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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나인〉으로 무대에 돌아온 연기파 배우 황정민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릴 것 처음처럼

사진제공 : 오디뮤지컬컴퍼니
오랜만에 무대에 선 황정민을 봤다. 뮤지컬 〈나인〉에서다. 그를 연극 무대 시절, 이를테면 〈지하철 1호선〉 때부터 봤다면 모르겠지만 스크린에서의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무대 위 황정민을 마주하는 느낌은 기묘하다. 발 없는 공중의 벽에 영사된 황정민은 무게와 부피를 갖지 않은 투명하고 영속한 존재이지만 무대에 발 딛고 선 황정민은 거친 숨소리를 뱉어 내는 몸뚱이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피곤함에 전 촬영현장의 공기를 맡을 수 없지만 공연장의 객석에는 고된 훈련의 시간을 응집시킨 육체의 떨림과 땀내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대에 있으면 배우의 모든 에너지가 관객에게 직접 전달되고 관객들의 반응도 곧바로 돌아와요. 정말 귀한 느낌이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2시간 30분 동안 탱탱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니까요.”

오랫동안 단련한 발성과 반응, 조건반사하듯 길든 움직임. 그를 보이지 않게 조종하고 있는 감각의 줄이라도 끊어지면 공포영화에서 총에 맞은 머리가 뇌수를 쏟아내듯 그의 몸뚱이에서 날것 그대로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환희가 무대 위로 터져 흐를 듯하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말이 무대 위 모습에 겹쳐졌다.

“배우는 경주마 같아요. 옆으로 눈 돌리지 못하고 콧바람 내면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왜 뛰고 있나, 어디로 뛰고 있나, 하는 생각은 접어 두고 달려야만 하죠.”

1월 21일부터(3월 2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나인〉은 황정민이 지난 2004년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 4년 만에 서는 뮤지컬 무대다. 〈길〉로 유명한 이탈리아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자전적 영화 〈8과 1/2〉을 각색한 작품이다. 황정민이 맡은 주인공 귀도 콘티니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감독으로 여성편력이 화려한 인물이다. 귀도는 차기작을 위한 예술적 영감이 바닥이 나고 결혼생활도 권태에 빠지자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코자 아내와 함께 베니스의 스파를 찾는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귀도는 자신이 맺어 온 여성들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아내와 어머니는 물론 이혼을 독촉하는 정부와 강압적인 여성 프로듀서, 한때 자신의 뮤즈였던 여배우, 사나운 혹평을 던졌던 여성평론가 등이 스파에까지 따라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귀도를 괴롭힌다.

그곳에서 귀도는 어렵게 신작 촬영에 착수하지만 영화는 현실과 환상이 뒤죽박죽돼 버리고,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여성들마저 모두 떠나 버린다.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생의 막다른 궁지에서 귀도가 마주친 또 다른 자아는 아홉 살에 성장이 멈춰 버린 소년이다.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속을 전전하며 방황하는 1막에서 황정민은 유약하고 불안하며 겁 많은 인물을 보여주지만 2막에서는 넘치는 카리스마와 함께 자기파멸을 향해 가는 외로운 사자 같은 면모로 무대를 지배한다. 공연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황정민이 이 작품을 무대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와 환상,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서 깊이 팬 내면의 상처로부터 고통스럽게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 한 예술가의 초상에서 배우로서 자신의 모습을 언뜻 보았을 터다.



뮤지컬〈나인〉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와 주인공 사이에 비슷한 면이 많다는 걸 느껴요. 주인공이 왜 이렇게 고민하고 소리치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 싶었죠.”

이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1982년 초연됐으며, 2003년 리바이벌 공연에서 할리우드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그해 토니상 최우수 리바이벌 공연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황정민은 TV로 중계된 토니상 시상식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나인〉을 보며 “내가 하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뒤 그에게 작품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나인은 내 운명’이었던 셈이다.

