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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 역 맡은 배종옥

이제까지의 삶은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노력의 과정

배종옥은 뾰족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전 여기 앉을래요”라며 앉아 있던 일행을 우르르 일어나게 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공연 중에는 인터뷰 잘 안 해요”라며 20분 만에 인터뷰를 끝내달라고 했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 블랑쉬로 무대에 오른 지 3주째, 여기저기에서 연달아 나오는 리뷰에 한껏 예민해 있는 듯 보였다. 배종옥은 그런 배우다. “나는 신인 때 연기 못하는 배우였다”며 “26년 연기 인생은 부족함을 채우는 과정이었다”는 그의 말마따나 배종옥의 머릿속은 온통 블랑쉬로 가득 차 있었다. 배종옥은 마음을 풀어헤쳐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꽁꽁 싸매고 있지도 않았다. 예의 그 똑 부러지는 목소리에는 가식 없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1초 안에 답이 돌아왔다. 대본을 읽듯 속사포로 대답을 쏟아냈다.


지금 시점에서 중간평가를 한다면.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공연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는 다른 블랑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해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일단 평가는 좋은 것 같아요. 제 생각인지 모르지만.”

공연 전, 잠을 설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는데요.
“공연 시작하니까 공연 전보다는 부담감이 훨씬 줄었어요. TV 드라마는 일상적인 표현이 많다면, 연극은 훨씬 극적이잖아요. 극으로 치닫거나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저로서는 익숙지 않았죠.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 보니 드라마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져요. 연습실에서 머리로만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어요. 작품이 농익어간다고 할까요?”

블랑쉬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그의 아픔을 이해하는 게 첫 번째였어요.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여자를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내가 그 여자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빠져들었죠. ‘혈통 좋은 가문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집안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심지어 남자들로부터 버림받고, 원룸 같은 데 얹혀사는 처지가 된다면’ 상상하면서요.”

〈욕망이라는…〉 제작팀을 집으로 초대해 홈 파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집에서 간단히 맥주 마셨어요. 작업하는 친구들과 가끔 그런 시간을 가져요. 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팀원과 유대관계가 좋아야 하니까.”

“연기밖에 모르는 삶”이라며 “배역을 맡으면 모든 시간을 그 인물로 산다”고 했지요. 〈바보 같은 사랑〉의 순애보, 〈천하일색 박정금〉의 아줌마 여형사, 〈오감도〉의 팜므파탈 등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가다 보면 스스로 ‘인간 배종옥은 누구인가’라는 혼란스러움이 없나요.
“혼란스러울 때가 많죠.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요. 6년째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아침에 30분 정도 혼자만의 명상 시간을 가져요.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제점을 풀어가고, 사회봉사를 하면서 시각을 외부로 돌려요(그는 5년째 국제기아질병문맹퇴치 기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하루에 1달러가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가진 문제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예전에는 내 문제들 때문에 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헤어나지 못했다면, 요즘은 쉽게 빠져나와요.”

이제까지 해온 작품 중 가장 배종옥다운 작품은.
“모든 캐릭터에 다 나다운 게 녹아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사랑했던 작품은 〈거짓말〉이에요. 대중에게 저를 강하게 각인시킨 건 〈목욕탕집 남자들〉이었고요. 〈바보 같은 사랑〉을 할 때에는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사극에 처음 도전하지요(그는 5월 말 방영되는 〈김수로〉에서 김수로 어머니 역을 맡았다)? 블랑쉬나 김수로 어머니 둘 다 묻어 갈 수 있는 배역이 아닌데, 큰 배역을 한꺼번에 맡아서 부담스럽겠군요.
“저는 데뷔 이후 이제까지 누구한테 기대서 한 작품은 없었어요. 큰 역이든 작은 역이든 역할의 비중으로 인한 부담감은 없어요. ‘그 인물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죠.”


지금 가장 간절한 욕망은 뭔가요.
“늘 간절한 욕망은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는 거예요. 많은 일을 해왔지만, 모든 게 ‘어떻게 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노력의 과정이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공부를 계속하니까 교수의 꿈을 키우는 게 아닌가, 얘기하곤 하는데 교수도 기회가 되면 하겠지만 저는 제 작업 과정에서 하고 싶던 말을 박사논문으로 풀었던 거지, 교수가 되고 싶어서 했던 건 아니에요. ‘왜 배우는 공부하면 안돼?’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다음 공부는.
“보이는 공부로는 박사가 끝이지만 사실은 시작이죠. 작업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책으로 남기고 싶어요. 예를 들어 드라마에 대한 책을 쓸 수도 있고요.”


배우 이외의 다른 삶을 꿈꾼 적은 없나요.
“제 일상은 배우밖에 없죠.”

고2 딸은 외국에 유학가 있지요. 딸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절친한 친구 같은 존재.”

인간적인 외로움은 없나요?
“그런 외로움은 못 느꼈어요. 저는 배우로서의 삶이 좋아요. 마음공부를 하면서 내면의 충족감을 훨씬 많이 느꼈어요.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요.”

