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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작곡가 진은숙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2악장은 하모니의 스트럭처가 들렸지만 1악장은 글쎄. 피아노를 다루는 게 좀 피상적이야. 텍스처 자체가 얇아. 아무리 어려운 곡도 음악적 목표가 분명하면 연주할 수 있는데. 어떤 악기든 무슨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내는 목표가 분명해야 해. 먼저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 씨(46세)가 작곡가 지망생인 까마득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04년 세계 최고 권위의 현대음악 작곡상인 그라베마이어상 수상, 2005년 아놀드 쇤베르크 작곡상 수상, 2007년 하이델베르크 예술상 수상,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작곡가.

물론 예술가를 상이나 등수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음악적 콧대가 세기로 유명한 유럽에서 조그마한 동양 여자가 이렇게 인정받는다면 그의 재능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스스로 드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실제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 음악 페스티벌과 콘서트 무대에서 자주 연주된다. 그중 소프라노와 앙상블을 위한 <말의 유희>는 15개국의 유명 연주 그룹이 연주했고, 프랑스의 앙상블 엥테르콩탕포렝의 의뢰 작품인 <기계적 환상곡>과 <씨 Xi>,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초연한 <상티카 에카탈라>, 힐리어드 앙상블과 런던 필하모닉을 위한 BBC의 의뢰 작품 <시간의 거울>,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의뢰 작품 <칼라>, LA 오페라의 의뢰 작품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snags & Snarls> 등이 새로운 음악을 기다리는 전 세계 현대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공연으로 그의 오페라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이 초연된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인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였다. 한국 음악가의 작품이 이 극장에 오르기는 1972년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이후 35년 만이었다.

서울시향에서 작곡가 지망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진은숙 씨.
2008년 BBC 프롬스(Proms)에서 초연할 첼로 협주곡을 비롯해 그가 현재 의뢰받아 작곡해야 할 작품이 5년치는 쌓여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매년 두 차례 이상 한국을 찾는다. 상임 작곡가로 있는 서울시향과 함께 일반인에게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아르스 노바(Ars Novaㆍ새로운 예술)>공연과 공개강좌, 작곡 전공 학생들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를 열기 위해서다. 마스터 클래스 참가자 중 두 명을 선발, 학생 작품으로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한다. 11월 1일 서울시향을 찾았을 때, 진은숙 씨는 이번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선발된 학생들에게 그가 유럽에서 작곡활동을 하며 쌓은 노하우를 쏟아 놓고 있었다.

“작곡가가 100% 만족하는 연주는 없어. 베를린 필이 내 곡을 연주할 때는 리허설에도 못 오게 하더라. 리허설 때 2~3분 정도 연주자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내가 이 말을 하면 연주가 바뀔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해.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지.”

그는 삼수 끝에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하기까지 따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가 교회 목사셨는데, “두 살 때 교회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오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피아노에 끌렸던 그는 부모님께 기본 연주법을 배운 뒤 혼자 연습해 초등학생 때부터 결혼식 반주자로 불려 다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 형편에 피아노 레슨을 받는 것은 무리였다.

1993년 <말의 유희>가 초연된 퀸 엘리자베스홀(초록색 원피스 입은 사람이 진은숙 씨).

작곡가는 지옥불로 들어갈 용기 있어야

1996년 파라베타스트링이 초연된 예술의전당(오른쪽 끝이 진은숙 씨).
“레슨을 받았다면 피아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는 “작곡을 하는 게 싸니까 작곡가가 됐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성악을 전공한 언니와 작곡을 전공했던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그의 언니는 《클래식 오딧세이》의 저자인 음악평론가 진회숙 씨, 남동생은 미학자이자 논객으로 유명한 진중권 씨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 이야기를 삼갔다. “모두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서로 연결돼 이야기되는 것을 싫어한다”면서.

그는 어릴 때부터 음향의 세계에 이끌려 피아노를 칠 때면 뚜껑을 열어 두고 피아노 속 금속 현이 울리는 소리를 귀에 대고 듣곤 했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서 특히 음색이 중요시되고, 와인잔 깨지는 소리 등 각종 음향이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들어가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음대 입시에서 어떻게 답안을 쓰는지도 몰랐던 그는 삼수 만에 대학에 들어가고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1984년 캐나다의 ‘ISCM World Music Days’와 유네스코 ‘Rostrum for Composers’에 채택됐고, 1985년 독일 학술교류처(DAAD) 장학금으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 음대에서 그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에게 사사했다. 전통적인 선율, 화음, 리듬에 의존하지 않고 음향의 변화 자체에 천착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아방가르드 작곡가로 평가받는 리게티의 음악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을 매혹해 그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의 주제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1997년 <기계적 환상곡> 파리 리허설 때.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음악적 수준이 높던 리게티는 제자들에게도 가차 없는 스승이었다. “그 밑에 있으면 정신병자가 되거나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 진은숙 씨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생님을 닮아 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리게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음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태도. 세상의 평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혹독한 기준을 요구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가 많다고 한다.

“작곡가는 지옥불에라도 들어가 지지고 나올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고통 끝에서 나온 음악은 듣는 사람을 천상에 데려가지요. 쓰는 사람이 천국에서 헤매고 있으면 그럴 수 있겠어요?”

