춘수 대표가 프로듀싱한 야심작이기도 하다. 〈스팸어랏〉은 유명한 뮤지컬과 오페라를 패러디한 장면이 군데군데 등장해 뮤지컬과 오페라에 대해 알면 아는 만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지킬앤하이드〉의 지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 〈그리스〉의 대미, 〈헤드윅〉의 헤드윅 등이 등장해 원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신선한 재미를 안겨줘 관객은 쉴 새 없이 웃는다. 배우 박영규가 아서왕을 정성화와 나눠 맡았고, 〈모차르트〉 〈캣츠〉 〈명성황후〉의 신영숙, 〈올슉업〉 〈그리스〉의 구원영이 호수의 여인으로 더블 캐스팅됐다. 정상훈, 김재범, 김호 등 쟁쟁한 뮤지컬 스타들과 슈퍼주니어의 예성도 출연한다. 개그맨 박명수의 목소리 출연도 재미있다.

라이선스 뮤지컬인데다 미국인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이 연출을 맡아 정서적 괴리감을 우려했지만, 아니다. 사실 웃음이 팡팡 터지는 지점은 언어유희를 이용한 패러디다. 가령 “아더! 아 더워” 하면서 땀을 식히는 장면처럼.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 연출가가 한국어로 언어유희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터. 바로 이 부분에서 배우들의 팀워크가 드러난다. 배우들은 약 2주간 연출진과 아이디어 회의를 함께하면서 영어의 유머를 한국식 유머 코드로 번안했다. 정성화의 개그맨으로서의 이력이 크게 도움이 된 부분이다.

“대학 시절 밤새워가며 동기들과 코미디를 짜던 경험, 개그맨 시절 1주일에 한 편씩 콩트를 짜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우리끼리 하면 웃기지만 관객은 웃지 않는 유머가 있거든요. 그런 것을 골라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또 하나, 랜슬럿 경 역을 맡은 정상훈과의 찰떡궁합도 이 극에 재미를 더한다. 정성화와 정상훈은 개그맨 선후배 사이로, 한집에 산다. 10여 년 동안 붙어 지내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 사이. 정성화는 정상훈에 대해 “수족 같은 친구이자, 솔메이트”라며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전기세를 못 내 전기가 끊긴 적도 있었죠

정성화에게 뮤지컬은 뭘까. 1994년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 개그맨으로서 인지도도 그럭저럭 있는 편이었고, 드라마 〈카이스트〉, 시트콤 〈골뱅이〉 〈동물원 사람들〉 등에 출연하며 이력을 쌓아갔지만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뮤지컬을 하면서 그는 딴사람이 됐다. ‘더 뮤지컬 어워즈’ 시상식 때 “뭘해도 중간 이하였고, 별 열정도 없던 저를…”이라며 밝힌 수상 소감에서 그의 인생에 있어 뮤지컬이 어떤 의미인지가 잘 드러난다.

“뮤지컬을 만나고 나한테도 이런 엄청난 열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어요. 뮤지컬은 저에게 심장 같은 존재입니다. 나를 뛰게 하고 동력이 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죠.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해요.”

정성화의 목소리는 고급스럽고 품위 있다. 매력 있는 바리톤 음성이다. 무대에 선 그를 본 관객은 그가 원래 뮤지컬 배우였던 것으로 알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예쁜 여학생들을 많이 볼 것이라는 기대감에 교회 성가대를 했는데 그때 배운 발성법이 전부다. 혹 노래를 잘하는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닐까 물었더니 “가족끼리 노래방에 간 적이 있는데요, 어머니 아버지는…” 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 대신 “음하하하”하며 통쾌하게 웃는다. “저 위의 조상 중 한 분의 재능이 혹시?”라며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탠다.

“순간순간 저한테 배우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러브 유〉를 2년간 장기 공연하면서 스스로 많이 배웠어요. 매일매일 목소리를 찾아가는 재미랄까요? 매회 다른 시도를 하면서 저 스스로를 훈련시켰어요. ‘아, 이렇게 하면 2회 공연할 때는 목이 좀 아프더라, 그런데 목소리는 좋아지더라, 또 이렇게하면 관객 반응이 확 오더라’ 하면서. 듣는 귀가 열렸다고 할까요?”

