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그룹인터뷰

역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15명이 공개하는 세계 頂上의 10대 비밀

1. 남보다 연습을 더 많이 한 사람이 1등이다.
2. 2등은 의미없다. 억울하면 1등이 돼라!
3. 라이벌이 있어야 1등이 된다. 그러나 라이벌과 친해지면 안 된다.
4. 나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황영조).
청춘을 버리고 금메달을 땄다(박정림).
나는 복서가 아니라 중이었다(김광선).
5. 언젠가는 성공한다고 믿으면서 실패를 이겨 냈다!
6. 좋은 지도자를 만났다.
7. 아버지와 아내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참았다.
8.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없는 일은 없다.
9.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다.
10. 그때 그 느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
『일기에 「죽인다」 써 놓고 1등 의지 불태웠다』

혼자 몰래 연습
1985년 당시 고등학교 1년생 국가대표였던 劉南奎(유남규·38·농심삼다수 탁구팀 코치) 선수는 김택수, 안재형 등 당시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났던 선배들의 이름을 가지런히 노트에 적어 놓고 바로 그 밑에 「죽인다」고 써 놓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노트를 보고 주먹을 꼭 쥐었다고 했다.
『선수들은 아침 6시 기상이에요. 저는 아침 5시에 몰래 일어났어요. 혼자 한 50분 운동하다가 다시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죠. 6시 되면 기상 음악이 흘러나와요. 그럼 막 잠에서 깬 척 남들이랑 같이 일어나서 다시 운동하러 갔어요. 혼자 운동하는 거 남들이 알면 따라 할까 봐 혼자 몰래 연습했어요. 독했어요. 지고 싶지 않았어요. 오후 다섯 시 「땡」 훈련 끝나자마자 다른 선수들은 피곤해서 다들 방으로 갔어요. 저랑 정화(88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금메달) 둘이 남아서 두 시간씩 더 연습했어요. 4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하루에 남보다 세 시간씩 더 연습했어요. 연습하면 이긴다고 믿었습니다. 남들과 같아서는 1등 할 수 없다고 믿었어요. 1등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지난 3월 2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유남규 감독은 깡마른 얼굴에 여전히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었다. 그는 노력한 만큼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니까 사람들이 천재라고도 하고 神童(신동)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솔직히 웃었어요. 천재가 어디 있어요. 남보다 연습 더 많이 한 사람이 1등이죠.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거둡니다. 진리예요』
왜 탁구였는지 물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유도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탁구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잘할 수 있는 탁구를 하게 된 건 저의 큰 행운이고 행복이에요. 자기가 1등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는 것이 중요해요. 찾았으면 그때부터는 고통 받아야 해요. 고통이 많이 축적되어야 1등 할 수 있어요. 고통은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는 선수 시절 방 곳곳에 여러 문구를 써 붙였다고 했다.
『눈만 돌리면 어디서든 읽을 수 있게 방 벽 곳곳에 「하면 된다」, 「테이블 앞에서 황제가 되자」 등등 많이 써 붙였어요. 딴생각이 나면 벽에 있는 문구 보면서 자세를 바로잡았어요. 「하면 된다」는 말은 그저 벽에만 붙어 있는 말이 아니에요. 정말 사실입니다. 하면 됩니다』

