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사이공>의 히어로 마이클 리

스탠퍼드 의대 졸업한 교포 2세 뮤지컬 배우

사진 : 이창주ㆍMI KOREA
“한국어를 잘 못해서 죄송해요”

청바지에 검은색 면 티를 수수하게 차려입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남자 주인공 마이클 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 CD 한 장에 쏙 가려질 것 같다. 운동으로 다진 떡 벌어진 어깨, 근육이 탄탄한 팔이 작은 얼굴과 대비됐다. 공연을 앞둔 그와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 공연 중에는 커피를 포함해 카페인을 절대 입에 대지 않고, 하루 열 시간 이상 자면서 컨디션을 유지한다고 했다.

세계 4대 뮤지컬 중 마지막으로 한국에 상륙한 <미스 사이공>. 오페라 <나비부인>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미스 사이공>은 우리말 가사로 번안돼 한국 배우들에 의해 국내 초연됐다.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빚어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베트남 파병으로 라이따이한을 많이 남긴 우리에게도 공감대로 다가왔다.

지난 7월 20일 경기도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의 <미스 사이공> 공연장. 폭우가 쏟아지는 평일 저녁인데도 빈 좌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베트남 여인 ‘킴’과 미군 ‘크리스’는 꼭 껴안았다가 서로를 응시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해, 나는 달…. 어떻게 하루 사이에 여기까지 왔을까….”

두 사람의 열창이 끝나자 관객들의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애끓는 모정에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킴. 크리스가 죽은 킴을 안고 절규할 때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마이클 리는 킴과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고, 미군의 전횡을 괴로워하면서 전장에 나서고, 킴을 못 잊은 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순수하지만 나약한 크리스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 낸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교포 2세라 한국어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흐름에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다. 익숙지 않은 한국어로 노래를 하는 게 감정 몰입에 방해되지 않을까? 더군다나 들끓는 사랑을 표현하자면.

“쉽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한국어와 영어가 나란히 적힌 대본을 끼고 살다시피 했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느낌이 살아나면서 크리스의 감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미스 사이공>은 오디션부터 화제였다. 지난해 11월부터 넉 달간 총 1100여 명이 응시해 뮤지컬 오디션 사상 최다 지원자가 몰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미군 병사 ‘크리스’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부드럽고도 순수한 이미지에 고음을 감미롭게 처리하는 배우여야 했다.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제작진은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뮤지컬 배우 ‘마이클 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긴급 호출했다. 공연 도중 비행기로 날아와 오디션을 본 마이클 리는 단번에 크리스 역에 낙점됐다.


<미스 사이공>은 그에게 운명 같은 작품이다. 1995년 그가 이 작품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하면서 인생 궤도가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이다. 뉴욕 무대에서 그의 역할은 크리스의 연적이자 베트남 병사인 ‘투이’였다. 오디션에서 ‘투이’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음성이 워낙 파워풀해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역할이 ‘크리스’로 바뀌면서 그는 한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워졌다.

무대에 섰을 때 그는 베트남 병사 ‘투이’보다 작아 보였다. 그에게 “키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낀 적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내 몸 사이즈도 악기의 일부다. 키가 크든 작든 주어진 악기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스 사이공〉출연진과.

의대 졸업 후 뮤지컬 배우로 전향

1973년 미국에서 태어난 마이클 리의 한국 이름은 이강식이다. 배우가 되기 전, 그는 스탠퍼드 의대에 다니던 의사 지망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라면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전도유망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그가 왜 엉뚱하게도 뮤지컬 배우가 됐을까? 도대체 뮤지컬의 무엇이 그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을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무대 위에 설 때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한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뮤지컬 오디션을 봤다. 그리고 첫 배역으로 <미스 사이공>의 투이 역을 맡았다. 외과 의사인 아버지와 군의관인 형을 좇아 별 고민 없이 진학한 의대. 지금 돌이켜 보니 그건 ‘게으른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밤을 새워 의대 공부를 하면서도 내내 회의가 들었다. 뮤지컬은 그에게 ‘늦게 찾아온 나의 길’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직업 배우로 나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아니 그것보다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어려웠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의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1971년 부모님이 이민 길에 오른 것도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결단에서였다. 부모님은 일부러 동양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얻었다. 인구 7000명에 불과한 뉴욕 서부의 작은 마을 살라만카에 이 가족이 둥지를 튼 이유다.

“부모님은 우리를 미국인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는 늘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아버지는 농부였던 할아버지의 성실함을 이어받으셨고, 그게 내 피에도 흐르는 것 같다.”

공부는 물론, 체육이나 음악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다재다능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는 ‘원정’을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마을에는 음악 학원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닌 다섯 살배기 마이클 리와 누나, 형을 태우고 하루 세 시간씩 운전해 가까운 도시의 학원으로 데리고 다녔다. 12년 동안 한결같이. 어린 마이클은 백인 아이들에게 놀림 당해 울면서 집에 오는 날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는 그 시절 기억 한 장면을 꺼냈다.

