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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바둑의 기린아 이세돌

거침없는 센돌, 겸손해지다

한국 프로 바둑의 기린아 이세돌(李世乭). 적어도 2006년만큼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이창호보다 그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2006년 최다 대국 1위(현재 97국), 다승 1위(72승25패), 승률 3위(74%), 최다 연승 1위(14연승). 화려한 전적은 고스란히 타이틀 획득으로 이어졌다.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는 도요타덴소배(세계대회) 결승 진출, 한국물가정보배 우승,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GS칼텍스배 우승…. 박카스배 천원전마저 제패하면 타이틀 지분에서 1인자 이창호를 뛰어넘어 국내 최다관왕이 된다.

인터뷰로는 6년 만이고, 여럿이 어울려 함께 술잔을 나눈 기억으로는 3년쯤 된 것 같다. 2000년 한국 프로기전을 휩쓴 32연승 직후 만났던 소년의 첫인상을 되짚어 본다.

‘4월 2일이면 만 18세가 된다는 소년의 얼굴은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인다. 잡티 없이 반듯한 이마에는 윤기가 돌고 그 아래 황금비율을 따르듯 알맞은 간격으로 자리 잡은 두 눈썹은 먹물을 쿡 찍어 한일자를 써놓은 듯 짙은데 붓의 끌림처럼 엷게 미간을 타고 이어진 형상이 꿈틀거리는 용의 비늘처럼 수려하다.’

그의 얼굴은 6년 전 그때에서 정지된 화면을 보는 느낌이다. 6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지금 이 시간이나 똑같은 소년의 얼굴이다. 총기 어린 두 눈, 긴 속눈썹, 도톰한 콧방울도 둥글고 두 귀도 둥글다. 정상에 오른 프로에게 대단한 실례인지는 몰라도 승부사보다는 집안의 막냇동생 같은 얼굴이다. 특이하게 입을 오므리고 웃는 모습도 귀여운 토끼를 연상시킨다(하긴, 그는 5남매의 막내다).

▶▶ 6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늘 소년 같은 얼굴인데?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웃음)

3년 전 여름으로 돌아가 KT배 마스터즈 결승전 뒤풀이 때 이야기를 꺼냈다. 결승1국을 이겨 타이틀 획득을 눈앞에 두었다가 2, 3국을 연패해 유창혁에게 타이틀을 넘겨준, 아픈 기억이다. 저녁자리가 파하고 우연히 둘만 남겨져 홍익동 한국기원 근처 요리주점에서 소주잔을 기울였었다. 타이틀을 놓친 스물한 살의 청년은 마지막까지 대범한 척 패배의 아픔을 감추려 했으나 2차의 취기에 기대어 “승리의 기쁨은 금세 사라진다. 그보다는 패배의 아픔이 견디기 힘들어서 이기려고 애를 쓴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에게 “올해는 특별히 국내 기전에 주력한 것이냐”고 물었다.

“특별히 주력한 건 없는데…. 두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어쩌면 세계대회 성적이 좋지 않으니까 상대적으로 국내 성적이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죠.”

▶▶ 세계대회 성적이 좋지 않다니, 지난해 우승했던 도요타덴소배 결승에 또 진출하지 않았나?

“그것밖에 없잖아요? 다른 세계대회에선 1회전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좋지 않았어요.”

▶▶ 공교롭게 결혼 이후로 국내 성적이 확연히 좋아졌다. 가정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란 시각이 많은데.

“글쎄, 개인적으론 별로 달라진 걸 못 느끼겠는데…. 물론,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성적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세돌은 적당히 맞춰주는 화법을 아예 모른다. 늘 거침이 없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즉각 “아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바둑판 위에서나 바깥에서나 그의 결정은 늘 직선적이고 단호하다. 한동안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동갑내기 김현진 씨와의 결혼도 그렇다. ‘이세돌이 누군가와 열애 중이다’라는 말이 나돌기가 무섭게 바로 결혼을 발표해 주변을, 심지어는 가족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 그래도 달라졌다는 평판이 많다. 바둑 내용도 예전처럼 기복이 심하지 않고 안정감을 보여주는 건 틀림없지 않나. 결혼하더니 점잖아졌다거나 예전보다 겸손하다는 말도 많던데….

“공부를 더 한 건 아닌데…. 아니, 결혼한 이후로 공부는 거의 해본 적이 없어요. 그보다는 자신감이 줄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자신감이 줄었기 때문에 안정감을 보여주고 겸손하게 비친다? 독특한 발상이다. 그 발상의 당사자가 이세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2003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올랐을 때 스스럼없이 “내가 세계 최강”이라고 말해 호된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바둑은 중장년 남성 지식층이 애호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팬들의 눈에 “내가 세계 최강”이라고 말하는 스물한 살 청년의 당당함이 곱게 비칠 리 없다.

“3년 전에는 분명히 그런(내가 최고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기량도 그때가 지금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아니죠. 이창호 사범님은 여전히 앞에 있고 후배들은 맹렬히 쫓아오고….”

