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디자인한다

갖고 싶은 노트북 컴퓨터가 있었다. 핸드백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볍다면, 언제 어디서든 수첩 꺼내듯 꺼내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다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이노디자인’ 사옥에서 만난 세계적인 디자이너 김영세 씨가 내가 원하던 바로 그 노트북을 보여줬다. 작은 다이어리나 수첩 크기의 전자사전같이 보이는 물건을 양쪽으로 펼치니 키보드가 나타난다. 앞으로 접혀있던 모니터를 위로 올리니 바로 노트북이 된다. 모니터 옆에 비디오카메라까지 달려있다. 미팅이나 회의 때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현장 녹화도 할 수 있겠다. 이 제품은 삼성전자의 휴대전화인 애니콜 ‘미츠’. 노트북 컴퓨터가 아니라 휴대전화에 노트북 기능이 합쳐진 제품으로, 곧 출시된다고 한다.

“게으른 사람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냅니다.”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니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와 서울 두 군데에서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두 곳은 화상회의 등을 통해 긴밀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그가 매달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업무를 진행한다. 그렇게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싫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포켓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노트북 컴퓨터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고, 구체적으로 디자인 구상을 해서 삼성전자에 제안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유럽형 GSM폰과 김영세 씨의 구상 스케치.
그의 생각은 ‘What if’(만약~)에서 시작해 ‘Why not’(왜 그러면 안 돼?)으로 진전된다. 아무리 엉뚱한 상상이라도 구체적으로 생각을 진전시키다 보면 결론에 도달한다고. 디자이너인 그에게 “롤 모델이 있느냐”고 물으니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대답한다. ‘모나리자’로 유명한 이 대표적인 르네상스 화가는 엉뚱한 생각에 몰두하곤 하는 발명가이기도 했다. “새처럼 날 수 없을까” 연구하다 기계 날개를 단 비행기구를 만들고, 소금쟁이를 흉내 내 물 위를 걷는 신발을 발명하기도 했다. 김영세의 디자인 역시 그저 예쁘게, 눈에 쏙 들어오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제까지 없었던 기능의 물건을 만들면서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나간다.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 제품들이 히트작이 되어왔다.

새로 출시되는 노트북 겸 휴대전화.
세 번 접어 다이어리처럼 만든 노트북 컴퓨터를 고안한 그는 이를 모형으로 만든 후 블랙박스에 담아 삼성전자 이기태 부회장에게 들고 갔다. 새로운 제품을 구상해 클라이언트에 제안할 때면 그는 이렇게 블랙박스를 이용한다. 휴대전화인지 노트북인지 정체를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이 제품은 삼성전자의 2년여 연구 끝에 최근 세상에 나왔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 중 세계 3대 산업디자인상인 IDEA와 iF, 레드닷에서 상을 받거나 <비즈니스 위크> 등 경제 잡지에서 ‘올해의 상품’으로 선정된 종류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최근에는 중국의 전자회사 TCL과 손잡고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내놓아 시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2006년 레드닷 디자인상도 받았다. 그는 비슷비슷한 것을 내놓지 않는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생각을 하라’ ‘무난함을 버리고 확실한 차이를 만들라’가 그의 디자인 철학이다.

그의 디자인은 전 영역으로 뻗어있다. 다리를 접어 넣는 가재 모양의 휴대용 가스버너, 주부들을 위한 화장품 모양의 전동공구, 구두와 운동화의 복합체 같은 슈즈, 대학 시절 ‘도비두’라는 이름의 듀엣으로 함께 활동했던 김민기 씨를 위해 만든 음반 디자인까지…. 그의 디자인은 철저히 사용자 입장에 서서 출발한다. 그들 입장에서 불편함을 찾아내 개선하면서 ‘심플, 쌈박’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 사고를 낼 뻔한 장면을 지켜보고는 ‘자전거용 헬멧 뒤에 디지털 카메라를 붙이고 앞에 스크린을 달아, 뒤에서 차가 오는 것도 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이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출발해 전방위로 활동해 온 그에게 ‘디자인 구루’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대의 전자쇼인 CES 기조연설 중 그가 디자인한 MP3를 들고 ‘디지털 라이프 시대를 주도할 제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새 브랜드 ‘이노맨’으로 디지털 컨버전스 선도

국제적인 디자인상인 IDEA에서 동상을 받고, 1990년 〈비즈니스 위크〉誌에서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었던 골프가방.
그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기기 하나로 전화와 사진-비디오 촬영, 인터넷, 방송 시청, 음악 듣기, 게임, 금융 등 갖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 새롭게 열리는 시장을 두고 경쟁이 치열한데, 디자이너 김영세가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오는 3월부터 ‘이노맨’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기기들을 직접 선보이겠다고 한다. MP3에 디지털 카메라를 결합시키고, 휴대전화에 게임 패드를 부착하는 등 항상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한 그가 자신의 브랜드를 내건 제품으로 어떤 것들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가 됐다. “어떤 형태의 제품이 나오느냐?”고 계속 물어도 “절대 비밀”이란다. 신제품 발표회를 갖기 전에는 보안을 유지하겠다고. 앞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me society’가 열릴 것이라며, 새로 시작되는 디지털 세상을 앞서서 디자인하겠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은 기술이 뛰어나도 디자인이나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 자금 유치, 판매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가진 기업들에 우리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제품 개발을 의뢰하고, ‘이노맨’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세계시장을 뚫는다는 계획입니다.”