“여섯 살 때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아버지께서 버스가 정차하는 곳마다 서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드시는 게 아닌가. 너무 신나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힘이 났다. 차를 몰고 얼른 버스보다 먼저 도착해 계셨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정류장마다 먼저 가서 백인 아이들한테 나와 친하게 지내라고 협박하셨다 한다.”

철들면서 부모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들인지 절감한다는 마이클 리. 그는 작으나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해외 공연에 늘 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대신 뮤지컬 배우를 직업으로 택한 그는 주로 동양인 배역을 맡았다. 1998년엔 로 Gerland Award에서 베스트 앙상블 상을 받았고, 1999년 록 오페라 으로 Los Angeles Ovation Award 베스트 뮤지컬 배우 후보에 올랐다. 2005년 5월엔 솔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교포 2세 배우들인 산드라 오나 다니엘 데이 킴과 친구 사이다.

마이클 리는 12년 동안 40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해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한국에 정착하고 싶다”

오디션 당시. 그는 베트남 병사 ‘투이’의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어렸을 적 꿈을 물었더니 “미국 대통령이나 유명한 록스타가 되고 싶었다”고 대답한다. 두 꿈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게 바로 마이클 리다. 한편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다른 한편에는 예술적 감수성을 분출하며 보헤미안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의사의 길을 던지고 뮤지컬 배우가 됐다. 배우가 된 것에 대해 그는 단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힘들게 공부한 것이 아까울 법도 한데, 그는 그것조차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자양분이었다고 여긴다.

그의 모습도 두 가지가 엇갈린다. 한편으론 한없이 순수한 미소년 같은데, 한편으론 무서우리만큼 단호한 프로의 모습이 엿보인다. 자유분방한 예술가 같은가 하면, 절도 있는 귀족의 모습이기도 하다.

‘크리스’의 분장실에 들어서니 팬들에게서 받은 선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꽃다발이며 영문으로 쓴 편지와 카드, 비타민제, 장생도라지 캔디…. 마이클은 “맛있어요”라며 도라지 캔디 하나를 건넨다. 분장대 위에는 그가 직접 쓴 대본이 놓여있다. 틈나는 대로 글을 쓰는데, 요즘 그는 교포 2세가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를 쓰고 있다. 흥얼거리며 즉흥 연주를 하는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다.

컴퓨터 모니터 바탕화면 가득 아내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2004년 공연하면서 만난 아내와 올해 5월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아내는 지금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미술경영을 공부하고 있다. 아내 이야기에 눈빛이 반짝이는 마이클 리. “한국 요리도 잘하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결혼식 날 가족과 함께.
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누나, 아내, 마이클 리, 형, 어머니.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한 번, 20대에 두 번, 짧은 일정으로 세 번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다고 한다. 자식들을 위해 미국행을 감행한 부모는 그 땅에서 뿌리내리려면 철저히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국어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의미일까.

“집에 돌아온 것 같다. 미국에 있을 땐 생김새만 다를 뿐 나도 그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서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게 이렇게 편안함을 주는 건지 몰랐다. 한국에서 활동이 많아지면 한국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인터뷰 내내 마이클 리와 <미스 사이공>의 ‘크리스’가 오버랩 됐다. 때론 소년같이 순수하고, 때론 한없이 진지한 모습이 하룻밤 잊지 못할 사랑을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크리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스 사이공>은 어떤 작품?


<미스 사이공>은 1985년 잡지에 실린 한 장의 흑백사진에서 출발했다. 굳은 표정으로 울먹이는 아이를 미국 아버지에게 떠나보내는 베트남 어머니. 이 사진은 <레미제라블>을 만든 콤비 알랭 부브릴(작사)과 클로드 미셀 숀버그(작곡)의 영감을 자극,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캣츠>와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

1989년 영국 런던 초연 이후 23개국 240개 도시에서 11개 언어로 공연됐으며, 세 번의 토니상을 받았다. 1991년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개막 전 3700만 달러의 예약 티켓이 팔려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캣츠>의 제작자이자 이 작품의 제작을 맡은 캐머런 매킨토시는 “런던 초연 때부터 한국 공연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꽃핀 사랑과 비틀린 운명의 삼각관계, 절절한 모성애라는 흥미진진한 주제가 미녀들의 농염한 쇼와 곁들여져 160분 동안 펼쳐진다. 주인공 킴과 크리스가 부른 사랑의 아리아 ‘The Last Night of The World’(지상에서의 마지막 밤), ‘Sun and Moon’(해와 달)이 가슴을 파고든다. 실제 헬기가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한국 공연에서는 3D 입체영상으로 처리됐다.

8월 20일까지는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9월 1일부터 10월 1일까지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문의 (02)518-7343
  • 200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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