『뼈가 부러져도 몸이 움직이면 훈련 멈추지 않았어요』
그는 그 당시 친구도 많지 않았다고 했다. 『못된 선배가 내 책상을 뒤져 「죽인다」고 쓴 일기 내용을 소문낸 이후 모두 다 나를 경계했다』고 했다.
『저는 중·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식에도 가 본 적 없어요. 운동만 했어요. 사람들이랑 대화도 많이 안 했어요. 항상 머릿속에서 누군가와 탁구 시합을 하고 있었어요. 걸을 때도 화장실 있을 때도 저는 쉬지 않고 머릿속에서 경기했어요. 상대의 습관은 무엇인지 심리 상태는 무엇인지 연구했어요. 친구랑 말할 틈이 없었어요』
그는 노트에 상대 선수들에 대한 통계를 만들기까지 했다.
『선수마다 습성이 달라요. 前進(전진)속공을 하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당황한 순간의 표정은 어떤지 다 기록했어요. 재미로 연습 게임 할 때도 상대는 그저 웃으면서 긴장 풀고 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상대 선수의 습성을 파악하기 바빴어요. 잘 기억하고 있다가 자기 전에 노트에 일일이 적어 놨어요. 이 선배는 당황할 때 이런 표정을 짓고 저 선배는 왼쪽 공격이 들어오면 몸을 이렇게 비튼다고 다 적었어요』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했다. 왜 그렇게 1등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2등이라는 아쉬움은 저에게 고통이었어요. 2등은 1등을 띄워 주기 위한 제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뿐입니다』
죽고 싶을 때도 있다고 했다.
『훈련하다가 고통이 너무 심할 때가 있었어요. 저는 뼈가 부러져도 몸이 움직이면 훈련을 멈추지 않았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면 이 고통이 더 이상 안 느껴질 것 같아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결승에서 선배 김택수를 이기고 우승했다.


沈權虎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48kg급,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54kg급 금메달

『2등은 2등이기에 차별 받는 것.
억울하면 1등이 돼라』



『인간한테 한계는 없어요』
『저 公(공)기업 부장이에요! 이 나이에 부장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하하하』
개그맨이 나온 줄 알았다. 만나는 순간부터 사람을 웃기기 시작했다. 지난 2월22일 오후 2시 대한주택공사 레슬링단 숙소가 위치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沈權虎(심권호·33) 대한주택공사 레슬링팀 코치를 만났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상식을 깨는 레슬링 경기 해설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는 체급을 바꾸면서까지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사람들이 말이에요. 딱 폼 날 때 그만두는 게 제일 멋있는 건 줄 알아요. 아. 그거 아니죠. 생뚱맞죠. 금메달 하나 땄다고 바로 그만두면 재미없죠. 금메달 하나 땄으니까 이제 됐다고 주위에서 말리는 분들이 많았는데, 사실 인간한테 한계란 건 없어요. 힘이 있으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48kg급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54kg에서 우승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있던 해 그는 국가대표 2진. 올림픽 출전하는 선수들의 연습 파트너였다.
『1등과 2등이 얼마나 차별 대우 받는지 아세요? 근데 2등이 억울해하면 안 돼요. 2인자는 원래 서러운 거예요. 저는 1등이 누리는 영광을 보면서 저 사람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2등 하다가 1등이 은퇴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1등으로 올라선 사람 있죠. 이런 사람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한테 다시 1등을 뺏겨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힘으로 1등을 누르고 올라서야 돼요. 그게 진짜 1등이에요』
그는 언제나 즐겁게 훈련했다고 했다.
『한번 운동하면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 하는데 체중이 3~4kg 정도 빠져요. 얼마나 힘든지 안 해 보면 몰라요. 저는 재밌게 했어요. 할 수 있는 운동 시간에 집중해서 노는 것처럼 즐겁게 했죠. 저는 레슬링이 재밌어요. 한번 기술이 먹히면 다음엔 무슨 기술을 걸어 볼까 생각하는 게 즐거워요』
그는 고통스러웠던 훈련 기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제 목표는 1등이었어요. 레슬링이 아니라 무엇을 했어도 제 목표는 1등이었을 겁니다. 중간에 좌절도 맛보았고 2등의 설움도 겪어 보았지만, 1등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며 흘렸던 땀은 지금 돌이켜 보면 모두 좋은 추억이에요. 어쨌든 저는 세계 최강자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玄靜和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부문 여자 복식 금메달