올해로 서른여덟. 배우로는 결코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에 황정민은 이처럼 스크린에서, 무대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1월 31일 개봉한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까지 그는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청춘스타인 적도 없었고, 벼락 같은 스타덤도 없었다. 황정민은 우직하게 한길을 가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른 경우다. 아주 우연히 황정민의 고등학교(계원예고) 후배라는 지인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다. 학교 때부터 유난히 눈에 띄던 선배란다. 마음먹으면 독하게 해내고 스스로에게 엄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했다고 한다. 그는 눈빛이 강렬했던 멋진 선배로 황정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황정민은 사실 영화계 입문 전부터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는 ‘연기 잘하는 배우’로 꽤 알려진 편이었다.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중 하나가 2001년 말 공연된 록뮤지컬 〈토미〉였는데, 자기 속으로 깊이 웅크린 자폐청년 역의 황정민이 보여준 섬세함과 에너지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뮤지컬과 비슷한 시기 개봉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황정민은 이후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등으로 영화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해 나가기 시작했다. 황정민이 영화에 얼굴을 내민 것은 사실 대학로 연극무대보다 빨랐다.



영화〈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영화 오디션에 수십 번씩 떨어지며 도전

“제가 사실은 고3 재학 중인가 재수할 땐가 오디션을 보고 〈장군의 아들〉에 출연했었어요. 우미관 지배인 역할이었는데요, 대사가 딱 한 마디였어요. 지금도 잊지 못해요. 김두한 일행이 우미관에 들이닥치면 ‘마루오카 형사님이 생신이셔서…’라고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물론 무지하게 연습했죠. 그런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까 덜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 마, 마루오카 형, 형사님…’. 계속 더듬으니까 임권택 감독님이 ‘쟤는 뭐야!’라고 불호령 치시던 게 아직도 잊히질 않아요.”

중학교 1학년까지 경남 마산에서 보낸 황정민은 스스로를 “흙을 좋아하고 흙에서 뛰어놀고 자란 촌놈”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는 〈장군의 아들〉에서 호된 맛을 보고 일종의 공포심까지 갖게 됐다. 그래서 〈장군의 아들2〉에서도 단역 출연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다. 이때 〈장군의 아들〉 연출부에는 임상수, 김인식 감독 등 훗날 유명세를 떨친 감독들이 포진해 있었고, 이들과 황정민의 인연은 이어진다.

서울예대에 진학·졸업한 후 김민기가 이끄는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 등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경험을 쌓는 한편, 영화계에 노크 횟수도 늘려 나갔다. 하지만 다시 마음먹고 덤빈 그에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영화주간지에 ‘캐스팅 중’ 혹은 ‘기획 중’이라고 나온 영화목록을 죄다 수첩에 적어 연방 전화하고 오디션을 봤지만 족족 떨어졌다. 그렇게 덤볐다가 오디션에서 고배를 든 작품만 〈친구〉 〈번지점프를 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 수십 편이 넘는다. 그러다 만난 게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영화사로부터 “같이 한번 해보자”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말뜻 그대로 ‘뛸 듯 기뻤다’. 이제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2000년 당시 오디션에서 황정민을 발견한 임순례 감독은 그를 “마치 보석으로 깎기 전의 거친 원석 같았다”고 평했다.

