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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나폴레옹 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글 장원재 축구칼럼니스트·숭실대 문예창작과 조교수

글쓴이 장원재 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기술분과위원회 위원,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올림픽의 숨은 이야기》 등이 있다.
2005년 11월 27일 인천 유나이티드와 울산 현대의 K리그 챔피언 결정전 1차전 경기가 끝났다. 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경기장 근처 병원에 입원 중이던 정기동 국가대표팀 골키퍼 코치의 딸을 찾아갔다. 그는 병석에 누워 있던 정 코치의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아빠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다. 나는 너희 아빠가 자랑스럽다.”

그 말을 듣는 환자복을 입은 소녀의 가슴속에선 어떤 물결이 일어났을까.

한 남자가 대한민국을 흥분시키고 있다. 딕 아드보카트. 1947년 9월 27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사나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손을 대는 곳마다 희망의 분수를 뿜어 올린 사람. 축구팬들은 단지 감독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토록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느냐며 환호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 축구 전문가들 사이에선 ‘2006년 비관론’이 암세포처럼 번져 나갔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팀 성적의 최대치는 예선전에서 내용 있는 경기를 보여 주는 정도라는 것이 객관적 평가였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부진한 경기가 이어지면서 비관론은 세를 불려 갔다. 두 번의 대표팀 감독 경질은 한국 축구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신호였다. 아드보카트가 사령탑을 맡아 대(對) 이란전, 스웨덴전, 세르비아-몬테네그로전을 치르는 와중에 외신들은 한국이 전력만 좀 더 가다듬으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경기력을 넘어설 수도 있으리라는 관측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이 기적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축구팬들은 “왜 진작 이런 명장을 감독으로 불러오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는 한국 축구가 영입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다. 세계 최강권의 네덜란드 대표팀 수석코치(1984~1987년, 1990~1992년)와 감독(1992~1994년, 2002~2004년)직을 각각 두 차례 역임하고, 그 중간중간에 필립스 아인트호벤(네덜란드), 글래스고 레인저스(스코틀랜드), 보루시아 MG(독일) 같은 유럽 명문 구단의 사령탑으로 쉬지 않고 활동했다는 것. 언제나 그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아드보카트의 연령과 경력을 감안하면 그는 언제나 세계 축구의 중심권에 자리했던 사람이다.

그는 축구에 미친 사나이다. 오직 축구만을 생각하며, 팀 운영에 목숨을 건다.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 자리는 우리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다. 연봉이 히딩크 이후 파격적으로 상승했지만, 성과급을 제외한 연봉은 여전히 70만~100만 달러 수준이다. 수입만 생각한다면 한국 대표팀보다 몇 배의 연봉을 제시하는 곳은 세계 곳곳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그렇다면 한국 대표팀이 아드보카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무엇인가. 아드보카트와 접촉할 당시 전 세계적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 단 여섯 개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본선 진출국(혹은 진출 예상국) 중 감독 자리가 비어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대한축구협회는 일종의 특수를 누리며 세계적인 거장들을 후보 명단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월드컵 때문에 아드보카트가 한국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평생을 두고 추구했으되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이 있다. 한국팀 감독 이야기가 막 오고 갈 무렵 그가 지인들과 상의했던 내용들을 조각처럼 이어 붙이면, ‘아드보카트의 대한민국 구상’은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토털 사커’를 아는가. 각자가 자기 포지션을 지키며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수비의 구분 없이,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는 획기적인 전술. 네덜란드는 이 혁명공약을 들고 1974년 월드컵에 입성,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초토화시켰으나 결승전에서 홈팀 서독에게 1 대 2로 분루를 삼켰다. 4년 후, 이번에는 좀 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토털 사커로 정상 정복에 도전했으나 결승전에서 홈팀 아르헨티나에게 연장전 끝에 1 대 3으로 패했다.