『이제는 1등 엄마가 될 거예요』



『운동해서 안 아프면 열심히 운동한 선수가 아니에요』
눈이 부시다고 했다. 玄靜和(현정화·37) 한국마사회 탁구팀 코치는 사진 촬영을 위해 실외로 나오자 눈이 너무 부시다며 빨리 끝내 달라고 재촉했다.
『빨리 끝내 주세요! 눈 아파요! 햇빛 오래 보고 있는 거 힘들거든요. 탁구는 실내 스포츠예요. 10년 넘게 실내 연습장에서 훈련했어요. 빨리 찍고 들어가게 해 주세요』
사진기 안에 들어온 현정화 코치의 오른쪽 어깨는 왼쪽 어깨보다 처져 있었다. 그는 『탁구할 때 한쪽만 쓰다 보니 어깨가 내려앉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했다. 지면 울었다고 했다. 지면 분하다고 했다.
『쉬는 시간 찾아서 다 쉬면 발전이 없어요. 남들 쉴 때 같이 쉬면 남을 이길 수 없어요. 한 번이라도 더 공을 친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으니까. 지지 않으려면 연습해야 돼요』
지난 3월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한국마사회 탁구팀 훈련장에서 현정화 코치를 만났다. 그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 운동복에 깡마른 몸매, 단발 머리,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훈련 코치였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힐끔힐끔 지켜보았다. 그는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지 않는 게 목숨보다 중요하죠. 마음먹은 건 꼭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탁구에 선수 교체란 건 없어요. 한번 테이블 앞에 서면 아무 핑계도 필요 없어요. 피해 갈 방법이 없어요. 테이블 앞에 서면 죽기 살기로 이기는 길밖에 없는 거예요. 몸이 안 좋아서 연습 많이 못했다고 상대가 알아주지 않죠. 몸이 안 좋다는 건 없어요. 연습이 부족하다는 건 졌다는 말이에요. 연습 많이 했어요. 지기 싫었어요』
과도한 연습은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그는 현재 척추가 휘어 있는 상태다. 한쪽 어깨가 내려앉았다. 선수 시절 받은 1등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현재까지 신경성 만성 위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운동해서 안 아프면 열심히 운동한 선수가 아니에요. 고통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후회 없어요. 제 선수 시절이 자랑스러워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잠드는 게 무서웠다고 했다.
『아침이 오는 게 싫었어요. 아침이 오면 또 훈련이 시작되잖아요. 죽고 싶다는 생각,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그는 요즘 젊은 선수들이 너무 쉽게 성취하려 한다며 아쉬워했다.
『진정한 땀, 진실한 땀이 1등을 만들어요. 쉽다면 아무나 1등 할 수 있죠. 아무나 할 수 없어서 1등이에요. 결국, 자신의 게으름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1등 할 수 있는 거죠』

