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으로 변신, 청춘 영화 〈요술〉 내놓은 구혜선

청춘은 어리석지만 뜨겁다   난 오늘을 즐긴다

구혜선(26)에게 고(故) 정승혜 대표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즐겁게 살아. 어제를 되돌아보지 말고, 내일도 걱정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잘살면 되는 거야”라고.

정승혜 대표는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만든, 지난해 5월 향년 44세로 요절한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여성영화 제작자였다. 구혜선이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준 어른 두 분 중 하나로 꼽는 선배이기도 하다. 또 한 명은 현재 구혜선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다.

“정 대표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제야 왜 나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구혜선. 아직 ‘탤런트’라는 꼬리표가 더 익숙하다. 연기 경력마저 ‘만개’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제 막 봉오리가 맺혔다는 표현이 더 제격이고, 걸음은 출발점이 더 가깝다. 한 우물도 이제 막 파기 시작했는데, 구혜선은 여기저기 또 다른 우물을 파헤쳐놓고 있다.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른 스물여섯 살의 여배우는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가졌고, 자작곡으로 채운 앨범(구혜선 소품집)을 만들었으며, 소설책 한 권(《탱고》)을 출간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작곡을 OST(영화 삽입곡)에 끼워 넣은 어엿한 장편영화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 6월 24일 개봉한 〈요술〉이다. 명함을 파자면 배우・소설가・작곡가・일러스트레이터・영화감독 등 대여섯 개는 마련해야 할 것이다.

배우로는 시트콤 〈논스톱5〉로 시작해서 〈서동요〉 〈열아홉 순정〉 〈왕과 나〉 〈최강칠우〉를 거쳐 폭발적인 인기를 끈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 역까지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배우라면 모두가 꿈꾸는 스크린 데뷔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영화배우보다 영화감독 타이틀을 먼저 얻었다. 구혜선이라고 왜 조급증이 나지 않았을까. 의젓하게 말 한마디 보탠다.

“압박감이나 초조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 대표님의 일을 겪은 후에 다 비웠어요. 바람 따라 물 따라 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려고요.”

여름 길목에서 만난 구혜선은 티 한 점 없이 밝고 화사한 미소가 빛났다. 웃음이 시원하고 건강해 보였다.


‘인터넷 얼짱’ 으로 뜨고 ‘싸이월드’ 로 캐스팅되고

구혜선만큼이나 인터넷, 모바일 시대의 이기(利器)를 누린 연예 스타도 드물 것이다. 구혜선은 이른바 ‘인터넷 얼짱’ 1세대다. 어원조차 가물가물할 만큼 보통명사화되어버린 ‘얼짱’이라는 말은 ‘얼굴이 짱(최고)’이라는 뜻의 은어로 2002~2003년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유명해졌다. 이때 인터넷 5대 얼짱으로 주목받았던 이들이 바로 구혜선과 박한별, 남상미 등이다. 중학생이던 열다섯 살 시절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구혜선은 “누구나 H.O.T나 핑클이 되고 싶어 했는데, 나 또한 유명해지고픈 예쁜 여중생 소녀였을 뿐”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친구가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으면서 ‘얼짱’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한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소녀 그룹으로 가수 데뷔를 준비했다. 그 사이에 CF도 한 편 찍었는데, 아무도 구혜선의 얼굴을 알아챌 수 없는 광고 데뷔작이 되고 말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김남일과 찍은 컴퓨터 CF였다. 원래 ‘메인 모델’로 캐스팅됐지만 모두 다 편집되고 뒷모습만 1초가량 남았다. 그러다가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사장을 만나면서 연기자로 진로를 수정했다. 하지만 구혜선의 드라마 첫 캐스팅도 소속사가 아닌 인터넷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구혜선의 미니홈피 ‘싸이월드’에서 얼굴을 본 한 방송국 PD가 “한번 만나고 싶다. 오디션을 보러 오지 않겠느냐”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연락처를 쪽지로 보내왔다. “처음엔 웬 사기꾼인가 싶었다”는 구혜선은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쪽지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출연을 결정했다. 시트콤 〈논스톱5〉로 데뷔하기 전인 2004년 7월의 일이었는데, 그때 출연한 작품이 당시만 해도 무명이나 다름없던 배우 김윤석이 주연한 KBS 단막극 〈드라마시티-아나그램〉 편이었다.


요새 구혜선은 ‘트위터’에 열심이다. 요새 읽는 책이 뭐냐는 질문에 이외수의 《아불류 시불류》라며 “단문이지만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기가 막힌다. ‘맞다 맞다’를 연발해가며 배꼽 잡고 읽었다”고 말했다.

“원래 제가 이외수 선생님의 팬이거든요. 이전의 책도 모두 읽었고요. 그래서 《아불류 시불류》를 읽고는 이외수 선생님께 트위터를 통해 인사를 드렸어요. 물론 그전에 만나뵌 적은 없었지요. 트위터로 한번 뵙자고 청했더니 그러자고 하시더라고요. 책 한 권 더 사서 사인을 받았지요.”