영화〈너는 내 운명〉,〈사생결단〉
황정민은 실생활에서 보면 호들갑이 참 없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연극, 배우 이야기만 나오면 물론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밥상론’ ‘경주마론’처럼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수사도 구사하지만 이 화제를 벗어나면 심드렁하게 대꾸하기 일쑤다. 연극판에서 배고팠던 시절에 대해서 물어보면 역시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연봉 300만 원쯤 됐나. 그래도 다 살게 돼요.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고….”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의 순진한 드러머 강수 역 이후 황정민은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는 이유로 다른 남자배우들이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던 〈로드무비〉와 〈장군의 아들〉 때 연출부 막내였던 임상수 감독을 다시 만나 〈바람난 가족〉을 찍는 등 출연영화 목록을 하나씩 늘려 가며 시끌벅적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황정민’이라는 이름에 무게를 더해 갔고, 그를 주목하는 팬도 늘어났다. 〈바람난 가족〉(2003)을 촬영할 때만 해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생선시장에서 박스에 얼음 채우는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그가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2005년이었다. 〈너는 내 운명〉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천군〉에서는 주연,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등에는 조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특히 〈너는 내 운명〉에서 에이즈 보균자인 술집 접대부를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시골총각 석중의 연기는 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집사람이 영화 보고 나서 딱 나 같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시골총각 ‘석중’이 그의 실제 면모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다. 오직 한 여자(뮤지컬 배우 김미혜)만을 바라보고 10년 열애 끝에 결혼에 이른 것이나, 고등학교 졸업 후 10여 년간 연기 한길을 걸어 온 그는 ‘석중’처럼 투박하리만큼 곧고 우직하다.

황정민은 “배우도 하나의 직업”이란 사실을 강조하곤 하는데, 이것도 다른 스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행보의 근원이다. 황정민은 일부 단편영화를 빼고서도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5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한 해 평균 두 편은 꼬박 촬영한 셈이다. 그 와중에 무대에도 간간히 섰다. ‘돈이 되는’ 대형 해외 합작 영화만을 고집하거나 영화의 작품성보다도 개런티와 스타 이미지 등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가 정작 ‘본업’인 영화나 드라마에는 두문불출, CF에서는 신출귀몰하는 일부 톱스타들과는 프로 근성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지난해 〈시네 21〉에서 조사한 파워 톱 10의 배우 중 2000~2007년 사이에 가장 많은 편수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다. 출연편수로 치자면 송강호가 그와 비슷한 12편이다. 그들은 일 년 내내 어디에선가 반드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의 필모그래프는 죽 이어져 2006년에는 액션느와르 〈사생결단〉을 찍었고 지난해에는 첫 공포영화 〈검은 집〉과 허진호 감독, 임수정과 호흡을 맞춘 멜로영화 〈행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상적인 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의 황정민을 아예 지워 내고 캐릭터만 오롯이 살아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인물에 거리를 두지 않고 캐릭터에서 황정민이라는 사람을 전혀 들춰 내지 않는, 그 역할만으로 존재하는 배우. 아예 저를 비워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생결단〉에서 함께 연기한 배우 류승범이 전한 바에 따르며 황정민은 너무 예민해 콘티와 시나리오를 머리맡에 놓고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고 한다.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꼭 연기노트 한 권씩을 마련해 써내려가는 습관은 유명하다. 배역은 없어도 연습을 놓지 않았다는 무명 연극배우 시절의 모습, ‘초심’ 그대로다.

지난 2006년 황정민을 만나 설왕설래한 일이 떠오른다. 워낙 주목받다 보니 칭찬도 있었지만 실제 “황정민이 변했다는데…”라는 질시 어린 말도 있었다. 황정민은 “찬사도 한 귀로 듣고 비난도 한 귀로 흘려보낸다”며 “실제에서 무뎌질수록 배우로서 더욱 예민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그는 카메라의 초점과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지만 평범한 개인으로서 그는 속에 뜨거운 것을 숨겨 놓고도 다소 숫기 없어 보이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생일파티와 선물을 가장 무서워하고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표현한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다. 하지만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 내는 배우는 드물다. 황정민은 선이든 악이든, 달콤한 꿈이든 악랄한 현실이든 삶의 진정성으로 충만한 단 한 컷을 관객에게 선사할 줄 아는 매혹적인 배우다. 그는 언젠가 사랑에 대해 “변할 수 있고 변하는 거다. 하지만 변해 가는 사랑을 지켜 낼 수 있는 용기가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것은 ‘약속’일 터. 그는 스태프와의 약속, 관객과의 약속, 그리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배우이자 인간이다. 스스로 “지금은 가벼운 느낌”이고 “40대가 되면 진짜 잘할 것 같다”는 그의 다음 몇 년을 또다시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 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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