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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콩쿠르 1등 휩쓰는 19세 피아니스트 김선욱

헤어ㆍ메이크업 : 이경민 포레(헤어 미희, 메이크업 성명신)
사진제공 : CREDIA, CMI,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3월 27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빽빽한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은 김선욱은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독주회 연주곡은 슈베르트 소나타 D958, 쇼팽 스케르초 1, 2, 3, 4번. 연륜 있는 피아니스트들도 어려워하는 대가들의 후기 소나타를 연주곡으로 선택한 것은 김선욱 자신이었다. “나의 라이벌은 나”라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리였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초기 10분 동안은 흔들리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하지만 이내 안정되면서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 나갔다.

그의 손끝에서 때론 봄바람 같은 미풍이 흘러나왔고, 때론 폭풍우 같은 격정이 터져 나왔다. 몸짓은 선율과 하나가 되어 흘렀고, 그의 얼굴에는 인간사의 모든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열아홉 피아니스트의 연주라니. 격렬한 음을 따라 흔들리는 젖살만 아니면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련함이었다. 박수갈채가 쉼 없이 터져 나왔고, 두 번의 앙코르 곡이 이어졌다.

9시 45분 호암아트홀. 독주회가 끝났지만 대부분 관객은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다. 일곱 살배기 피아니스트 지망생부터 백발의 노부부까지 김선욱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똬리를 틀고 있는 줄은 계단 위로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날 사인회는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독주회 이틀 후 김선욱을 만났다. 아직 피로가 덜 가신 듯했지만 두 눈엔 천진스러운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신의 독주회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줄 거냐고 물었다.

“A-요. 이제까지 A0는 딱 한 번 줬어요. 리즈 콩쿠르 본선 때. 이번엔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걸 다 한 것 같아요. 원래 하루에 3시간 이상 연습을 하지 않거든요. 1년에 1095시간 연습량을 정해놓고, 비행기 타느라 이틀 연습을 빼먹으면 다음날 그만큼 채워 가면서 연습하는 식이죠. 이번에는 처음 치는 곡인 데다가 연습 기간이 짧아서 너무 긴장됐어요. 본격적으로 연습한 건 한 달 조금 안 되는데, 하루 평균 6~7시간 연습했죠.”

스승 김대진 교수와.
독주회를 앞두고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김선욱. 심한 위염을 앓았는가 하면 초조와 긴장감을 이기기 위해 밤 11시에 혼자 영화 <향수>를 보고 왔단다. 그의 공연을 보면서 찬탄만큼 걱정이 앞섰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그가 여기에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김선욱은 “나는 발전이라는 말을 심하게 좋아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연주를 많이 하는 건 독이 되기도 해요. 무대 맛을 느끼고, 청중들 박수를 즐기게 되면 공부에서 간과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거든요.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1~2년간 집중해서 연주를 하고, 다시 그 기간만큼 공부를 쌓고, 그 다음에 또 연주를 하는 거예요. 오래도록 남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그건 연습량에 달려 있지요. 진짜 오래가고 싶어요. 저는 아직 시작도 안 한 단계니까요.”

열아홉 살의 피아니스트 김선욱. 그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티켓파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7일 단 하루 열리는 그의 리사이틀 티켓은 두 달 전에 매진됐다. 2월 2일 금호음악인상 수상기념독주회, 2월 8~9일 KBS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협연 역시 일찌감치 티켓이 동났다.

리즈 콩쿠르 우승 메달을 들고.
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영국에서 열린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서부터다. 차이코프스키, 쇼팽,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버금가는 세계 정상의 콩쿠르인 이 대회에서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이자 대회 최연소로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 에틀링겐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2005년 클라라 하스킬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에 이어 차지한 쾌거였다. 콩쿠르 우승이 그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연주 기회’였다.

“저는 실전에 강하거든요. 연습 때보다 실전에 임할 때 좋은 연주가 뿜어져 나와요. 연주 기회가 많다는 건 그만큼 중요해요.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주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전 아직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관심이 적응이 안 돼요. 콩쿠르 전에는 저를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는 해외 유학 한번 가본 적 없이 콩쿠르 우승을 따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때부터 김대진 교수를 사사한 그는 “우리나라 음악 교육 수준이 외국의 어느 대학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마지막 한 학기를 남긴 그는 곧 유럽으로 유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 좋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만든 유럽인들이 무엇을 보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가 피아노를 처음 접한 것은 만 세 살 때였다. 세 살 위 형이 피아노 학원 차를 타고 가면 목 놓아 울던 김선욱. 그때부터 피아노는 그의 인생에서 전부가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를 꿈꾸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 달에 10번씩 연주를 보러 다녔다. 예술의 전당에 그가 늘 앉는 자리가 있을 정도였다. 음악 영재로 성장한 이 모든 프로그램은 그가 직접 짠 것이다. 부부 교사인 부모는 그저 아들을 믿고 맡겨 놓았을 뿐이라고 한다.

