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주인공 이나영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은 영화예요”

“거 참, 묘하게 생긴 미인이네”

1998년 CF 모델로 갓 데뷔한 이나영을 보고 한 신문사 기자가 한 말이다. 넓은 이마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얼굴. 지하철역에서 바람에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초점 없는 눈으로 서있던 한 초콜릿 광고 속의 그는 별나라에서 온 여인인 양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늘 새로운 얼굴에 목말라 있는 광고계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음은 물론이다.

데뷔 이후 이나영은 의류, 화장품, 음료, 아이스크림, 휴대전화 등 연예계 스타라면 누구나 탐내는 광고는 물론 최근에는 세탁기와 아파트 광고까지 두루 섭렵하며 CF계의 요정으로 군림해 왔다. CF 속에서 그는 언제나 맑고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CF 스타로 각광 받아온 그가 배우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스크린이 아닌 TV 드라마를 통해서다. 2002년 그의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컨셉트와 스토리로 젊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드라마 <내 멋대로 해라>에서 그는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인디 밴드의 키보디스트 전경으로 분했다. 엉뚱하지만 사람을 조건이나 외모로 재단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한없이 투명한 영혼을 가진 여자. 그는 오랜만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 편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2004년에는 영화 <아는 여자>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가 근 2년 만에 출연한 작품이 소설가 공지영의 베스트셀러를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자신의 배우 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찍겠다는 각오로 도전한 이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 유정 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제작 보고회에서 그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글쎄요, 컴백 소리를 들을 만큼 오래 쉰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세상에 좀 무관심해서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주인공 유정이랑 닮은 부분이 있어요.”

화려한 외모와 달리 말이든 옷이든 자신을 치장하는 데 서투르며 털털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광고 속의 세련된 이나영은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 일상 속의 그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는 누구나 다 ‘아는 여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떡볶이를 즐겨 먹고 놀이동산에 가서 신나게 자이로 드롭을 타는 여자, 힙합 음악을 듣고 만화나 소설을 읽으며 집 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여자가 바로 이나영이다. 외모와는 달리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소설 속의 유정은 복잡한 캐릭터다. 열다섯 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30대 대학 강사. 그런 자신을 외면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똘똘 뭉친 여자.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상처 때문에 폐쇄적이고 반항적인 삶을 살던 유정은 수녀인 고모의 소개로 사형수 정윤수를 만나면서 상처를 보듬기 시작한다.


실제 사형수 만나며 역할에 몰입

2004년 청룡영화제에서〈아는 여자〉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9월 4일 서울 종로의 서울극장에서 열린 첫 시사회. 이 영화와 그는 한 포털 사이트에서 올 하반기 가장 기대되는 영화와 배우로 동시에 선정됐다. 그래서인지 이날 시사회장은 임시 좌석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나영은 극중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실제 사형수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촬영 때 가장 힘들었던 장면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는 장면이었다”고 할 정도로 역할에 감정이입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어요.”

이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스무 번쯤 재촬영을 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상에서 힘들면 무심결에 죽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하는데, 앞으로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살아 있다는 건 더없는 축복이고 행복이니까요.”

드라마 <내 멋대로 해라>를 촬영할 때 그는 “죽는 게 뭐 별건가”와 “우리 그냥 살 때 살고 죽을 때 죽자”를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로 꼽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이번 영화가 그의 삶의 자세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듯하다. 그러고 보니 몸도 얼굴도 예전에 비해 훨씬 핼쑥해졌다.

이나영은 “송해성 감독님은 물론 상대역인 강동원 씨와도 호흡이 너무 잘 맞아 촬영 내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이날 그는 기자회견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동했다. 저녁 9시부터 메가박스 VIP 시사회에서 무대 인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인파가 몰리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출연 배우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극장 앞은 사람 지나다니기조차 힘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그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고, 매 신마다 힘들었지만 즐겁게 작업했으니 재미있게 봐주세요”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를 바라보던 객석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표정만으로는 참 속을 알 수 없다니까. 배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지? 그러니까 저 정도의 인기에도 스캔들 한번 없는 것일 테고.”

“참 묘한 배우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쁜데 이상하게도 섹시하지는 않잖아. 어딘지 빈틈도 많아 보이고. 꼭 미국 영화 <영혼의 집>에 나왔던 메릴 스트립 같단 말이야.”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배우로서 이나영의 매력이 모두 압축되어 있는 듯했다. 이나영이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는 사형수 윤수의 형이 집행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죽음을 코앞에 둔 윤수가 “유정씨, 저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자 유정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꾹 누르며 “사랑해”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동료들과 함께 온 뮤지컬 배우 전수경 씨는 주변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펑펑 울고 있었다. 이나영은 영화 촬영이 끝난 후 기진맥진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윤수를 잃은 유정처럼.


시사회가 끝난 후 이나영의 홈페이지 ‘나영닷컴’(nayoung.com)에 들어갔다. 그가 틈틈이 일기를 올리며 팬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재미있는 것은 팬들의 대부분이 10대 남학생이거나 20대 여성이라는 점. 이나영은 “수능 준비 열심히 하세요”라고 팬들에게 성원을 보낸다. 10대 남학생 팬이 많은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평범하게 생겨서 이웃집 누나처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게 좋아요.”

스스로를 돋보이려 하지 않지만, 어딘지 눈길을 잡아끄는 인물, 그게 이나영이다.

사진 : 이창주
  • 200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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