그는 대사 전달력이 뛰어난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단어나 음절로 발음하는 게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또박또박 발음한다. 인터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리듬을 타듯이 말했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호흡해야 의미 전달이 잘되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목소리는 타고난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이 목소리였어요. 다른 아이들은 변성기이거나 소년 목소리였는데 저만 이 목소리였죠. 아이들이 떠들면 문을 확 열고 (턱을 아래로 당기며) ‘야, 임마!’ 하면 단번에 조용해졌어요. 선생님인 줄 알고. 목소리 때문에 선배들한테 많이 맞았어요. 선생님 목소리로 놀라게 했다고요.”



제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

그의 원래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게임을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을 졸라 8비트 컴퓨터를 샀고, 그때부터 컴퓨터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 꿈의 궤도를 대대적으로 틀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중2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장기자랑시간에 선생님 흉내를 냈죠. 선생님과 학생들이 자지러지게 웃는 거예요. 어떤 선생님은 웃다가 넘어질 뻔하시고.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고요. 순간 ‘아, 진짜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만해도 개그맨이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고2 때 결심을 굳혔죠. 학교 축제 때 10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개그를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까 와~ 진짜 중독되더라고요.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은 완강하게 반대하시다가 고3 학교 축제 때 제가 사회 보는 걸 보시고는 인정해주셨어요.”

그는 배우로서 슬럼프가 있었다. 2001년부터 2년간 긴 공백기가 있었던 것. 개그맨으로, 드라마와 시트콤 배우로 나름 잘나가다가 한순간에 일이 뚝 끊겼다. 매니저와 헤어지면서 연결고리마저 없어졌다. ‘찾아주는 사람이 있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는 많은 배우가 있고, 나보다 내 캐릭터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빚은 늘어갔고,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까지 끊겼다. 부모님한테 손을 벌릴 수도 있고, 선후배한테 빌릴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텅텅 빈 냉장고를 보고 울기도 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일산의 한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서 오십쇼. 뭘 드릴까요?” 하는 서빙. 그 시절 그는 ‘정성화가 한물갔구나’ 하는 시선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세상을 많이 배웠다 한다. 그러다 연극 〈아일랜드〉를 하게 됐고, 뮤지컬 〈아이러브 유〉를 하면서 뮤지컬 배우로 변신했다.

그에게는 7년간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 미니홈피에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고, 진지한 고백의 글을 써서 올리기도 한다. 이런 당당한 모습이 그의 팬들을 더 흐뭇하게 한다. 그녀와 내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10년 후 정성화는 어떤 모습일까? 질문하기가 무섭게 그는 “지금과 같은 인기를 구가하는 뮤지컬 배우가 돼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가정적으로 안정돼 있을 것이고, 생활이 안정되면 건강도 더 좋아질 것이고, 아내와 작은 사업을 하면서 가계를 안정적으로 꾸려갈 것이고, 마음이 안정돼 있으니까 작품에 더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정의 비중이 커질수록 무대에서도 점점 안정감이 생기겠죠?”

그는 11월 7일까지만 〈스팸어랏〉의 아서왕이 된다. 12월 초부터는 〈영웅〉의 안중근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바로 그 작품. 어리바리 아서왕과 구국열사 안중근의 캐릭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는 “이 캐릭터에서 저 캐릭터로 돌아가는 시간이 적어도 한 달은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서면으로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졌다. 그날 바로 답변이 왔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지, 혹시 성형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음… ‘양쪽 눈의 밸런스가 좀 별로다’라는 생각은 했었는데요. 사실 그 눈 덕택에 이 역할을 해도 괜찮고 저 역할을 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너의 눈을 보면 넌 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어!’라고요. 칭찬인 것 같아요. 이 눈 지키려고요!”

그의 이메일 주소는 jshmsda@yahoo.co.kr이다. ‘정성화 만세다’라는 뜻이란다. 물론 그가 직접 지었다.

사진 : 김선아



뮤지컬 〈스팸어랏〉 공연 정보
기간 : 2010년 10월 10일~2011년 1월 2일
시간 : 평일 오후 8시 / 토 오후 3시, 7시 / 일 오후 2시, 6시 (월 공연 없음)
장소 : 한전아트센터 문의 : 1588-5212
  •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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