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로의 결혼〉 수잔나로 돌아온 소프라노 신영옥

무대에 서면 10대 소녀가 되지요

오페라 가수의 시계는 더디 가나 보다. 숙소인 W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맨 얼굴로 기자 일행을 맞은 신영옥은 노화를 잊은 만년 소녀 같았다. 마흔 여덟, 쉰 나이를 목전에 둔 그의 우윳빛 피부는 주름 없이 탱탱했고, 나풀거리는 동작은 고무줄놀이하는 소녀를 연상케 했다. 최근까지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10대의 줄리엣 역을 맡은 그의 연기는 그저 연기가 아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신영옥.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이하 메트)를 중심으로 유럽과 일본, 싱가포르 등 세계 무대를 누비는 그가 이번에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로 돌아왔다.

2003년 <리골레토> 이후 6년 만에 서는 국내 오페라 무대다. 이번 공연은 200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신작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젊은 오페라 연출가 데이비드 맥비커가 연출했다. 이 공연 DVD는 영국의 대표적 클래식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이 선정한 ‘2008년 최고의 DVD’에 뽑혔다. 알마비바 백작 역의 바리톤 윤형, 케루비노 역의 카운터테너 이동규 등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성악가 중심으로 짜인 이번 팀이 맥비커의 섬세한 연출을 표현해 낼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 공연 1주일 전에 만난 신영옥은 아버지 이야기부터 꺼냈다.

“아버지가 사시는 워커힐 아파트에서 가까워서 숙소를 이곳으로 정했어요. 올해 78세이신데, 막내딸인 저만 기다리시거든요. 아직도 저를 ‘이쁜이’라고 부르세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오페라 연습을 하고 끝나자마자 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러 가요. 아버지가 가서 자라고 할 때까지 함께 있는 거예요.”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투자해서 오페라 무대를 만드는 메트로폴리탄은 성악가에게 꿈의 무대다. 신영옥은 1990년 메트 소속 오페라 가수를 뽑는 오디션에 출전, 3000여 명의 경쟁자 중 우승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도미, 줄리어드음대와 대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줄리어드 음대 부속기관인 아메리카 오페라센터에서 풀 스칼라십을 받은 후 거머쥔 트로피다. 이후 신영옥이 걸어온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의 활약상을 일일이 열거하는 건 숨차다.

<리골레토>의 질다, <돈조반니>의 체를리나, <투란도트>의 리우,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가면무도회>의 오스카 등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가 할 수 있는 주인공 역은 거의 다 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라본 바르가스, 롤란도 비야손,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적 남성 성악가들과 한무대에서 호흡을 맞췄다. 특히 호세 카레라스가 자신의 갈라 콘서트에 신영옥을 초청했을 때는, ‘호세는 하락하고 신영옥은 부상한다’는 신문 평이 나왔을 만큼 신영옥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리골레토>에서 질다 역.
20년 전 오페라 가수 데뷔가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이었고, 선화예중 시절 이 오페라의 ‘백작부인의 아리아’를 불렀는데요. 20년 만에 같은 역할을 맡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줄리어드를 졸업하던 1986년에도 <피가로의 결혼>에서 주인공을 맡았어요. 이 작품과 인연이 많네요. 줄리어드에서 연습할 때 많이 울었어요. 수잔나는 발랄한 역할인데, 수동적으로 생활하던 한국 생활이 몸에 배서 말괄량이 역할이 안 됐어요. 오페라 지휘자가 액팅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준 게 많은 도움이 됐지요.

오페라는 노래뿐 아니라 연기와 춤도 중요합니다. <리골레토> 연출자 사발은 당신의 연기를 “마치 새가 날아다니는 것같이 날렵하다”고 평했더군요. 리틀엔젤스 어린이 예술단에서 배운 무용이 무대 표현력에 도움이 됐나요.

