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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속으로 뛰어든 마에스트로 정명훈 서울시향 음악감독

“여러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소리를 이끌어 내세요.”

지난 1월 19일 서울시향 연습실. 다음 날 있을 ‘예술의 전당’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는 서울시향 단원들은 정명훈의 지휘봉 아래 거듭나고 있었다. 2005년 예술고문을 거쳐 2006년 1월,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정명훈은 단원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왔다.

1월 6일 신년음악회를 필두로 10, 13, 16, 17, 18, 20일까지 정명훈은 1월 한 달간 일곱 차례에 걸쳐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이 중 세 차례는 중랑구와 은평구, 구로구 등 서울의 ‘문화 소외지역’을 직접 찾아가서 연 공연이다. 1월 16일 저녁 구로구 연세중앙교회 연주회를 찾은 관객은 2만여 명. 예배당의 1만 5,000여 좌석이 다 차는 바람에 5,000여 명은 바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클래식 공연 사상 최다 관객으로,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한국의 클래식 대중화에 거센 바람을 몰고 온 것으로 평가됐다.

단숨에 사람들을 움직이는 정명훈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며, 그가 한국의 교향악단에 심은 꿈은 무엇일까? 그와 시향 단원들 사이의 호흡 맞추기를 지켜보면서 그 단초를 엿봤다. 리허설 장에서 단원들의 눈과 귀는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정명훈에게 쏠려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기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명훈은 말보다 몸짓과 눈짓으로 그들과 소통했다. 음악 흐름에 따라 그의 몸놀림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웠다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트럼본! 피아노(P. 여리게)로 시작해 포르테(F. 세게)로 가 보세요. 라라랄라~ 이렇게.”

“다시 포르테에서 피아노로.”

“이제 중간 세기를 찾아 연주하세요.”

트럼본 주자는 같은 소절을 일곱 번에 걸쳐 반복 연습했다.

“자, 이제 다 같이!”

단원들이 다시 함께 연주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휘자의 손끝 하나에 이렇게 다른 음악이 되다니!’

다음 날 베토벤 교향곡 4번과 5번(운명)을 연주한 서울시향은 “1주일 만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토벤 교향곡 전곡(1~9번)을 연주하겠다”고 선언한 후 첫 공연이었던 1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연주와 비교할 때 훨씬 여유 있고 박진감 넘치는 연주를 보여 줬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이에 대해 서울시향 관계자는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이나 구석구석 청중을 찾아가는 것이나 모두 단원들을 위한 정명훈의 인텐시브 훈련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정명훈의 특장은 게르만계보다는 베르디 같은 라틴계 음악에 있다. 그럼에도 베토벤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음악적 형식이나 표현, 내용에서 베토벤이 교향곡의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톱 클래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연주 교과서’인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게 시향에 더없이 좋은 훈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단체 지압 받아야겠다”는 서울시향 단원들

연습장에서 정명훈은 단원들을 무서울 정도로 몰입시킨다. 한 악기, 한 음도 놓치지 않는 치밀함에 “깊이, 더 깊이”를 반복하며 내면의 영적인 소리까지 끌어내기를 요구한다. 연습시간에 너무 긴장해 끝나고 나면 “단체로 지압 받으러 가야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서울시향의 한 단원은 정명훈에 대해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지만, 스스로 열심히 연습하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한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서울시향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2005년 3월 31일 이들은 서울시청 앞 야외 광장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서울시향 예술고문이 된 정명훈이 “전 단원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정리해고나 다름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친 오디션에서 90여 명 시향 단원 중 3분의 1이상이 바뀌었다. 정명훈은 하루 10여 시간 2~3일 연속 오디션을 강행하면서 시향에 꼭 필요한 연주자를 가려냈다. 유럽에서 활동할 때 “100명을 오디션해 2명밖에 못 뽑은 적도 있다”고 고백하는 ‘완벽주의자’ 정명훈으로서는 고문 같은 일이었으리라.

이 과정에서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는 유학파가 떨어지고 음대를 갓 졸업한 음악도가 합격하는 이변이 속출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함께 연주하는 데 방해가 되겠다 판단되면 솎아 냈다. 대신 음정과 리듬이 정확한, 기본에 충실한 사람을 뽑았다. 지난해 서울시향을 세 차례 지휘하며 숨고르기를 했던 그는 올해 초, 자신이 그리는 서울시향의 모습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지휘자가 되기 전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일곱 살 때인 1960년, 서울시향과 협연하면서 데뷔했으니 그와 시향의 인연도 묘하다.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손이 건반에 잘 닿지도 않는 어린 연주자의 등장에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던 게 기억난다고 한다.

