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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좋아하는 옷이에요”

21세기형 아티스트 낸시 랭

그는 자신의 욕망을 허위의식으로 감추지 않는다. “속물”이란 비난을 받을 게 뻔한 말도 서슴없이 한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예술가란 남에게 인정받으려 안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작품과 퍼포먼스로 금기를 건드리며 사람들의 위선과 가식을 까발리기도 한다.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탄력 있는 몸매, 화사한 얼굴의 낸시 랭이 인사를 한다. 톡톡 튀고 화려한, 전형적인 ‘청담동 오렌지족’ 모습이다. 끊임없이 화제를 일으키며 포털 사이트 예술인 검색 1~2위에 오르는 인물, 낸시 랭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도대체 낸시 랭이란 이름이 뭐야? 국적 불명이잖아. 변호사까지 동원해 이름을 바꿨다며?”

“그 여자가 하는 게 예술이야? 그저 튀고 싶어서 안달인 요즘 젊은 애들과 다를 게 뭐 있어?”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렬한 지지자도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nancylang.com)에서도 찬반 격론은 맞붙는다. 그런데 낸시 랭, 어떤 악담에도 구구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람의 활동 범위는 결코 만만치 않다. 홍익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부지런히 전시에 참여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다작(多作) 작가로 꼽힌다. 최근에는 《아티스트 낸시 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이라는 미술 책을 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부터 현대 작가 매튜 바니까지 미술사의 주요 장면들을 꿰뚫으면서 자신의 작품으로 패러디하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다른 한편의 그는 연예인과 흡사하다. 텔레비전 CF에 등장해 탭댄스를 추는가 하면 케이블 음악 채널 Mnet의 프로그램 ‘트렌드 리포트 必’의 진행자로 매일 출연한다. 몸매를 드러낸 비키니 차림의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KBS <파워 인터뷰> 패널로 참여했을 때는 “여자 나오는 술집 가 보셨어요?” 같은 직설적인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언니의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 좋아요” 라며 열광하는 팬도 많다.
또 있다. 그는 얼마 전 쌈지와 손을 잡고 ‘낸시 랭 라인’을 론칭했다. 디자이너가 아닌, 아티스트의 이름이 패션 브랜드 명으로 쓰이기는 처음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초미니에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의 옷을 디자인하면서 ‘낸시 랭 라인’의 아트 디렉터와 모델까지 맡았다. 그에게 있어 예술가로서의 작업과 다방면의 활동은 서로 섞이고 넘나든다. 텔레비전 CF나 ‘낸시 랭 라인’ 옷에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집어넣고, ‘트렌드 리포트 必 ’의 오프닝을 자신의 퍼포먼스로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처럼 꿈과 열정이 넘치는 소녀들 중 ‘리틀 낸시’를 선발해 퍼포먼스나 패션쇼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대중을 좋아하고, 대중과 가까운 아티스트가 또 있었던가? 아티스트라면 세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고, 고상한 말을 할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그는 무참히 깨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10대 팬들을 몰고 다니는 낸시 랭./font>
‘이 사람을 예술가라고 불러야 하나?’

자, 긴장하시라. 그게 바로 낸시 랭이 의도했던 바일지도 모르니. ‘복제품이 넘치는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게 현대미술의 중요한 화두다. 그의 ‘쌩쇼’가 ‘저게 과연 예술인가 아닌가’ 고민하게 만들었다면,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의 화두를 일깨운 셈이니 ‘절반의 성공’일지 모른다.

낸시 랭은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저녁 6시 30분까지는 쌈지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했다. 일에 있어서 그는 명확하고 철저한 비즈니스맨에 가까웠다. 인터뷰 약속을 할 때 그는 “제가 아티스트라서요”라며 자신이 원하는 사진작가가 촬영하게 해 달라고 했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며. 사진작가에게 “오빠~”를 연발하는 애교가 뚝뚝 흐르는 말투. 그런데 그 속에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은 분명한 의사 표명이 숨겨져 있었다.

“오빠~. 꼭 이걸로 해죠. 약속!”

촬영이 끝난 후 그는 물 한잔 앞에 놓고 인터뷰에 응했다. “배고플 텐데 식당으로 옮겨 밥 먹으면서 할까요?”라는 제의에 “저, 먹으면서 인터뷰 못 하거든요”라고 거절한다. 낸시 랭이 가볍다고? 그는 너무 진지했다. 순간순간 열중하고, 몰입하고, 에너지를 쏟았다. 11시 가까이까지 그는 저녁도 거른 채 이야기를 했다.