큰 도움이 됐어요. 원래 무용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반대로 접었죠. 무용하면서 무섭게 훈련받고, 단체 생활을 배웠어요. 그런 태도가 몸에 배었어요. 데뷔 당시만 해도 날씬한 오페라 가수가 많지 않아서 저를 신기해했죠.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도 잘했어요. 무슨 일이든 시키면 쥐같이 날렵하게 했죠. 그러다 보니 신체 표현의 비중이 어려운 역할을 많이 맡았고, 그것 때문에 발이 이렇게 됐어요(신영옥은 엄지발가락 아랫부분의 뼈가 심하게 튀어나와 있다).

20년 전 수잔나와 비교해 달라진 게 있다면 뭔가요.

이제까지 수잔나 역을 수십 번 했어요. 지금은 더 능청스러워졌죠. 피가로와 키스하는 장면도 많은데, 이제는 배역에 몰입돼서 사적인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아요.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코벤트 가든의 <리골레토>에서 테너 프란시스코 아라이자와 함께.
20년 전에는 수잔나의 나이였지만 지금은 결혼을 앞둔 수잔나 역할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나이인데, 어려움은 없나요.

외국 사람들은 나이의 감이 없어요. 외국에서 공연하면 역할과 제가 잘 어울린다고 해요. 얼마 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할 때도 한국 기자만 나이에 비해 무리가 아니냐고 물었어요. 분장하고 큰 무대에서 하는 거니까 나이보다 목소리와 연기력이 중요해요. 제가 세 자매 중 막내인데다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애교가 많아요. 아버지와 강아지한테 이야기할 때 특히 애교가 철철 넘치죠. 강한 면도 많지만 어린아이같은 면이 있어요. 이 나이에 수잔나 역을 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답니다(웃음).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가면 무도회>에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신영옥은 한국인 주역 성악가로는 유일하게 세계 3대 테너(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모두와 공연했다.
이번 공연에서 피가로를 맡은 조르지오 카오두로가 1979년생이니 18세 연하네요,

그래요? 몰랐어요. 상대역으로 함께 호흡하다 보면 나이는 전혀 의식되지 않아요.

배우 중에는 배역에 몰입돼서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당신은 어떤가요.

다른 배역은 괜찮았는데 <루치아>의 루치아 역은 힘들었어요. 피 묻히고 칼 들고 나와서 노래하는 배역이잖아요. 루치아를 할 때마다 병이 나고 돌아가신 엄마가 꿈에 나타났어요. 저도 모르게 일상에서도 영화〈사탄의 인형〉 처키처럼 되더라고요(그는 이때 처키 표정을 그대로 흉내 냈다). 모차르트 작품을 하면 기뻐요. 밝은 에너지가 평소에도 이어지죠. 이 작품의 수잔나는 똑똑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캐릭터이다 보니 즐거워요. 오페라를 할수록 모차르트는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쉼표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죠.

연출자 데이비드 맥비커는 보수적인 영국 오페라계에서 파격적인 연출을 해서 ‘악동’, ‘이단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동성애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맥비커 버전 <피가로의 결혼>의 특징은 뭔가요.

정교해요. 스토리를 더 깊게 파고들면서 젊은 연출가답게 현대인에 맞게 재조명하죠. 전통을 이으면서 현대적 요소를 많이 가미했어요. 키스신도 많고, 성적인 표현의 강도가 세요. 수잔나 의상도 다른 버전에서는 하녀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아이보리색의 예쁜 드레스죠.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을 골탕 먹이기 위해 백작 부인과 옷을 바꿔입고 열창하는 신영옥.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세계 무대에서의 당신 위상이 한국에는 덜 알려졌다고 느꼈어요. 인터뷰를 많이 하지 않아서 노출 빈도가 적다 보니 조수미, 장한나, 장영주 등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에 비해 친근감이 덜하다고 할까요.

