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남경주

결혼하고 아빠가 되니 연기도 달라져요

이 남자를 빼고 우리나라 뮤지컬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남경주, 20여 년 간 국내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뮤지컬 배우. 그는 연습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도 그는 인터뷰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숱한 대형 무대에서 집중 조명을 받아 온 그에게서 의외의 면면이 튀어나왔다. 커버 촬영을 위해 가벼운 메이크업을 한 그는 “내 얼굴이 아닌 것 같다”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고, 쑥스럽다며 사진 촬영 현장에서 사진기자 외에 다른 사람들을 물렸다.

뮤지컬 <아이러브유>
3월 6일~9월 13일, KT&G 상상아트홀(02-501-7888)
남경주 주연의 뮤지컬 〈아이 러브 유〉가 또다시 공연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아이 러브 유>는 1994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100~499석 규모의 무대)에서 초연된 후 12개국 언어로 5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된 작품. 2004년 국내에 초연돼 2년 6개월 동안 흥행 행진을 이어가며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지난 3월 6일 재공연을 시작한 후 다시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 전날인 3월 31일, 기자는 이 작품을 30대, 40대, 60대 지인들과 함께 봤다.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트기까지, 남녀 간 차이에서 오는 갈등, 결혼과 육아, 이혼과 사별 등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 20개를 옴니버스 형태로 엮은 이 작품은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주면서도 웃음을 안겼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을 분출하며 군대와 축구 이야기에 흥분하는 남자를 ‘참아 내는’ 여자, 살림과 육아에 지쳐 잠자리 한 번 갖기 어려운 부부, 끝없이 쇼핑을 해 대는 여자를 따라다니느라 지친 남자 등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음직한 상황을 짜임새 있게 재현한 무대는 세대를 망라해 순간순간 웃음을 자아냈다. ‘롱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뮤지컬. 그 중심에는 무대 전체를 흡인력 있게 이끄는 남경주가 있었다.

〈시카고〉 〈에비타〉 〈킹 앤 아이〉 〈레미제라블〉〈가스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가씨와 건달들〉 등 수많은 뮤지컬에서 주역을 맡은 남경주. 그는 가장 애착이 가는 뮤지컬로 서슴없이 〈아이 러브 유〉를 꼽는다. 한 작품에 600회 이상 출연해 단일공연 단일배역 최장 공연기록을 세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연계에는 ‘〈아이 러브 유〉가 남경주를 결혼시켰다’는 말이 있다. 2005년 이 작품을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지금의 아내에게 공개 프러포즈를 했고, 결혼에 골인했다. 인터뷰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 후 달라진 그의 삶과 연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에게 먼저 3년 전 <아이 러브 유>를 할 때와 지금 연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물었다.

“3년 동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도 했고,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어요. 그런 것들이 작품에 녹아나는 거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아이가 주는 행복감이 뭔지를 알게 됐죠. 예전에는 상상하며 연기하던 대목이 지금은 절절하게 와 닿아요.”

결혼 4년차에 접어든 그는 “사랑에 대한 관념 자체가 달라졌다”며 “이전에는 사랑을 그저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정한 사랑이란 인내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배려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20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와 닿는 스토리로 ‘애를 키우다 보니’를 뽑았다. 곰돌이 모자를 쓰고 혀 짧은 발음을 하면서 아이가 깰까 봐 노심초사하는 아빠. 객석에서 큰 웃음이 터진 장면이다.

그에겐 11개월 된 딸 고은이가 있다. 딸이 예쁘냐고 묻자, “예쁜 정도가 아니에요. 미치겠어요. 기적 같아요”라며 “둘째도 계획하고 있는데, 가능하면 셋째까지 낳고 싶다”고 말한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에는 하루 종일 고은이와 놀아 주려 노력한다고.

600회 넘게 같은 공연을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그는 연습할 때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내가 왜 여기 있나’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공연에 임한다고 한다. 아무리 반복해서 공연해도 “끝나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아 속상하다”고 털어놓는다.