낸시 랭이 유명해진 것은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하이힐에 란제리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를 하면서였다. 초대받지 않은 작가였던 그는 광장에서 퍼포먼스를 했고, 함께 간 친구가 그 장면을 촬영했다.
명화를 차용하고 갖가지 이미지를 혼합한 ‘터부 요기니’ 시리즈.
“비엔날레 주제가 ‘꿈과 갈등’이었어요.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바이올리니스트는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그가 계속 발표해 온 ‘터부 요기니’ 시리즈도 꿈과 관련이 있다. 그는 로봇 몸통에 모나리자나 비너스, 조선시대 미인도의 얼굴, 서양 여자아이 등 갖가지 인물을 합성해 요기니를 만든다. 신과 인간 사이 영적 메신저인 요기니. 인간이 갈망해 온 퇴색된 꿈을 풀어 주는 존재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꿈은 뭘까?


“서울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드는 게 내 꿈”

“서울을 뉴욕이나 파리 같은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세계적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겠다”며 “아이 러브 달러”를 외친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피카소와 달리, 앤디 워홀, 싫어하는 작가는 반 고흐다.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외로움과 가난에 내몰린 고흐의 삶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그는 반발한다. 그런 예술가상을 강요하는 건 잔인하다며. 피카소와 달리, 앤디 워홀은 천부적 예술가로 쇼맨십이 엄청났고, 살아서 부와 명성을 누리며 추종자가 많았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그가 가난한 예술가상에 넌더리를 내는 데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도 작품 재료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색한 시절을 겪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추락이었다. 그는 필리핀의 국제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영어에 능통해진 것도, 낸시 랭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도 이때였다. 졸업 후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귀국하라고 했다.

대학시절 그의 집안은 갑자기 기울었다. 별 부담 없이 명품을 척척 사들이던 그가 등록금과 작품 재료비를 걱정해야 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롭게 눈을 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햇빛이 쏟아져 내렸어요. 갑자기 성경의 달란트 비유가 생각나면서, 내가 가진 달란트를 개발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비튼 〈화장하는 교황(좌), 터부 요기니로 분장한 퍼포먼스.
(우)

‘너 자신이 돼라(just be yourself)’는 깨달음을 얻었고, 꿈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허위의식으로 감추지 않는다. “속물”이란 비난을 받을 게 뻔한 말도 서슴없이 한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예술가란 남에게 인정받으려 안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작품과 퍼포먼스로 금기를 건드리며 사람들의 위선과 가식을 까발리기도 한다. 육체적 관능미를 그대로 노출하는 비키니 차림의 그는 너무나 당당해 ‘아저씨, 저를 똑바로 보란 말이에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러면서 몰래 엿보는 관음증에만 익숙한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루이 비통이 너무 좋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루이 비통을 위한 작품까지 만들었다. 미술과 패션이 다를 게 없다며 “이왕이면 쌈박한 것을 입고 싶다”는 욕망과 “이왕이면 새로운 것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적 욕망은 ‘쌤쌤’이라고 말한다.
천재적 예술가상, 독창적 작품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사라진 현대미술. “앞 사람들이 다 해놓았으니 더 할 게 뭐있냐”며 그는 작품을 가지고 논다. 앵그르의 ‘터키탕’을 차용해 찜질방에서 연출 사진을 찍고, 벨라스케스의 근엄한 초상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화장하는 교황’으로 바꿔 버린다.

예술과 패션, 예술과 상업,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 종횡무진 영역을 넘나들며 벽을 무너뜨리는 그에 대해 평론가들은 ‘21세기형 아티스트’라고 평가한다.

그는 절대 아는척, 근엄하게 말하지 않는다. “예술이 비키니처럼 가벼워져 어디든 훨훨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왜 비키니를 입고 퍼포먼스를 하는가?”라고 물으니 “비키니도 옷이에요. 제가 비키니를 좋아하니까요”라고 답한다. 현대미술의 화두를 담고 있는 그의 작업에서 함의(含意)를 읽어 내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오는 7월, 그는 리츠 칼튼 호텔에서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후원 파티를 연다. 지원자들로부터 계획서를 받은 후 금기 숫자인 13명의 예술가를 선발해서 후원한다는 계획. 아직 20대인 낸시 랭의 행보가 한국 예술계에 어떤 충격을 주며 판도를 바꿔 나갈지 기대된다.◎
글 이선주 TOP CLASS 기자 | 사진 김한준
  • 2006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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