극과 극의 모습을 다 지닌 것 같습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차가운 완벽주의자와 모든 걸 감싸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따뜻한 휴머니스트. 인간 배종옥은 어디에 더 가까운가요.
“글쎄요. 둘 다인 것 같아요. 인간이기에 옹졸한 면도 있고.”

여배우에게 마흔 다섯은 어떤 나이인가요.
“나이 들면서 여배우로 살아남는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늘 느껴요. 〈거짓말〉을 했을 때가 30대 중반이었는데, 배우로서 어떻게 서야 할까를 고민할 시기였죠.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제는 한숨 돌려도 되지 않겠어?’ 했지만 저는 아니에요. 늘 도전이고 늘 시작하는 시간이었어요. 아마 여배우가 20대 스타로 이름을 날린 이후는 매 순간 도전일 거예요.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건 치열한 고통 속에서 얻어지는 결과예요.”

〈바보 같은 사랑〉을 보면 ‘여배우로서 예쁘게 보이고 싶다면 저렇게 못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여배우는 예뻐야 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요즘 거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흔들릴 때가 있지요. 게시판을 보면 ‘웬만한 여배우는 이걸 보고 성형 유혹을 받겠구나’ 싶어요. 그럴 때마다 다짐해요. ‘내가 나를 다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깊이로 표현을 해야지,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것으로 커버될 수 없는 것이다’ 하고요. 제가 감시해야 하는 부분이겠죠?”

어떤 배우로 늙고 싶은가요.
“좋은 배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배우이자 나 스스로의 삶으로도 만족하는 배우.”

캐릭터로 인정받고 싶은가요,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가요.
“저는 좋은 사람 같진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저는 제 일을 충실히 할 뿐이지, 남에게 잘 보이려 하는 편은 아니에요. 좋은 사람 같지 않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강하죠. 제 삶은 작품에 집중돼 있어요. 배종옥 하면 ‘아, 그 사람 배우였지. 이런 역할을 했었지.’ 이렇게 남으면 좋겠죠?”

배종옥 씨가 맡는 캐릭터는 워낙 강해서 작품이 끝나도 캐릭터는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제가 TV 드라마와 대중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한 작품들은 역사에 남을만한 드라마 대열에 거의 못 끼었더라고요.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대중성이 별로 없었어요. ‘아, 내가 대중적이지 못하구나. 내가 좋아하는 작품, 내 자신에게 치우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대중과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 배역 선택의 기준은 ‘좋아하는 작품’ 위주인가요.
“네. 〈욕망이라는…〉도 제가 먼저 제안했어요. 〈욕망이라는…〉의 블랑쉬는 모든 여배우의 로망이에요. 이 역할을 극복하지 못하면 여배우가 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여배우라면 블랑쉬에 대한 꿈을 꿀 거예요.”

이제 블랑쉬를 해도 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 건가요.
“그렇겠죠. 이 작품은 하면 할수록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하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있고, 연기의 폭도 훨씬 넓어지는 것 같아요. 팀원들에게 참 고마워요. 끝까지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종옥이 블랑쉬로 분한 이 연극을 3월 24일과 4월 2일, 두 차례 봤다. 4월 2일 무대에서 배종옥은 그전의 블랑쉬와는 달랐다. 확실히 더 연극적이었다. 목소리의 진폭은 넓어졌고 액션은 커졌다. 어두운 현실과 화려한 욕망 사이에서 파르르 떨리는 복합적인 내면 연기가 객석에 전해졌다. 핏대를 세우며 극단의 감정을 표출하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좍 돋았다. 그 스스로 “극적으로 치닫는 연극 무대가 익숙지 않았다”는 초기의 자각을 반영한 연기였다. 배종옥의 연기는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의 끝이 궁금하다.

사진 : 진구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으로, 1951년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로 유명해졌다. 미국 남부의 명문가 출신인 블랑쉬 뒤보아가 가문의 전 재산을 잃은 후 동생이 사는 뉴올리언스의 초라한 농가에 얹혀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몰락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에 빠져 허황된 욕망을 좇는 블랑쉬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지금의 욕망에 충실한 동생 스텔라 등 각자의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비극의 양상은 현대에도 공감대가 넓다.

배종옥이 주연한 이번 연극은 조재현의 프로듀싱으로 유명해진 ‘연극열전 3’의 네 번째 작품. 2009년 조재현은 배종옥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돈 벌어서 뭐할래? 연극하자”고 제안했고, 평소 ‘연극 무대에서 인정받아야 진짜 배우’라고 생각하던 배종옥은 2004년 〈데드 피쉬〉 이후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연극열전 2’의 〈리타 길들이기〉로 스타덤에 오른 이승비가 블랑쉬 역에 더블 캐스팅됐고, 동생 스텔라 역에는 연극 <억울한 여자>의 이지하가, 스텔라의 남편이자 폴란드 출신의 난폭한 노동자인 스탠리 역은 뮤지컬 배우로 유명한 이석준이 맡았다. 5월 23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문의 02-766-6007)
  • 201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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