남경주는 서울예전 연극과 재학 중인 1984년 뮤지컬 <성춘향>으로 데뷔했다. 그때부터 25년간 뮤지컬을 했으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뮤지컬 배우로 산 셈이다. 그에게는 예술가의 DNA가 뼛속 깊이 각인돼 있다. 뮤지컬 배우로 유명한 형 남경읍 씨 외에도 가족들이 거의 모두 예술가(아버지는 서예가, 작은형은 공예가, 동생은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다시 태어나면 뮤지컬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면서 “음악가나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고 한다. 예술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배우보다 먼저 인간이 돼라’며 후배 교육

여섯 살 위의 형 남경읍은 그에게 선배이자 스승이자 가장 좋은 친구다.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꿈도 그의 형이 심어 줬다. 유난히 그를 예뻐한 남경읍은 그를 어릴 때부터 자주 업고 다녔고, 그도 형을 잘 따랐다. 남경읍이 서울예전에 입학할 때 그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이때부터 남경주는 형의 학교를 모교처럼 따라다녔고, 형이 동랑레퍼토리극단에서 〈유리 동물원〉 〈하멸 태자〉 등을 공연할 때는 극단 식구처럼 지냈다. 형을 따라 그도 서울예전에 입학했다.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가 균형감각을 갖게 된 것도 형 덕분이었다. 그는 “어록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형은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고 회상했다.

한때는 ‘남경읍 동생 남경주’였지만 이제는 위상이 바뀌었다. ‘남경주 형 남경읍’으로 통한다. 남경읍은 최근 무대 전면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뮤지컬에서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조승우나 박건형, 서범석, 황정민, 오만석 등이 남경읍 사단이다.

남경주는 노래, 연기, 춤의 삼박자를 두루 갖췄다. 초등학교 때 기계체조를 배워 유연성이 뛰어나고, 어린 시절부터 갖가지 얼굴 표정을 짓는 ‘인상파’였던 덕분에 얼굴 소근육이 발달해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눈・코・입・눈썹 근육이 자유자재로 움직여 영화 <마스크>의 짐 캐리를 연상케 한다. 그는 인터뷰할 때도 그랬다. 어떤 질문이든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답하면서, 표정 역시 다이내믹했다.

<아이 러브 유> 관련 사진들. ‘애를 키우다 보니’ 신에서 그는 실감나는 연기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아래)
20년 이상 최고의 뮤지컬 배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이지만 ‘스타’라는 수식어를 과분해했다.

“‘성공했다, 스타다’라는 건 남들이 인정해 주는 거잖아요. 그건 저를 잘 모르면서 겉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 것에 비해 과하게 평가해 주시는 것 같아요. 남들은 제가 열심히 살았다고 하지만, 저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요.”

여섯 살 위의 형 남경읍과. 남경읍은 최근 후진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남경주는 ‘연습벌레’, ‘완벽주의자’로 소문나 있다. 늘 연습장에 가장 먼저 나오고, 연습할 때마다 실제 공연처럼 최선을 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연습이 공연보다 더 중요해요. 무대에 올라가면 어떻게든 가게 돼 있어요. 관객이 도와주는 측면도 있고요. 연습할 때 모든 걸 다 해결하고 올라가야 해요. 연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대에 오르면 밀도 있는 좋은 공연이 나오기 어렵죠.”

그는 “최근 뮤지컬계에 진출한 대중 가수들은 바빠서 연습을 제대로 못 한다”면서 “연습이 부족하면 하모니가 깨지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공연이 나오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말이 나온 김에 대중가수들의 뮤지컬 진출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예전 인터뷰할 때는 강도 높게 비판했어요. 요즘 그 기사를 보면 후회해요. 발레리나나 오페라 가수, 클래식 전문가는 쉽게 넘보지 못하는데 왜 유독 뮤지컬 배우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를 고민해 봤어요. 그만큼 뮤지컬하는 사람이 우습게 보였던 거죠. 발레리나는 힘들어 보이니까 아무나 도전할 엄두를 못 내잖아요. 뮤지컬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보다 더 치열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쉬워 보여서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 우리 잘못이죠. 결론적으로 그 친구들(뮤지컬을 하는 연예인들)이 안타까워요. 훈련이 안 된 친구들이 뮤지컬에서 자신의 진심과 생각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본인의 한계를 스스로 노출하는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죠.”