한국은 ‘개량형 토털 사커’ 시험장

아드보카트는 ‘토털 사커’의 완성, 즉 토털 사커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을 택했다.
이 토털 사커의 창시자가 리누스 미셸이라는 네덜란드 명장이다. 아드보카트는 이 거장 밑에서 두 번이나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대표팀 수석코치로 일했다. 토털 사커는 선수 개개인에게 고유 포지션을 부여한다는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매 순간마다 모든 공간마다 끊임없이 돌발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 축구의 속성이므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올바른 경영방법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토털 사커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순간적인 방심이나 아차 하는 실수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토털 사커는 사소한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네덜란드가 1974년, 1978년 월드컵 연속 준우승에 머문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토털 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셸과 함께 영광과 좌절을 맛본 아드보카트는 필생의 작품 ‘개량형 토털 사커’의 완성을 위해 한국이라는 실험실을 택했다. 아드보카트가 한국에서 구현하려는 모델은 시차제 토털 사커다. 경기 시작 15분 내에 화력을 집중해서 1차 승부를 걸고, 65분을 고정식 혼합축구로 경기하며 보합으로 버틴다. 다시 마지막 10분에 토털 사커 모드를 가동하며 마무리 짓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가? 아드보카트는 선수 개개인이 언제 어떤 경우든 팀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헌신한다는 면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팀에게서 찾은 것이다. 그가 한국 선수들의 장점에 대해 평한 말이 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양쪽 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포지션의 분업화가 고도로 이뤄진 유럽에서는 일류 선수들이라도 한쪽 발만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토털 사커는 양발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많은 수의 선수들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그 초보적인 실험조차 시도하기 어렵다. 여기에 히딩크 감독 당시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한국 선수들의 체력 수준, 팀 전체에 대한 선수들의 헌신성을 더하면 아드보카트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실험실로 한국보다 더 적합한 나라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드보카트가 2006년 1월 해외 전지훈련을 통해 보완하려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전략적 유연성, 즉 초반과 종반에만 토털 사커 모드를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면 단 10초 이내에 전술 모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거대한 실험 말이다.

이 훈련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3월 이후 아드보카트의 마지막 담금질이 시작될 것이다. 월드컵 16강전, 남은 시간은 7분, 스코어는 1 대 3으로 두 골을 뒤져 있는 상황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위기를 타파하고 벼랑을 기어오르는 족집게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연금술사 아드보카트가 자신만의 비방(秘方)으로 한국에 건네줄 다음 보석을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 이제 우리는 이기기 위해 독일로 갈 수 있다. ■
현역 시절엔 그저 그런 선수

아드보카트 감독은 현역 시절 열심히는 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그저 그런 선수였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는 데도 실패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수비형 미드필더로 아도 덴 하그, FC 덴 하그, 로다 JC 등 네덜란드 1부 리그에서 451경기에 출전했다. 선수 시절 그의 별명은 ‘`황소’였다. 선수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네덜란드 기자들은 `“‘싸움소’ 에드가 다비즈(토트넘)를 연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키는 작지만 당당한 체구에 엄청난 체력과 저돌적인 플레이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성격은 굵고 선명한 직선이다. 네덜란드 언론이 그린 아드보카트 감독의 캐리커처를 보면 나폴레옹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작은 장군’이라는 그의 별명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저돌성과 다혈질적인 면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수 시절 그의 별명은 ‘황소’였다. 그러나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지도자로 변신한 아드보카트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두 차례나 맡을 정도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비판적인 여론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금세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잡은 후에는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도 불편한 관계였던 언론과 촌철살인의 농담으로 이미 기자들을 아군으로 만들었다. 베일에 싸여 있는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늘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굳이 공식적으로 말하자면 부인 한 명이 있고, 아들과 딸이 있다. 물론 더 많은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며 슬쩍 피해 간다.

그는 특별한 취미가 없다. 오직 축구만을 생각하며, 팀 운영에 목숨을 건다. 세 차례의 합숙 훈련에서 드러난 그의 리더십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전형을 보여 줬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이렇다 보니 선수들의 눈에는 빛이 나고, 생기가 넘친다. 대표팀 훈련을 보좌해 주는 스태프들 역시 “그동안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체계가 잡힌 느낌”이라며 우호적 반응이다.

짧은 기간에 선수단도 완전히 장악했다. 아드보카트호에는 스타가 없다. 천하의 박지성이라도 아드보카트 감독의 눈 밖에 나면 끝이다. 네덜란드 대표팀 코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그는 당시 최고의 노장 스타였던 루드 굴리트를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엔트리에서 제외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또 유로 2004를 대비해서는 아약스파와 비(非)아약스파로 `당파싸움을 하던 대표팀을 하나로 묶어 지휘력을 인정받았다.

글 김성원 스포츠조선 기자
  • 200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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