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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적 모델 한혜진

세계 무대를주름잡는도도한매력

사진 이창주
열일곱 살에 데뷔, 9년째 패션모델로 활동 중인 한혜진(25세). 그는 최근 뉴욕 컬렉션 무대에 가장 많이 선 동양 모델이다. 2006년에 뉴욕 무대에 데뷔한 이후 뉴욕.밀라노.파리 컬렉션을 누비며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샤넬, 루이비통, 안나수이, 조르지오 아르마니, 비비안 웨스트우드, 페라가모 등 내로라하는 거의 모든 명품 브랜드 무대에 섰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안나수이 쇼에서는 모델로서 가장 주목받는 피날레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동양 모델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미국의 대표 모델 에이전시 ‘마릴린 에이전시’에 소속해 활동하는 그는 지난 시즌 이 에이전시에서 가장 많이 활동한 모델이다. 세계 톱모델 순위 7위인 브라질 출신의 캐롤린 트렌티니보다 앞섰다.

그가 3월 중순에서 4월 초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케라시스 샴푸 CF 촬영과 ‘구호 컬렉션’ 무대에 서기 위해서다. 그는 빼곡한 일정 때문인지 조금 지쳐 보였다. “어제 ‘I AM A MODEL’ 팀(케이블 TV Mnet의 모델 육성 프로그램)과 술 한잔해서 컨디션이 별로예요. 이해해 주세요”라며 가볍게 웃는다.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파이면서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묘한 미소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디자이너 두리정의 진보라색 블라우스에 스키니 진을 입고, 미스식스티의 진회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나타난 한혜진. 높이 13cm 굽의 구두를 신어 키가 190cm가 넘었다. 스텝을 밟으니 생머리가 찰랑찰랑 리드미컬하게 흩날렸다. “헤어트리트먼트를 자주 받나 봐요” 하자, 그는 “아니요. 생머리예요. 파마나 트리트먼트 같은 건 안 해요. 머리 감자마자 드라이어로 말리지도 않고 바로 나왔어요”라고 답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자 그의 눈빛은 대번에 달라진다. 그 무엇도 거칠 것 없는 듯한 도도하고 당당한 눈빛. 때론 카메라를 집어삼킬 듯 매섭게, 때론 밀애를 나누듯 격정적인 눈빛으로 렌즈를 응시했다. 1차 촬영을 끝내고 그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에는 그의 한국 소속사인 에스팀의 김지영 실장도 동석했다.

자신감에 찬 표정이네요.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모델은 만들어지는 거예요. 최고의 전문가가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을 해주고 최고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데, 안 예쁘고 안 멋지면 그건 말이 안 되죠.”

콤플렉스는 없나요?

“무척 많죠. 너무 말랐고, 토끼 이빨에, 눈도 너무 찢어지고, 입술도 들렸고, 코도 매부리코. 일단 마르고 젓가락 같은 체형이 불만이에요.”

그가 열거한 콤플렉스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서양 무대에서 먹히게 하는 ‘한혜진만의 매력’이었다.

그 수식 하나하나가 자신을 빛나게 한다는 걸 알죠?

“하하하.” 경쾌한 동의의 웃음이었다. 목소리와 외모가 잘 매치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붕 뜬 하이 톤에 약간 허스키한 음성, 도도하면서도 자신감이 배어 나오는 음성이다.

외국 무대와 한국 무대의 가장 큰 차이는 뭔가요?

“뉴욕에서는 모델의 컨디션을 많이 배려하는데 한국에서는 웨이팅 시간이 너무 길어요. 저녁 쇼를 하는데 아침 10시부터 불러서 하루 종일 리허설을 해요. 그래서 정작 쇼 타임에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할 수가 없어요. 뉴욕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을 다 보상해 주기 때문에 기다려도 불만이 없거든요.”

그는 폭발할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한국 패션계의 폐단이에요. 이런 질문을 해주면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해서라도 한국 패션계의 폐단에 대해 지적하고 싶어요. 이 부분 꼭 써주세요.”


“무대 밖에서는 주목받기 싫어요”

밖에서도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데, 부담스럽지 않나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게 싫어요. 무대 위에 설 때 말고는 촬영할 때에도 사람들이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러니하네요. 모델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직업인데.

“성격이 나쁜 거죠. ‘뭘 봐’ 하는 마음.”

무대에 서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음식 맛은 표현할 수 있지만 무대 위에 섰을 때의 기분을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거예요. 플래시는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고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는 순간, 정말 뜨거워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보는 것 같아요. 몸으로 느껴지지요. 누군가가 내 뒤통수만 봐도 느낌이 오잖아요. 수천 명이 한 사람만 쳐다본다고 상상해 보세요. 소름이 좍 끼치죠.”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와 비슷한 느낌일까요?

“모델이 무대 위에 서는 시간은 10초밖에 안 돼요. 그 짧은 시간에 가장 강하게 나를 어필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모습을 남겨야 해요. 모든 에너지를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해야 하는 직업은 모델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쇼는?

“이번 시즌 루이비통도 괜찮았고요, 샤넬쇼는 할 때마다 입은 옷을 모두 사고 싶어요. 한 벌 한 벌 너무 탐나요.”

패션모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요?