나를 키운 건 사람 냄새 나는 소도시의 감수성

현대 문명의 이기를 만끽하는, 거칠 것 없는 세대의 일원이지만, 구혜선에게 정서적 자산이 되어준 것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경기도의 한 소도시였다. 음악이며 미술이며 연기에 영화감독까지 거칠 것이 없으니 그는 옛말로 하자면 ‘팔방미인’, 요즘 말로 하자면 ‘예능 영재’인 셈이다. 열혈 학부모 밑에서 비싼 학원을 두루 거친 ‘강남 소녀’였을 것 같지만, 아니다.

“변두리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셨고요. 공동묘지 뒤편에 있던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 숨은 예술가들이 많았어요. 옆집 언니가 뮤지컬 배우였고, 건넛방 새댁이 피아노를 전공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는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앞집에 모이고 옆집에서 자고 했었어요. 심지어 병원도 거의 가지 않았어요. 앞집 할머니 침을 받고 주인집 ‘도사님’ 아저씨한테 예언을 들으며 자랐죠.”

그림도 눈동냥, 음악도 귀동냥이었던 셈이다. 대신 어둠이 이슥하게 내려앉을 때까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하얀 얼굴이 숯 검댕이 될 때까지 쏘다니던 소녀였다. 어릴 적 느꼈던 사람 냄새 나는 변두리 도시의 정서가 ‘작가’ 구혜선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원래 감독보다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극작이었어요. 〈요술〉 전에도 꾸준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죠.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전학을 가게 됐어요. 그 친구에게 시를 한 편 써서 줬지요. 〈내 친구 귀향 가네〉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친구가 펑펑 울었어요. 어린 마음에 ‘아, 나는 시를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시 쓰고 그림 그려주고 했어요. 지금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중학교 1학년 때는 〈나뭇잎이 죽어 잠들었네〉라는 감상적인 시를 교내 시화전에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았죠. 지금도 갖고 있어요. 일기 쓰고 메모하는 습관도 계속 해오고 있는데, 어느 순간 이걸 이야기로 만들어 보여주면 어떨까, 그게 드라마고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녀 중 막내인 구혜선은 스스로의 성격에 대해 “원래 낙천적이고 쾌활하며 누구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다”고 말했다. “만약 사기꾼을 만났다면 딱 사기당하기 좋은 성격”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순간순간 ‘훌륭한 어른들’을 만났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7년 전 가수가 되고 싶어 열심히 훈련하던 시절,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사장이 그랬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자마자 대뜸 “네가 얼짱 구혜선이냐, 노래 한번 불러봐라”라고 했던 양 사장은 “가수 말고, 연기해라”라고 잘라 말했다. 구혜선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 양현석인데, 그 말을 거스를 수 있었겠느냐”며 “믿고 따랐다”고 말했다.

고 정승혜 대표는 구혜선의 영화감독 데뷔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선배이자 영화인이었다. 구혜선이 틈틈이 써놓은 것 중 아끼던 몇 편의 시나리오에 대해 “10원짜리 시나리오”라며 냉혹한 평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정 대표는 구혜선이 지난 2008년 첫 단편 〈유쾌한 도우미〉를 연출하는 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 장편 데뷔작인 〈요술〉의 시나리오는 끝내 보지 못하고 정 대표가 지병으로 생사를 달리했지만, 이번 작품 역시 첫 단편에서 인연을 맺었던 정 대표의 영화사 스태프와 같이했다. 그렇게 구혜선이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게 된 영화 〈요술〉은 예술학교에 다니는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 음악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천재 첼리스트와 그의 재능에 늘 가려져 있는 친구, 두 남자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음악을 모두 갖고 싶어 한 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마치 LP판처럼 묵은 느낌으로, 때로 그림엽서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로 묘사된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는 청춘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영화죠. 청춘은 때로 모든 것을 모호하고 불명확하며 혼돈스러운 상태로 몰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열등감 덩어리로 만들기도 해요. 그러다가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할 때도 있고,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타오르게도 하죠.”

이제 구혜선은 배우로 돌아간다. 하반기 방영 예정인 드라마 〈더 뮤지컬〉에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의대생 역할을 맡아 이달(7월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겨울엔 영화감독으로 복귀할 계획이다. 아름다운 뱀파이어 로맨스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해뒀다. 구혜선은 “훗날 영화감독 구혜선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뭐 어떠랴. 배우든 가수든 작곡가든 화가든. 구혜선 감독의 말마따나 청춘은 요사스럽기 마련이며(요술!)이며 무모해서 아름답고 어리석음으로 뜨거운 불덩이 같거늘.

사진 : 김선아
  • 201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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