저는 연습이 가장 중요해요. 연습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좋아요. 집중하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해요. 오전 연습에 열정을 쏟고 혼자 점심 먹으면서 고요한 시간을 가지죠. 늘 짐이 많아요. 발 지압을 위한 대나무, 둥굴레차와 물, 휴지와 물수건, 당분 많은 초콜릿을 가지고 다니죠.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무대뿐 아니라 다양한 공간에서 국내 팬과 자주 소통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2006년 이전에는 한국에 매니지먼트사가 없다 보니 국내 팬들에게 소식을 전할 기회가 적었어요. 뭘 할 때 떠벌리는 스타일도 아니거든요. 최근 1~2년 동안은 인터뷰를 꽤 한 편인데, 신경이 예민할 때 인터뷰가 잡혀 있으면 취소도 많이 했어요. 최근에는 국내 팬들에게 많이 노출되기 위해 노력하죠.

세계적인 남자 성악가들과 호흡을 맞추셨는데요.
<사랑의 묘약>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상대역 오스카에 당신을 기용해 줄 것을 메트 쪽에 강력히 요청도 했고요. 공연을 통해 만난 음악가들과 개인적 친분도 있나요.


일로만 프로페셔널하게 대하고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않아요. 그것 때문에 섭섭해하는 사람이 많죠. 오페라 팀들과는 식구처럼 뭉쳐 리허설을 하는데, 연습 후에도 그 인연을 유지하기는 벅차요. 보통 때는 패션, 미술 등 전혀 다른 분야의 친구들을 주로 만나요.



리틀엔젤스 어린이 예술단 활동 당시. 신영옥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노래 잘하고 무용도 잘하는 어린이’를 뽑는 리틀엔젤스 어린이 예술단에 발탁돼 4년간 해외 공연을 다녔다.
일찌감치 정상에 올라서 생활에 제약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도 편히 못 다니고, 연인이 생기면 팔짱 끼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어려울 텐데,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은 없나요.

별로요. 처음 3년간은 힘들어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레슨 선생님이 “수녀라 생각하고 노래에만 집중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언제부턴가 이런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해외 공연이 끝나면 집에 가서 머리에 하트, 별 모양 등 작고 예쁜 핀을 잔뜩 꽂거나 삐삐처럼 머리를 묶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한국 채널을 틀면 최고의 파라다이스예요. 한국에 온 것같이 편하죠. 그 기쁨은 말로 못 해요.

당신의 목소리에 찬사가 많습니다. ‘플루트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맑고 청아한 소리’, ‘유럽의 정통 성악가를 기억나게 하는 소리’, ‘섬세하고 미려한 나이팅게일 음색’,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놀라울 만큼 편안한 목소리’ 등. 이제껏 들은 찬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표현은 뭔가요.

프랑스에서 모차르트의 <양치기 임금님> 주인공을 맡았을 때가 기억나네요. 천천히 실같이 뽑아내야 하는 노래였는데 관객들이 “숨을 쉴 수 없었다”고 했어요. 와~그땐 정말 박수가 안 끊겼죠. 컨디션이 좋으면 크리스털 같은 소리가 나와요. 어떤 분은 가늘지만 같은 굵기로 멀리 퍼져나가는 레이저 컷 같다고도 해요.



3월 6일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로 열연 중인 신영옥. 시동 케루비노 역의 카운터테너 이동규(위)와, 피가로와의 결혼식 직후(아래).
<피가로의 결혼> 공연 오픈 하루 전인 3월 5일, 전막을 공연하는 오픈 리허설을 관람했다. 거의 전 장면에 출연해 무대 이 끝에서 저 끝을 발랄하게 누비는 신영옥은 생기 발랄한 처녀 수잔나 그 자체였다. 재개관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미려한 목소리는 꿈결처럼 혼몽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무엇보다 그가 아름다운 건, 리허설이라고 목을 아끼는 배우들이 있는 가운데 매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이상아 인턴 기자
사진 : 이창주
헤어 : 선영 헤어스타일리스트(이희)

오페라 < 피가로의 결혼>
3월 6, 8, 10, 12, 1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 200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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