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CEO 朴正熙 경영학 강좌 ( 8 ) 측근 관리의 성공과 실패

JP와는 환상의 콤비, 車智澈과는 죽음의 동반자

명확했던 주연과 조연 역할 분담

김종필 자민련 총재(선글라스)가 1971년 어느 날 경호실장 박종규와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관전 중인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누가 뭐래도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이다. 그는 처삼촌인 朴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혁명을 주도했고 그 朴대통령으로부터 박해를 당해 한때 정계를 은퇴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측근들에게 金鍾泌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했으나 1978년에 그는 대통령 비서실에 지시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JP를 세우는 방도를 연구하도록 했다. 朴대통령은 또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은밀한 일들은 만만한 JP에게 맡기기도 했다.

한국 역사상 朴正熙와 金鍾泌 콤비는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힐 것이다. 朴-金콤비는 권력을 잡은 점에서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 권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국민국가의 뼈대를 만들고 그 속을 채웠다. 이 성공은 主演(주연)과 助役의 역할 분담이 명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金鍾泌은 朴대통령에게 대들기는 했지만 朴대통령을 밀어낼 생각을 한 적은 없다. 朴대통령은 JP의 측근들이 그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간혹 탄압은 했지만 JP를 경쟁자로 보거나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朴대통령 시절에 명멸했던 많은 실력자들이 있었다. 李厚洛, 金正濂, 金成坤, 尹必鏞, 朴鍾圭, 姜昌成, 金載圭, 車智澈 등등. 이들과 金鍾泌의 차이는 컸다.

金鍾泌은 여권 내에선 朴대통령 다음가는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이것을 뒷받침한 知的 교양과 인간적 폭과 깊이도 있었다. 이것이 그를 朴대통령에게 종속적이지만은 않도록 했다. 그는 朴대통령이란 태양을 도는 행성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恒星이었다.

朴대통령은 야당의 兩金氏(김대중, 김영삼)를 상대할 수 있는 여권의 스타로서 JP의 가치를 인정했다. 朴대통령은 또 JP에게만은 자유로운 공간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실상 끝난 것은 1975년 말 金鍾泌이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때이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선포는 헌정을 중단시키고 1인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朴대통령은 이로써 그가 존경하던 나폴레옹처럼 두 번 쿠데타를 한 사람이 되었다. 1973년에 그는 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이 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姜昌成 육군 보안사령관을 시켜 尹사령관 세력을 숙청했다. 이는 李厚洛 정보부장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도 尹장군처럼 된다는 생각에 이른 李厚洛이 신뢰회복을 위해 고안해 낸 것이 金大中 납치라는 죽을 꾀였다. 金大中 납치사건은 일본에서 反朴 여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은 李厚洛의 몰락을 불렀다.

일본 내의 反朴 여론에 영향을 받은 재일동포 文世光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1974년 8월 15일 朴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陸英修 여사를 죽인다. 陸여사는 朴대통령의 권력남용과 사생활에서의 탈선을 견제한 사람이었다. 이 견제역이 사라지자 朴대통령은 자기 통제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 1년 뒤 철권통치자의 완충역과 다소의 견제역을 맡았던 金鍾泌마저 권부에서 물러나니 朴대통령은 홀가분해졌지만 여기에서 10·26 사건의 씨앗이 커 올라오게 된다.

그 뒤 朴대통령의 행적을 보면 권력을 관리하는 데서 과거처럼 냉정하지도 비정하지도 못했다. 그는 車智澈의 권력남용을 못 본 척한 정도가 아니라 허용했다. 車智澈을 견제할 장치도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권력기관 사이의 견제시스템이 마비되었다.


車智澈에게 독점당한 대통령

경호실장이 군부의 인사에 개입하면 권력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데도 朴대통령은 車실장이 군 수뇌부를 부하 다루듯 하는 것을 방치했다. 정보부장 자리에 무능하고 우직한 金載圭를 앉힌 것은 그의 충성심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겠지만, 1978년 말에 권부 내에서 조정자 역할을 잘 하던 金正濂 비서실장마저 駐日대사로 보내고 사람만 좋은 金桂元씨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실수였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이 金실장의 업무영역으로 들어가 매일 아침 비서실장보다 먼저 대통령에게 정보보고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金비서실장은 고향과 군대 후배인 金載圭 정보부장과 가까워졌다. 金실장은 車실장과 金부장 사이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 셈이다.

최근 사석에서 金鍾泌 전 총재는 10·26 시해사건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金載圭 정보부장이 JP의 집으로 찾아와서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이제부터 정보부의 임무가 바뀌었습니다』

하도 엄숙하게 이야기해서 JP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게 뭡니까. 새로운 임무라는 것이?』

『각하를 종신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입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총리께서도 알아 두십시오』

그 다음날부터 정보부는 JP 집 주변에 감시역을 배치하고 측근 인사를 불러가 매질을 했다. 화가 난 JP는 청와대로 들어가 朴대통령을 만났다.

『제가 역적 모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의 답이 이랬다.

『뭐 그럴 수도 있지』

JP는 그때부터 대통령이 찾지 않는 한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辛格浩 롯데회장이 JP를 찾아와서 롯데호텔을 못 짓게 되었다고 호소했다. 50층 이상으로 올리도록 설계하여 짓고 있는데 車智澈 경호실장이 청와대가 보이는 곳이라면서 고도를 반으로 줄이라고 했다. 車실장은 또 남산 타워도 청와대를 조준하는 곳으로 이용될 수 있으니 전망대를 없애려고 했다.

JP가 청와대로 들어가서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경호상 아무 장애가 없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車실장이 그런 결정을 해서 올렸는데, 車실장에게 가서 부탁해 봐』라고 말했다.

JP는 대통령이 예전 같지 않게 한 사람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車실장은 대통령을 독점하고 싶어 했고 거의 그렇게 되었다. 문제는 대통령이 車실장에 대한 견제장치를 전혀 작동시키지 않아 車실장에 대한 金載圭의 불만이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가되어 총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10·26 사건 그날 朴대통령의 권력측근으로서 궁정동 식당에 있었던 세 사람(金載圭, 金桂元, 車智澈)은 金鍾泌, 李厚洛, 金成坤, 吉在號 같은 전 측근인사들에 비교하면 知的, 인간적 면에서 많이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朴대통령의 그런 종말은 주변에 뛰어나고 까다로운 사람들보다는 편한 사람들을 갖다 놓고 이들을 제대로 감시, 견제하지 않고 안주했기 때문이었다. 권력자이든 CEO이든 싫은 소리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는 것은, 또 그런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위기의 징조일 것이다. ■
  • 200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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