배우 박상원과 그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두 사람은 ‘박앤남 공연제작소’ 공동 이사로 있다. 사진은 12년 전 KBS 2TV <밤의 이야기쇼> 출연 당시.
그의 연기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팬들은 요즘 그의 연기에 대해 “날카로움이 가시고 여유와 원숙미가 흐른다”고 평가한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연기 같지 않다. <아이 러브 유>에서 15개의 서로 다른 캐릭터가 남경주에 녹아들어서 그 캐릭터가 남경주인지, 남경주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래서 열심히 연기하는 게 보이는 다른 배우와 함께 무대에 서면 “슬렁슬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도 받는다.

“제가 추구하는 연기가 바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예요. 그렇게 봐 주시면 감사하죠. 자연스러운 게 참 쉽지 않아요. 저의 생각과 살아온 이력 등이 캐릭터에 잘 녹아서 그게 이 캐릭터인지 남경주인지 묘한 경계선에서 연기할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요?”

나이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남경주. “예전에는 스타를 꿈꿨는데, 이제는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고, 예전에는 혼자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여럿이 함께 가는 방법을 찾는다”고 말한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그는 최정원, 옥주현, 배해선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그래서 그는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소외 아동을 대상으로 뮤지컬 수업을 하는 ‘해피 뮤지컬’을 운영하는가 하면, 후배들을 위해 비공식 스터디 그룹을 조직했다. 기본기부터 배우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뮤지컬 배우 10명 이상을 모아 가르치는데 수강료는 없다. 여기에서 그가 강요하는 건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것이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떳떳해야 진실한 연기가 나온다고 강조해요. 양심에 부끄러운 게 많은 배우가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진심을 담아 연기할 수 있겠어요? 저도 한때 양심에 부끄러운 행동 때문에 관객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혼한 후 진실된 삶을 살면서 진실된 삶이 녹아나는 연기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우리 모임의 가장 큰 변화는 100% 금연했다는 겁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잠을 많이 잘 수 있겠느냐, 백해무익한 담배를 피울 수 있겠느냐고 다그쳐요.”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서열이 엄격한 공연계에서 그는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교주 수준이다. 실제로 그의 후배들이 농반으로 ‘남경주교’라 한다고. 담배를 끊고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그는 독서광이 됐다. 인문, 철학서를 주로 읽는데, 최근엔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과 박이문 교수의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읽었다고 한다.

점점 대중화되는 뮤지컬 시장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뮤지컬을 즐기는 인구가 는다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그만큼 진정성은 희박해졌다고. 그는 “1980년대 초반에는 1년에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 10편도 안 됐지만, 그때 관객이 훨씬 진지했다”고 회상했다.

뮤지컬 <남자 넌센스>에서 열연 중인 남경주(뒷줄 왼쪽이 남경주).
한때 ‘원조 꽃미남 배우’로서 열성 팬들을 숱하게 거느린 그이지만 이제 서서히 그 자리를 후배들에게 내주면서 세월의 무게를 절감한다. 세월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빼앗는 대신, 내면이 빛나는 배우로 다져 내고 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잔주름이 많았고, 볼과 눈두덩은 푹 꺼졌다. 성형 유혹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왜요. 많이 느끼죠. 하지만 자연스러운 게 아름다운 것 같아요. 나이 들어 생긴 주름은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잖아요.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과 소의 등골이 살아온 세월을 조용히 시사하지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늙어 가고 싶어요.”

사진 : 이창주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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