스승 죄르지 리게티와.
작곡가 지망생들에게도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정열’을 강조하는 그는 “내면의 귀를 훈련하라”고 충고한다.

“내면의 귀로 상상하는 것을 악보로 옮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연주될 때 원래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다른지 경험을 쌓아야 하지요. 처음부터 오케스트라곡에 도전하기보다 작은 편성의 곡을 자꾸 써보세요.”

그에게도 한동안 곡을 쓰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독일로 건너간 얼마 후 3년간 작곡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독일은 너무 낯선 땅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난 절대 그곳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멘털리티도,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도 너무 달랐다. 외국에서 온 동양 여자가 하는 작업에 대해 아무도 진지하게 봐주려 하지 않았다. 긴 생머리에 길게 찢어진 매력적인 눈, 아래 위 검정색으로 차려입은 그에게 “검정색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하자 “독일에서 살아서 그래요”라고 대답하는 그에게서 이국 땅에서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곡가가 되지 않으셨냐?”고 묻자 “제가 독일 사람이라면 더 일찍 인정받았겠죠”라고 답한다.

폴란드 작곡가 루토스라브스키와.
“그렇다고 제가 민족주의자나 전형적인 한국인도 아니에요.”

그가 음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때문일까? 윤이상이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적 음악을 추구한 데 비해 진은숙 음악에는 국적이 없다. 한국적 색채를 의도적으로 넣은 것 같은 느낌은 어디에도 없고, 그가 꿈꾸는 우주, 판타지의 세계로 초대되는 듯하다. 그 역시 “내 음악은 내 꿈의 반영이다. 나는 꿈에서 본 엄청난 빛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한 색채들, 공간을 흘러 다니는 빛과 색채의 놀이, 동시에 흐르는 소리가 형상을 갖추며 조각이 되는 것을 음악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그 아름다움은 매우 추상적이면서 아득하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즐거움과 따뜻함을 전달한다”고 자신의 음악을 풀이한다.

진은숙의 음악은 통영 국제음악제나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간간히 소개됐고, 프랑스의 앙상블 엥테르콩탕포렝가 <문자 퍼즐> <기계적 환상곡> <씨 Xi> <이중 협주곡>을 연주한 음반을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다. 앨범을 들으니 현대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에게 처음에는 생소하지만, 의식이 우주로 확장되는 듯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고의 후원자인 지휘자 켄트 나가노 씨(왼쪽에서 세 번째)와 남편(오른쪽 끝), 아들과.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대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음악에는 음악만의 언어가 있기에 그걸 굳이 말로 옮길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제 음악에 대해 써놓은 평론가의 글은 읽지도 않죠. 중요한 것은 연주 때 청중들이 어떻게 느끼느냐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가 없는 시간을 쪼개 <아르스 노바> 공연과 공개강좌를 여는 것도 일반인에게 현대음악을 즐길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야 진은숙이 활동할 공간도 생기지 않겠느냐?”며. 그가 기획하는<아르스 노바>는 현대음악이 어떻게 생겨나 발전했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게 특징. 청중들이 현대음악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구성하면서 기존 클래식 음악과의 연관성을 모색한다. 지난 3월 리게티 추모 음악회로 <아르스 노바>를 열 때는 스트라빈스키, 드뷔시 등 리게티가 영향을 받은 음악가와 리게티, 그리고 리게티의 영향을 받은 진은숙의 음악이 함께 연주되는 식이었다. 11월 3일과 6일에 열린 공연에는 바이올린과 첼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비올라의 매력에 초점을 맞췄다. <아르스 노바>에서 연주되는 현대음악의 새로운 어법에 대해 청중들은 “새로운 충격을 주는 음악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도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평이다.

서울음대 강석희 교수와 함부르크 음대 시절 리게티가 그의 음악적 스승이라면 일본인 지휘자 켄트 나가노는 그가 음악적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최고의 후원자. 진은숙에게 그라베마이어상을 안긴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한 지휘자이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무대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 의뢰한 이 오페라가 극장의 재정 문제로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되자,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으로 옮긴 후 연주한 것.

“작곡하는 제 친구와 나가노가 가까웠는데, 어느 날 불쑥 제게 팩스를 보내왔더라고요. 그리곤 계속해서 작품을 의뢰하죠. 세계의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그를 통해 제 곡이 많이 알려졌어요. 일 년에 10곡씩은 쓰라고 하는데….”

“언제 어디서 곡을 쓰시냐?”고 물으니 “애 키우고 살림하느라 시간이 부족해 시간 날 때마다 언제든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남편은 핀란드의 피아니스트로 그보다 18년 연하. 시아버지는 지난 11월 6~7일 예술의전당에서 내한공연을 한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랄프 고트니 씨다. 늦게까지 결혼을 미루며 ‘아이를 낳아 키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일곱 살인 아들이 “너무너무 착하고 천사 같아요”라며 사진을 보여준다. 결혼 후 일상이 바빠지긴 했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아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게 됐다”고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가 이제까지 해온 음악적 실험을 쏟아 부은 작품이라며 “다음에 나올 작품은 많이 달라질 것 같다”고 한다. 꿈속에서 토끼굴로 떨어져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소녀 앨리스. 그도 앨리스처럼 새로운 음악 세계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사진 : 이창주
  • 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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