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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

미실 같은 입심과 사자 같은 배포를 가진 ‘라이언 퀸’

‘라이언 킹’. 초원의 지배자 사자는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며 무리의 ‘왕’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착시다. 사자 무리의 실질적인 주인은 암컷이다. 사냥도 암사자, 양육도 암사자의 몫이다. 수컷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다른 무리로부터 새끼와 영역을 지키는 역할뿐이다.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무리는 수사자를 버린다. 암사자는 새로운 수컷을 영입한다.
암사자는 무리를 죽을 때까지 이끌지만, 수사자는 4~5년 단위로 바뀐다.
‘라이언 킹’이라는 단어는 이제 수정돼야 할지도 모른다. ‘라이언 퀸’으로.
고현정은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 역할을 맡아 세간의 화제를 일으켰다. 후일 신라의 선덕여왕이 되는 공주 덕만과 정치적 대결을 펼치는 인물이다. 덕만이 근대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면, 미실은 중세의 이상적 군주상을 대변한다. “군주는 무릇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던 ‘군주론’의 주창자이자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화신 같은 정치가다.

고현정은 미실 같은 입심과 사자 같은 배포를 가진 여배우다. 비유를 허락한다면 ‘라이언 퀸’의 풍모를 지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소수는 아닌 것 같다. 재미있는 뒷얘기 한 토막. 한 유명 영화감독이 후배 감독을 만난 술자리였다. 둘 모두 남자였다. 선배가 대뜸 “고현정은 웬만한 남자보다 낫다, 너보다 낫다”고 말했다. 후배가 발끈했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대들면서 취중 농담은 꽤 목소리가 커진 취중 언쟁으로 번졌다. 어느 누가 고현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느냐마는, 누구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중 하나는 바로 그것,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이나 기세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희고 고운 피부다. 적어도 1m까지의 근접 촬영에서 그녀의 피부는 10대의 것인지, 20대의 것인지 분별키 어렵다. 그녀는 18세에 미스코리아 선으로 당선됐고 19세에 TV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고정 출연으로 본격적인 배우 경력을 시작했으며 24세에 결혼했고 32세에 이혼했다. 그리고 지금 서른 여덟 살이다.


“재혼 할 생각은 없다, 단 이 시간까지”

지난 12월 10일 개봉한 영화 <여배우들>의 상영을 즈음해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고현정을 만났다. 짙은 검정의 말쑥한 스커트 정장차림이었다. 〈여배우들〉은 한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차 한자리에 모인 6명의 여배우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담은 작품이다. 윤여정(62), 이미숙(49), 최지우(34), 김민희(27), 김옥빈(23) 등 60대부터 20대까지 각 세대의 대표적인 톱스타 여배우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가짜 다큐멘터리, 가상적인 상황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촬영해 실제와 허구의 혼돈을 유발하는 영화 형식)이자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리얼리티 쇼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여배우를 상징하는 일종의 표제어를 가졌다. 윤여정은 ‘프라이드’(자부심), 이미숙은 ‘미스터리’(비밀), 최지우는 ‘페임’(명성), 김민희는 ‘젤러시’(질투), 김옥빈은 ‘콤플렉스’(열등감) 같은 식이다. 고현정은 ‘스캔들’(구설수)이다.

“스캔들이 없는 게 더 우울하지 않나? 그렇지만 (대중이 모르는) 사생활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 알려져 있어요. 후배들한테 이렇게 얘기하곤 해요. 야! 만약 그럴 능력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격리된) 전세기를 타는 건 좋은데, 여러 사람과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는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간첩처럼 숨어서만 살고 싶은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가십도 멀리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 말하는 것 같지만) 진짜 내 사생활은, 내가 혼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얘기 안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도 했다. 일상에 대해서든, 세간의 소문에 대해서든 물은 이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스스럼없이 밝혀 온 고현정이지만, 할 말은 솔직하게 하고 지킬 것은 지킨다는 말이다. 내뱉은 말은 자신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곧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어떤 관계든) 다 가능해요, 다. 하지만 남자친구 따윈 안 만들지. 친구는 쉽게 될 수 없어요. 남자로서 만난다면 몰라도.”

그리고 웃었다. 재혼 의사에 대한 답도 담백하고 단호했다.

“재혼할 생각은 없어요. 단 이 시간까지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죠. (시계를 보며) 지금 오후 4시 59분까지는요.”