‘이노디자인’은 디자인과 마케팅만 맡고, 기술 개발과 제조는 모두 외주를 주겠다는 것. ‘이노디자인’의 자회사인 ‘이노맨’의 이순 대표는 오랫동안 IT업체를 운영하다 김영세 씨와 의기투합, 자신의 회사를 접고 자리를 옮겼다. ‘이노디자인’ 아래층에 자리한 ‘이노맨’ 사무실에 들어가자 ‘10, 10, 11’이란 구호가 눈에 띈다. ‘이노맨’ 직원들과 식사를 하던 김영세 씨가 “10명이 10년 안에 매출 11억 달러(1조 원)를 달성하자”면서 썼다고 한다. ‘이노맨’ 자체는 본부 역할만 하기에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한다.

‘이노맨’ 입구 유리 탁자 안에는 우리나라에 아직 휴대전화가 소개도 되기 전인 1989년, 미츠비시에서 나온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다. 검은색의 심플한 디자인인데, 그걸 가리키며 “지금 봐도 마음에 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삼성전자, LG전자를 위해 디자인한 대표적인 휴대전화들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초창기 휴대전화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듯,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도 선도하겠다는 의욕을 읽을 수 있었다.

최첨단 제품을 디자인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날로그적이다. 제품 아이디어와 디자인은 주로 ‘상상’과 ‘관찰’에서 나온다. “2010년 혹은 2020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상상하면서 가상인물을 정해 그의 하루 생활을 하나하나 그려본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그는 자유롭게 상상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 쓱쓱 스케치를 한다. 그것들이 모여 제품 아이디어가 되어왔다.

“비행기가 2~3시간씩 연발돼 비행장에서 기다려야 할 때도 짜증이 나지 않아요. 그만큼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늘어난 것이니까요.”

이틀 전 미국에서 날아왔다는 그는 이번 비행에서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준다. ‘안경으로 영상물을 보면 안 될까?’하는 생각으로 만든 제품 스케치였다.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를 생각할 때면 그걸 들고 흥분할 사람들 생각에 그때부터 가슴이 뛴다고 한다.

아이리버 목걸이형 MP3.
상상 여행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선생님께 칠판지우개로 한방 맞던 초등학교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각계각층 소비자의 마음으로 항상 옮겨 다니다 보니 “나이는 모르고 산다”고 한다. 실제 그를 만나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푸른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캐주얼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청장년인데, 아들딸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들은 뮤지션, 딸은 요가 강사로 각기 제 길을 가는데, “아이들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은 부모로서 기쁜 일”이라고 말한다. 이노디자인은 사옥 화장실에서도 평범한 것을 거부한다. ‘with a view’ 라고 쓰인 화장실 문을 여니 변기에 앉아서도 바깥이 훤히 내다보인다. 세면대 물은 샤워기처럼 나왔다. 시중에는 없는 제품으로, 직접 디자인해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관찰’도 그의 힘이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사무실을 벗어나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커피숍이나 쇼핑몰을 찾곤 한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취향과 필요를 읽을 수 있다고. 중소기업 레인콤을 급성장시켰던 아이리버 MP3나, 삼성전자의 가로 본능 폰 등 그가 디자인한 상품들이 줄줄이 히트한 것을 보면, 그가 소비자들의 욕구를 얼마나 정확히 읽어 내는지 알 수 있다. 동석한 사람들에게 그는 “당신들의 취향을 파악해 의상 코디네이션까지 해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요즘이야 디자인이 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꼽힐 정도로 각광 받고 있지만, 그가 처음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할 때는 산업 디자이너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집에서 들춰 본 외국 잡지<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멋지게 디자인된 일상용품들로 가득한 그 잡지를 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계나 라디오 같은 걸 디자인하고 싶다”며 미대에 가겠다는 그를 그러나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했다. 1년 재수 끝에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갔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EXR 코리아의 운동화.
미국에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디자인 컨설팅 회사에서 실무를 익힌 후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가 됐지만, 안정된 생활을 박차고 나와 1986년 실리콘밸리에 자신의 사무실을 열었다. INNO라는 회사 이름은 그가 좋아하는 INNO-VATION(혁신)에서 따왔다. 제자 한 명을 데리고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 사업을 시작했을 때 ‘프로젝트 수주를 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있었다. 그때부터 의뢰받기 전에 먼저 디자인하는 그의 ‘디자인 퍼스트’가 시작되었다. 기존 골프채는 여행 때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데 착안한 그는 단단한 재질에 골프 용구들을 한꺼번에 보관할 수 있는 여행용 골프 가방을 고안해 골프 관련 상품 박람회에 들고 나갔다. 그걸 본 미국의 대표적인 플라스틱 제조업체 플램보가 생산과 판매를 맡겠다고 제의했고, 그는 그 로열티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골프 가방은 국제적인 디자인상인 IDEA에서 동상을 받고, 1990년 〈비즈니스 위크〉誌에서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노 디자인’을 설립한 지 20여 년. 그의 아이디어 샘은 어떻게 마르지 않고 계속 넘쳐나는 걸까 궁금했다. 그는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들 삶을 더 편리하게,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고,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 한다. 요즘 그는 디자이너 지망생으로부터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봐달라는 이메일을 하루 한 통 이상씩 받는다. 이제 훌륭한 디자이너를 키워내는 일도 그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됐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일까’ 곰곰 생각할 때가 많다. 아직도 우리 사회, 기업은 디자이너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디자이너에게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생각하다 적었다며 쪽지를 보여 주는데, ‘집중력, 상상력, 기억력, 분석력, 의사전달력, 이해력, 창조력, 설득력, 판단력, 지구력, 열정, 예측력, 관심, 관찰력, 호기심, 정직, 순수, 사랑, 리더십, 친화력’ 등이 죽 적혀 있었다. 아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역량이 합해져야 좋은 디자이너가 탄생한다는 말인가.

“디자이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더 편안하게, 기분 좋게, 멋있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지요. 저는 이 일이 엄청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과 같다고 믿어요.”

사진 : 이창주
  • 200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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