“우선 신체 조건이 좋아야 해요. 유니크한 얼굴이라면 더 좋겠죠. 근성도 있어야 하고. 트렌드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킬 줄도 알아야 해요.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정하는 게 중요하지요.”

잠시 인터뷰를 중단하고 2차 촬영을 개시했다. 한참 후 한혜진의 얼굴에 냉기가 서렸다. “얼마나 더 남았죠? 저는 이렇게 촬영을 많이 하는 줄 모르고 준비를 많이 안 했는데”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또 ‘언제가 가장 힘드냐’,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냐’, ‘휴일엔 뭘 하냐’는 뻔한 질문을 던지면 “다른 인터뷰와 비슷한 질문이 많네요”라며 목소리가 냉랭해진다.

그게 한혜진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까칠하다’고 표현한다. 동석한 김지영 실장은 그를 ‘모델계의 오승아(드라마 <온에어>에서 김하늘 분)’라고 했다. 호불호 분명하고, 마음에 안 맞는 스태프들과는 일을 안 하려 한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다. 이 별명에 대해 한혜진 본인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프로다. 무대 밖에서는 컨디션이 안 좋고,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는 백팔십도 달라진다.

“일하는 순간에는 제 모든 에너지를 쏟아요. 쇼를 하는 순간에는 완전히 몰입하고 정말 집중하지요. 워킹의 순간을 즐기고, 클라이언트의 기대에 부합하려고 최선을 다해요.”

부족함 없는 환경과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는 어머니 밑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한 그가 뉴욕에 첫발을 디딘 후의 생활을 털어놓았다.

“항상 혼자 방을 썼는데 뉴욕에 가자마자 브라질 모델 9명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했지요. 어린 모델들이 새벽 4~5시까지 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 잘 때가 많았어요. 원래 이런 건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어요.”

적응력이 뛰어난 것 같네요.

“타이트한 생활을 해도 사고방식은 여유로워요. 사소한 것에 울고웃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나중에 아파트로 옮겼는데 역시 저만의 공간은 없었어요. 지금은 타운하우스에서 미국인, 영국인 모델과 함께 살아요. 방은 혼자 쓰고요.”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혼자 살면 되지 않나요?

“안 그래도 외로운데 또 외롭게 살라고요? 저는 늘 외로웠어요. 너무 일찍 모델 일을 시작해서 고등학교 내내, 대학생이 되어서도 혼자였어요. 혼자 살면 영어가 안 늘기도 하고요.”

한혜진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7세에 패션쇼 무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출전했다가 예선 탈락했는데,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소연 씨(현재 에스팀 모델 대표)가 그의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스카우트한 것. 다른 심사위원들은 그의 동양적인 마스크에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김소연 대표는 세계 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그때부터 9년간, 한혜진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래서 그에겐 꿈 많은 여고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 동덕여대 모델학과에 입학해서도 일이 너무 많아 학교 수업은 거의 듣지 못하고 “시험 보러 갈 시간조차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고 한다.


그런 걸 감수하면서도 왜 굳이 모델이 되고 싶었나요?
“저는 모델에 대해 꿈꾼 적이 없어요. 패션 잡지가 있다는 것도 제가 나온 잡지를 보고 처음 알았으니까요. 모든 게 우연처럼 맞아떨어진 거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많이 했죠. 힘들고 외로웠으니까.”

모든 일을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얘기하네요.

“조금 이따 울 거예요.”

잠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리는데 울컥한 듯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한혜진이 샤넬 컬렉션에서 세계적인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워킹하는 모습을 인터넷 동영상으로 봤다. 당당하고 도도했다.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그 어떤 모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그때 예상했다. 무대 위와 무대 밖의 모습이 딴판이 아니라면 실제 만났을 때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들은 까칠한 게 더 매력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평소의 도도한 성격과 무대 위의 눈빛이 일치하네요. 나이가 들어서 부드러워지면 지금의 분위기는 안 날 것 같아요.

“하하하. 생각을 안 한 부분인데, 맞는 것 같네요.”

모델은 수명이 짧은 직업인데, 나이 들어도 계속 무대에 서고 싶나요?

“안 하고 싶죠.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도 완벽하지 않은데, 늙어서 쭈글쭈글해지면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다른 연륜 있는 모델들이 활동하는 모습은 보기 좋은데, 저는 그 나이가 되면 안 할 것 같아요.”

그럼 뭘 할 건가요??

“패션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할 것 같아요.”

그게 뭐죠?

“전업주부.”

그는 이제까지 중 가장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요, 그때가 되면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을 것 같아요. 너무너무너무요.”

뉴욕의 다른 모델들이 연애하거나 술 마시고 노느라 바쁠 때, 그는 방 안에 콕 박혀 한국 서점에서 사온 책을 읽는다고 한다. 편안하면서도 메시지가 담긴 소설을 좋아해 파울로 코엘료 소설은 거의 다 읽었다며 “요즘 나온 《포르토벨로의 마녀》도 재미있던 걸요”라고 덧붙인다. 기자가 소설 몇 권을 추천하자 “저는 책 추천해 주는 사람 너무 좋아요” 하며 두꺼운 수첩을 꺼내 메모하는 그. 세계적인 한국 모델 한혜진의 또 다른 모습이다.
  • 2008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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