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세계 명소 기행| 프랑스의 오랑주 로마극장

프랑스의 남쪽 지중해 연안 지방에 프로방스란 지역이 있다. 마르세유와 아비뇽, 그리고 툴롱이 주요 도시다.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오랑주(Orange)라는 고도(古都)가 있다. 인구 2만 8,000명 정도이다. 이 도시에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된 로마시대 극장이 있다.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극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만들어졌다. 예수가 태어나기 한 세대 전이다. 반원형(半圓形)인 오랑주 극장은 무대의 뒤를 막은 벽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렇게 남아 있는 로마시대 극장은 터키와 시리아에 하나씩 있을 뿐이다. 무대 뒷벽의 가로 길이가 100m, 높이가 38m, 무대의 폭이 약 30m다. 원형극장에 들어선 의자 수를 계산하면 약 7,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을 좋아했던 루이 14세는 이 오랑주 무대 벽을 구경하고는 “프랑스에 있는 최고의 성벽”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오랑주 극장은 죽은 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공연이 계속되는 살아 있는 극장이다. 필자가 지난 6월에 갔을 때는 공연준비를 하기 위해서 무대 설치 공사가 한창이었다. 유럽의 역사적 건물은 골동품이나 고고학적 연구대상으로 죽어 있지 않고 민중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물이다.

이 로마극장의 무대와 오케스트라석은 요사이의 오페라 하우스처럼, 관중석과 통로는 야구장처럼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로마시대 극장은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관중석을 언덕의 비탈에 설치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무대 벽의 한가운데에 벽감(niche)을 파고 3.5m 높이의 장군 석상(石像)을 놓았다. 이 장군상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추정되는데 서기 2세기 작품이다.

오랑주를 포함한 이 지역은 시저가 정복한 갈리아 지방이다. 로마는 제2군단 제대병들을 이곳에 살게 하면서 토지를 나눠 주고 식민지로 개발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곳에는 반드시 이런 극장이 남아 있다. 프랑스 남부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리비아, 아시아의 터키 지역에도 반원형 극장이 보인다. 지중해 연안의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는 민중들이 정치에 신경을 덜 쓰게 하도록 이런 극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오랑주의 로마극장 안에는 19세기까지 민가(民家)가 들어 있었다. 이들을 철거하고 지금의 모습대로 보수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이 오랑주엔 또 로마 식민지 시대에 만든 개선문도 있다.

오랑주는 작은 도시이지만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가문의 고향이었다. 지금 네덜란드 왕가가 바로 이 오렌지(오랑주의 영어 발음) 가문이다. 12세기부터 오랑주는 오렌지 가문이 공국(公國)으로 다스렸다. 복잡한 결혼을 거쳐 이 오렌지 가문은 독일의 나소(Nassau) 공국도 통치하게 되었다. 16세기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대해 독립전쟁을 일으킬 때 칼빈주의 신교도들은 역시 칼빈주의자인 오렌지 공(公) 윌리엄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그는 침묵 공(公)이라고 불렸다.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의 챔피언을 자임한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런 관용의 정신이 그 뒤 네덜란드의 한 국풍(國風)이 되었다고 한다.

이 오랑주는 가톨릭이 지배한 프랑스 지역 내에 있었으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신교도들이 살았다. 윌리엄 침묵 공은 영국 해적들을 고용하여 스페인과 싸워 네덜란드 독립의 길을 열었으나 암살당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1672년 네덜란드는 루이 14세가 이끄는 유럽 최강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국토의 반을 빼앗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또다시 오렌지 가문에 구국을 호소한다. 21세의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군대의 집정관이자 총사령관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둘러싸고 있던 제방을 무너뜨려 섬처럼 고립시키는 방법까지 써서 프랑스 군대의 진격을 저지했다. 윌리엄 3세는 그 뒤 30년간 유럽의 신교도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對)프랑스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영국 왕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와 결혼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친(親)가톨릭 정책을 쓰자 신교도 귀족들이 윌리엄 공을 극비리에 왕으로 초빙하는 공작을 꾸몄다. 1688년 윌리엄 공은 네덜란드 해군을 총동원하여 200척의 상선에 1만 2,000명의 병력을 태우고 49척의 군함으로 호위케 한 뒤 영국에 상륙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나 루이 1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영국 신교도들에 의해 윌리엄 3세로 추대된 오렌지 공은 네덜란드의 집정관 자리도 유지했다. 한 사람이 두 해양국가의 원수(元首)를 겸하게 된 것이다. 윌리엄 3세는 영국 국회가 하자는 대로 《권리장전》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 발전에 이정표가 될 만한 양보를 많이 했다. 이를 역사는 ‘명예혁명’이라고 기록했다. 윌리엄 3세의 목표는 루이 14세 봉쇄였으므로 여타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웠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주축으로 한 대(對)프랑스 연합전선―이를 대연합(Grand Alliance)이라 불렀다`―`을 형성하여 루이 14세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2중 왕위의 권위를 이용했다. 윌리엄 3세는 사사건건 루이 14세의 팽창정책을 저지했는데 결정판은 스페인 계승전쟁이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죽자 루이 14세는 손자를 왕위에 앉혀 스페인을 송두리째 먹으려고 했다. 영국 왕이자 네덜란드 집정관인 윌리엄 3세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유럽 연합군을 조직하여 11년간의 전쟁을 통해서 루이 14세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스페인 계승전쟁을 마무리 지은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서 오랑주는 비로소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프랑스를 그렇게 괴롭힌 사람의 고향이 프랑스의 한복판에 있던 공국 오랑주였다는 점에서 유럽 역사의 재미와 복잡성이 있다. ■
  • 200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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