이세돌은 분명한 어조로 과거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가 ‘더 큰 세계에 눈을 떴다’는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줄면 조심성이 많아진다. 바둑은 필연적으로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 유리한 게임이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세돌의 겸손, 그의 바둑이 보여주는 안정감도 모두 이 조심성으로부터 빚어진 것은 아닌지.



닮고 싶은 이상형은 돌아가신 아버지

아무튼 이세돌의 2006년 성적은 발군이다. 그 전과도 혁혁하다. 세계대회(도요타덴소배) 결승에 올랐고 국내 타이틀도 5관왕을 바라본다. 그중 KBS 바둑왕과 GS칼텍스배는 이창호 제국을 무너뜨린 최철한에게 5연승을 기록하며 거둔 전리품이다. 1인자 이창호와의 상대전적도 4승 1패(4연승). 과거의 이세돌이라면 ‘이제야말로 1인자 이창호를 넘어섰다’고 자부할 만도 한데 어떨까.

“아직은 아니에요. 2, 3년 더 열심히 하면 혹시 모를까. 올해 성적은 제가 특별히 잘해서 좋아진 게 아닙니다. 대부분 상대가 부진했던 거죠. 요즘 이창호 사범님도, 최철한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타이틀이 많다고 하지만 GS칼텍스배를 제외하면… 이창호 사범님 타이틀이 훨씬 근사하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최고”라고 주장하던 3년 전보다 “아직은 아니다”라는 지금의 모습이 더 최고에 가까워 보인다. “이창호 사범님”을 연발하는 게 괜한 겸양이 아니다.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깍듯하다. 거칠 것 없는 풍운아 이세돌이 이렇게 말하는 건 재미없지만 사실, 모범답안에 가까운 말이다.

요즘 이세돌은 바쁘다. 이창호가 1989년에 기록했던 연간 최다 대국(111국)의 기록을 돌파할지도 모른다. 중국리그에서도 최고 몸값의 용병으로 활약하고 있다. 폭주하는 대국을 어떻게 소화하고 패배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까. 또 체력 관리는?

“아직, 젊으니까 체력은 별 문제 없어요. 속기(速棋)가 많아서…. 잘 맞는 편입니다.”

감각파 이세돌은 속기에서 더 빛을 발한다. 스트레스 해소법은 따로 없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내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방치하는 것.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패배 뒤의 음주는 사양이다. 몇 차례 경험으로 스트레스는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후유증만 커진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술은 기분이 좋을 때 기분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신다”는 게 그의 음주관이다.

나이는 이제 스물넷이지만 1995년에 입단했으니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긴 중견의 프로가 됐다. 세계 최고봉을 다섯 차례나 등정했고 결혼도 했으니 사회인으로서도 이력이 붙을 때가 됐는데, 인생의 목표는 어디까지 설정하고 있을까. 아직 소년의 얼굴을 가진 그의 중년을 상상하는 게 어색해서 그냥 지나치는 말로 슬쩍 물었는데 뜻밖에도 진지한 답을 준다.

“세계대회에서 좀 더 성적을 내고…. 국내 타이틀도 상징적인 것을 갖고 싶어요. 한국 바둑이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곧 중국에게 따라잡힐 겁니다. 우리가 계속 버틸 수 있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요. 조 국수님처럼 내제자(內弟子-집안으로 받아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가르치는 제자)를 받겠다는 건 아니지만 제자도 4~5명쯤 가르치고 싶고요. 물론 훗날 얘기죠.”

단순하게 좋은 성적을 올리고 타이틀을 많이 획득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상징적인 타이틀을 갖고 싶다고 한다(이창호의 국수를 겨냥한 뉘앙스?). 또 한국 바둑이 버틸 수 있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당장은 아니라지만 제자를 가르칠 생각까지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뜻밖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6년 전에는 “조훈현 9단을 좋아하지만 존경하는 프로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었는데 지금도 그럴까.

“없습니다.”

역시 단호하다. 이세돌이 조훈현을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한때 그의 별명은 ‘리틀 조훈현’이었다. 번뜩이는 재능, 치열한 기질까지 둘은 많이 닮았다. 좋아하지만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승부를 겨루고 뛰어넘어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존경’과 ‘호감’의 차이를 그처럼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이세돌만의 표현 방식이다.

그가 이상형으로서 닮고 싶고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은 1998년에 타계한 아버지 이수오 씨다. 광주교대를 나와 목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비금도로 귀향했을 때 이세돌은 젖먹이였다. 아마 유단자였던 아버지는 농사일 틈틈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는데 5남매 중 재능을 보인 장남 상훈과 막내 세돌이 차례로 프로가 됐다. 어느 날 문득, 도시 생활을 접고 섬으로 돌아와 5남매의 가슴에 푸른 바다를 심어준 아버지. 이세돌에게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바다의 기질이 있다. 대국이 없는 날에는 뭘 하며 지내냐는 질문에 픽, 웃으며 말한다.

“그냥, 혼자 자유롭게 지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세수를 안 해도, 청소를 안 해도 좋고 책을 읽든 TV를 보든, 밥을 언제 어떻게 먹든 내 마음대로 하는 거….”

여전히 아이 같은 그의 웃음 속에서 비금도의 푸른 바다가 함께 출렁거렸다.

사진 : 이규열
  • 200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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