돌이켜보면 미스코리아로 화려하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몇 년, 그리고 ‘재벌가의 며느리’로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올린 웨딩마치, 10여 년간의 공백, 이혼 후 컴백까지 고현정은 본의든 타의든 베일에 싸인 톱스타였다. 접근 불가능한 세계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현정은 ‘현실’로 돌아왔다. 계기는 강호동의 예능 토크쇼인 〈무릎팍도사〉였다. 당시 출연을 결정하면서 고현정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방법”으로 자신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편하게 살자고 마음먹었죠. 누구나 착한 역할만 할 수 없지 않나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밥값도 못하는 것이고 내가 앞에서 화살을 먼저 맞으면서 최대한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고현정이 말하는 ‘고현정’,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현정’

영화 <여배우들>에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영화 속에서 실명 그대로 등장한 여배우들은 실제 경험을 그대로 인용하고 투영한다. 스포츠신문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흔히 이니셜로 등장하는 가십기사로나 접하던 여배우들의 비화나 말다툼, 신경전 등이 영화에 그대로 담기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여배우 6명의 실제 경험담이나 혹은 루머, 스캔들과 연관이 있다.

“영화에는 몇 퍼센트의 진실, 어느 정도의 사실이 담겼느냐”는 질문에 고현정은 “다 진실일 수도 있고, 다 거짓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정답은 고현정이 영화 속에서 ‘고현정’을 연기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고현정과 극중 인물 ‘고현정’은 스크린의 안과 바깥을 경계로 분명히 구별되지만 물질적으로는 분리 불가능한 존재다. 영화는 여배우의 ‘이혼’을 중요한 테마의 한 가지로 다룬다. 극중 인물 ‘고현정’은 말한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 해도 여배우에게 이혼은 주홍글씨”라며 끝내 눈물을 터뜨린다. 극중 ‘윤여정’은 자신의 이혼 과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이혼하고 나니까 2년 정도는 (TV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TV 경영진이 말하더라”고 20여 년 전을 떠올린다. 극중 ‘이미숙’은 “공인이 뭔데, 이혼이 뭔 죄야?”라고 푸념하다 울컥한다. 심지어 극중 ‘최지우’는 와인에 취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고현정을 향해 “그러니까 (시집에서) 쫓겨났지!”라며 얼굴을 붉힌다. 그럼 스크린 바깥의 고현정은 뭐라고 했을까. 결혼과 이혼으로 인한 10여 년간의 연기 공백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깨지고 부딪히고 힘들고 정신없는 시간이었죠. 아이도 둘 낳고 잠깐 일본에서도 살다 오고, 산후조리도 못할 정도로 지냈으니 여배우로서의 자의식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100% 얻기만 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연기의 자양분이 되겠죠.”

고현정은 “결혼과 이혼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화제가 될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고도 덧붙였다.

고현정은 스스로에 대해선 “엉뚱하다” “또라이 같지만”이라는 표현을 유독 자주 썼다. 자신의 영화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을 같이 한 홍상수 감독이나 〈여배우들〉의 이재용 감독에 대해선 “내 엉뚱함을 즐기시는 듯하다”고 했다. 시쳇말로 ‘4차원다운’ 면모는 배우로서의 자신의 장점을 말할 때 도드라졌다.

“제가 거울을 안 보는 배우 중 하나예요. 왜 안 보느냐면 이거 ‘또라이’ 같은 소리지만, 저는 제 등뼈가 (그물같이 뻗어서) 우주랑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누가 점을 하나 딱 찍어 주기만 하면 정리는 잘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화가 됐든 행복감이 됐든 어떤 점(콘셉트, 주제어)만 찍어 주면 말이죠. 그러니 촬영할 때 거울을 보는 것은 불필요하죠.”

곱씹지 않으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감독이든 누구든 주제어만 제시해 주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감정과 경험, 철학, 감성, 세계관을 재구성해서 하나의 연기로 끄집어 낼 수 있다는 말인 듯싶다. 사람을 만나 어떤 상대인지 알아보는 방법도 독특하다.

“누구든 만나면 노래방 가서 노래를 한번 시켜 봐요. 무조건 애창곡을 불러 보라고. 어떤 음역대를 가졌고,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요. 한번은 기업인을 만났어요. 그런데 혜은이의 ‘열정’을 부르는 거예요.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어, 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로 시작하는 노래요. 웃기지 않아요? 수백억을 만지는 사람인데. 또 왜 모든 노래를 애국가같이 부르는 사람 있죠? 사람도 딱 그렇다니까요. 애창곡에서 안 벗어나요.”

무슨 말끝엔가 “수영복을 입고 세종문화회관에 섰다”는 표현으로 미스코리아 도전 당시를 설명한 고현정. 여고생이던 그때로부터 꼭 20년이 지났고, 고현정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겹겹의 베일을 지나왔다.

그가 기꺼이 감당해 온 비범한 삶의 궤적은 몇몇 드라마와 영화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선덕여왕〉과 〈여배우들〉에서 보여준 다양하고 독보적인 표정들로 아로새겨졌다. 고현정은 비로소 아무런 수식어도 필요 없는 어떤 삶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거나 ‘재벌가의 며느리였다’거나 ‘이혼 후 컴백한’ 같은 꼬리는 사족인. 이제는 ‘고현정은 고현정이다’ 혹은 ‘고현정은 여배우다’라고 불릴 수 있는.

사진 : 김선아・김진구
  • 201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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