정명훈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첼리스트 정명화 등 자녀들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 낸 어머니 이원숙 씨는 정명훈에 대해 “말 없고 속 깊은 아이였다”고 한다. ‘말 없는 아이’의 집념은 무서웠다. “난 세상에서 피아노하고 초콜릿이 제일 좋아”라고 말하던 일곱 살 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데려갔더니 “열여섯 살이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라고 했다. 열다섯 살 때 처음 뉴욕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갔을 때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애를 왜 나한테 데려왔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한나절을 울고 난 그는 끼니도 거르면서 2주 동안 피아노 앞에서 살았고, 완전히 달라진 실력으로 그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스물한 살 때인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할 정도로 전도양양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지휘로 전공을 바꿔 25세 때인 1978년,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발탁됐다. 그는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전향하면서 “날카로운 완벽주의자였던 고독한 음악가에서 좀 더 조화로운 성격으로 바뀐 것 같다”고 한다. 세계적인 지휘자 반열에 오르면서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 도쿄 필하모닉 예술고문 등을 맡았는데,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에 필적한다.

그의 집념은 요즘 서울시향으로 향하고 있다. 일곱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한 번도 한국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는 그. 한국의 교향악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는 게 수십 년간 간직해 온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는 꽃이 아니라 나무”라는 말을 자주 한다. 1년짜리 꽃이 아니라 수십 년간 뿌리를 내리고 자랄 나무를 가꾸듯 성장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시향에 대한 그의 계획도 그래서 집요하지만 성급하지 않다.

서울시향이 유아기를 거쳐 자신의 발로 설 수 있는 때를 그는 2009년 노들섬에 전용 콘서트홀이 건립되는 시기로 잡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세계적인 수준이 된 시향을 이끌고 세계로 나갈 생각이다. 그래서 “전용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첫 번째 연주회에서 냉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주문했다. 콘서트홀 건립이 연기되자 그는 일단 세종문화회관의 음향시설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려면 단원들의 기량과 지휘자의 열정, 이를 지원할 시스템 등 3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꿈꾸고 있는 그림은 “잘 짜여진 시스템 안에서 좋은 연주를 하는, 단원들이 행복한 오케스트라”다. 목표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요구도 명확하다. 지방 시립교향악단에도 뒤지던 처우를 대폭 개선해 우리나라에서 최고 대우를 받게 만들었고, 단원들을 지원하는 조직도 대폭 확대했다. 대신 레슨 다닐 시간도 없이 계속되는 연습으로 서울시향은 도약을 위한 발돋움을 하고 있다.

“소외된 지역을 직접 찾아가 연주하겠다”는 것도 정명훈의 아이디어였다. 클래식 공연장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클래식 애호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그는 실천에 옮겼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후미진 동네에 세계적인 거장이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흥분했다. ‘동네 음악회’는 올해 내내 계속된다.


음악가 아니면 요리사 됐을 것


아내를 위해 요리를 준비하는 정명훈(왼쪽)과 프랑스 프로방스의 별장(오른쪽). 사진제공 《정명훈의 Dinner for 8》(동아일보사)
음악을 빼고 나면 정명훈의 삶은 심심할 정도로 소박하다. 그의 1년 사이클은 서울시향과 음악감독으로 있는 프랑스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예술고문인 일본의 도쿄 필하모닉 3개의 축으로 움직인다. 서울에 있는 동안 시향에 출근하면 음악감독실과 연습장 두 군데만 오간다. 점심도 방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피아노를 치거나 악보를 연구한다는 것. 가끔 아내가 찾아오면 함께 청계천에서 산책을 하는 게 유일한 휴식이라고.

그의 아내 구순열 씨는 누나 정명화 씨의 시누이여서 겹사돈을 맺은 셈이다.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네 살 연상의 ‘사돈 누나’와 결혼한 그는 가족에 대해 ‘기적’이라고 말한다. 세 아들 진, 선, 민을 볼 때면 그의 얼굴은 희열에 젖는다. 큰아들은 미국 브라운대 영문과를 졸업한 작가 지망생. 작은아들은 재즈, 막내아들은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볼보 웨건에 태우고 밥을 해 먹이며 집시처럼 연주여행을 다녔다는 그는 “애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거나 음악교육을 특별히 시킨 적이 없다”고 한다.

가족이 모여 있는 날이면 그는 하루 종일 요리를 한다. 아침엔 김치찌개, 점심엔 스파게티, 저녁엔 남은 치즈로 라자냐를 만드는 식이다. 이민 초기 그의 부모는 워싱턴 대학 앞에 한식당을 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주방 일을 책임졌던 그는 그때부터 요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스파게티 소스를 선물하는 게 기쁨이다. 서울시향의 오병권 공연기획팀장은 “정명훈 씨와 함께 요리 재료를 사러 간 적이 있는데, 그렇게 행복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정명훈은 “요리와 지휘는 유사한 게 많다”고 한다. 갖가지 재료로 요리를 만들 듯 지휘자는 각기 다른 연주자들을 조화시켜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맛있는 요리를 해 줄 때와 청중에게 최선을 다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요리를 통해 일상의 여유와 균형을 지킨다며 “요리를 사랑하는 음악가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정명훈

1953년 서울 출생 1960년 서울시향과 협연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입상 1975년 미국 매니스 음대 피아노과 졸업 1976년 뉴욕 청년 심포니 지휘로 지휘자 데뷔 1978년 미국 줄리어드 음대 졸업 1989~1994년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1997년 아시안 필하모닉 창단 1997~2003년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2000년~현재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 2001년~현재 도쿄 필하모닉 특별 예술고문 2006년 1월~현재 서울시 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 200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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