리즈 콩쿠르 우승 후 심사위원들과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부모의 이런 ‘소극적인’ 교육이 김선욱에겐 딱 맞았던 듯하다. 김선욱은 혼자서 뭐든 결정하고 책임지는, 고집 센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입학원서도 그는 부모 도움 없이 혼자 썼고, 세계적인 콩쿠르에 출전하면서도 부모에게는 “절대 공항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래서일까.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노회한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굵직한 목소리에 소신 있는 말투, 듬직한 몸집까지. 그는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머리를 손질하면서 헤어 담당자가 “소년 같아 보이게 앞머리를 내리겠다”고 하자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좋다”며 앞머리를 올려 달라고 한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김선욱. 그 이유를 물었다.

“빨리 차도 몰고 싶고. 어른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다 제 음악적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난 10년을 돌아볼 때 조금의 후회도 없어요. 중학교 때부터 하루해가 너무 짧았어요.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산 것 같아요. ‘그때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쯤 달라졌을 텐데’ 하는 어른들의 넋두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어요. 스무 살 되기 전에 꼭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지요.”

그 정도면 스무 살 되기 전에 이룬 게 아니냐고 하자, “에잇,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콩쿠르 우승한 사람도 있어요” 한다. 이 청년의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한번 파고들면 무섭게 집착하는 성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음악이면 음악, 독서면 독서 하나를 붙잡으면 끝을 보고 만다. 책을 읽을 때도 한 작가씩 모조리 작품을 섭렵하는 식이다. 최근엔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과 앨빈 토플러의 저서를 몽땅 섭렵했다 한다. 집에 들어오면 새벽 3~4시까지 인터넷을 하는데, 뉴스를 보다가 ‘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사’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누벼야 직성이 풀린단다. 하물며 그의 전공인 음악에서야 오죽할까. 김선욱은 “음악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나처럼 음악도 많이 듣고, 연주회도 많이 다니고, 오케스트라 공부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웃는다.


그에게 피아노는 최고의 표현 수단이다. 말이나 글, 표정이나 몸짓 등 이 세상의 언어로 다 표현해 내지 못하는 느낌과 생각을 음악으로 대신한단다. 왜 그렇게 피아노가 좋으냐는 질문에 “피아노가 좋은 게 아니라 음악을 하는 자체가 좋다”며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음악가나 예술계 사람들이 특이하다, 예민하다는 얘길 많이 하는데, 그건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기준에서 봤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예술가들은 일반인들보다 느끼고 표현해 낼 수 있는 범위가 넓고 풍부한 거죠. 연주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가 다 표출돼요. 단순한 사람은 단순하게 연주하고, 예민한 사람은 연주도 예민하죠. 그래서 더 치열하게 내면을 탐구하고 사색도 많이 해야 돼요. 연주로 모든 것을 다 표출해 낼 수 있어서 음악이 좋아요.”

5월 초 김선욱은 정명훈의 지휘로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과 협연을 하게 된다.
김선욱은 표정과 몸짓이 풍부하다. “연주할 때 저의 몸짓은 선생님(김대진 교수)도 부러워하세요”라고 한다.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피아노와 그가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이 든다. 사랑하는 여인의 몸을 애무하듯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정적으로 만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씨익 웃더니 대답한다.

“한 선배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여자처럼 생각해야 된대요.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지듯 연주하면 피아노와 하나가 된다고 했어요. 맞는 것 같아요. 악기를 무생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아노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거든요.”

한 마디 한 마디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김선욱.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너무 단정 짓듯 대답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앞섰다.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은 생기지 않을까?

“저는 인터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언론 뒤에 꼭꼭 숨어서 음악에만 열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인터뷰를 통해 제 정체성에 최면을 걸고 있어요. 좋게 말하면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뱉은 말을 지키려고 악을 쓰는 거죠. 콩쿠르 전에 ‘1등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면 이상하게도 그렇게 돼있더라고요. 제가 그리는 청사진을 미리 알려 놓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식이지요.”

포부와 야망, 내면화된 자기애(自己愛). 김선욱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사랑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저는 제 큰 얼굴이 좋아요. 그래야 무대에서 표정이 잘 보이거든요”라든가, “저는 제 작은 키(172cm)가 좋아요. 단단해 보이잖아요. 키가 너무 크면 다리가 굽어서 자세가 이상해요”라는 식이다. “자기애가 강한 편인 것 같다”고 하자 “네, 심하게요. 제가 하면 다 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김선욱은 오는 5월 2~5일, 정명훈의 지휘로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과 협연을 한다. 이 무대에서 그는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초연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다. 기교보다 프레이즈나 소리로 승부하는 곡으로, 잘못 치면 지루하지만 잘 치면 화려한 마법 같은 곡. 김선욱이 직접 고른 곡으로, 또 한 번의 도전을 앞둔 셈이다.

“저는 아직까지 음악적인 가치관이나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은 것 같아요. 학생이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표현의 기회가 있는 거죠. 정명훈 선생님과의 협연을 통해 많이 배우고 싶어요.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 협연의 독주자이고 이런 타이틀을 떠나서 연수나 캠프를 갔다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마음으로 임할 겁니다. 정명훈 선생님이 가진 음악적인 가치관과 사고를 다 끌어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사진 : 이창주
  • 2007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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