『스포츠에는 룰이 있는데 사회에는 룰이 없는 것 같다』
그가 스무 살 때였다. 88년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복식 결승전. 중국 대표 자오즈민의 서브는 날카로웠다고 했다. 그는 그때 전혀 떨리지 않았다고 했다.
『탁구는 심리전이에요. 남자 감독 밑에 있는 여자 선수들은 자기 스스로 심리 관리를 해야 해요. 남자 감독들은 여자를 전혀 몰라요. 나는 내 스윙이 무의식적으로 나올 때까지 연습했어요. 경기 도중에 아예 나를 잊어버렸어요.
그는 탁구에 꽃다운 그의 女高 시절과 대학 시절을 모두 바쳤다고 했다. 지금은 탁구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엄마가 됐어요. 탁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아이들이에요』
그는 최근 경기가 어려운 탓으로 운영하던 스포츠용품점을 접었다고 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며 『스포츠에는 룰이 있는데 사회에는 룰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제 1등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金載燁
1988년 서울올림픽 유도 부문 60Kg급 금메달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저는 유도를 통해 道를 닦았습니다』
『재엽아. 나도 올림픽 은메달밖에 못 딴 게 한이 된다. 조금만 더 하면 금메달 딸 수 있었다. 평생 한이 된다. 재엽이 너라도 나 대신 금메달 좀 따 주면 안 되겠냐. 너는 할 수 있다 자식아. 나랑 같이 서울 가자』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故 장은경 감독은 1984년 LA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金載燁(김재엽·41) 선수를 찾아 대구까지 내려갔다. LA에서 막 돌아온 이후 김재엽 선수는 잦은 부상과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운동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겠다며 고향 대구로 내려온 참이었다. 장 감독의 끈질긴 설득 끝에 김 선수는 다시 선수촌으로 들어갔다. 4년 후 김재엽 선수는 정말 금메달을 따 냈다.
『스승이 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저를 잘 알고 저에 대해 항상 연구하는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셨는데 바빠서 산소에 인사도 못 드리러 가고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지난 2월2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김재엽 골든애드앤텍(Golden Ad&Tech) 대표이사를 만났다. 그는 직원 두 명과 함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업무 중이었다. 그는 수년 전 전자상거래 관련 사업을 벌이다 한 번 실패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공장을 운영하며 태양열 가로등, 옥외광고 선전물 등을 제작하는 회사의 대표이사다.
『유도보다 사업이 더 어렵습니다. 사회 생활 시작해서 처음에 애 많이 먹었습니다. 유도는 게임 룰이란 게 있는데 사업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운동만 하다 보니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래서 이용도 많이 당하고 그랬습니다. 이제 한 수 배운 것 같아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보다 더 힘든 훈련 과정도 모두 이겨 냈습니다. 사업에도 성공할 자신 있습니다』
그는 1984년 LA올림픽 유도 60kg급 결승전에서 패배한 이후 세상이 달리 보였다고 했다.
『참 잘 졌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가르쳐 준 것이 많습니다. 왜 졌는지 혼자 생각 많이 했습니다. 방심했습니다. 그 패배 이후 저는 더 강해졌습니다』
이후 김재엽 선수는 1985년 제1회 월드컵유도대회 금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 1987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까지 모든 대회의 頂上에 섰다. 1983년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 금메달까지 합치면 이 5관왕 그랜드슬램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나는 道(도)를 닦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님은 참선을 통해 도를 닦는다고 합니다. 저는 유도를 통해 도를 닦았습니다. 술, 담배, 연애 이 모든 걸 다 끊었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해 본 사람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저는 앞으로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늦은 밤에도 혼자 따로 연습했다고 했다.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선수촌 뒷산에서 나무에 두꺼운 고무줄을 메고 업어치기 연습을 했다고 했다.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매일 스스로 채찍질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선수 생활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産母의 고통이 크다고들 합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그 고통보다 10배 이상의 고통을 이겨 내면 1등,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피스텔을 나설 때 그가 말했다.
『사무실이 작아서 놀라셨죠. 저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해냈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열심히 살겠습니다』



金美廷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유도 부문 여자 72kg급 금메달

『한 번 이긴 사람에게는 절대 지지 않는다, 한 번 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긴다』



『저는 지고는 못 살아요』
『아유~ 유도보다 애 키우는 게 더 힘들어요. 하하하』
金美廷(김미정·35) 용인대학교 무도학과 교수는 아이들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의 표정은 밝았다. 인터뷰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1년 전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지난 2월 25일 오전 11시 경기도 용인시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4층에 있는 김미정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연구실 한 켠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유도 결승전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세계 정상에 섰던 환희의 순간을 담은 사진 액자가 보였다. 매트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포효하던 金교수의 옛 사진이었다.
『여자가 유도한다고 하면 성격이 격하고 성격도 강할 거라고 생각들 하세요. 기자님도 제가 그래 보이세요? 저 얼마나 부드러운 여잔데요. 하하하』
그는 『나는 유도가 아니라 다른 걸 했어도 1등 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저는 지고는 못 살아요. 지는 건 참지 못해요.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느낌은 견딜 수가 없어요. 운동 끝내고 나서는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운동 열심히 했다고 공부 못한 게 정당화될 수는 없잖아요. 석사도 열심히 하고 박사도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교수 됐잖아요! 하하』
자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金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경기대학교 체육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 시험에 통과한 국내 유일의 A급 여자 국제유도심판이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유도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金교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1등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자만심이 아니라 자신감이죠. 나는 뭘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신감, 오기, 승부근성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잘할 수가 없어요. 금메달 땄을 때 코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니 그 넘치는 자신감이 너를 금메달 따게 했다고요』

『세계 1등이 되었다는 느낌. 그 느낌이 항상 저에게 힘을 줘요』
金교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다. 조금 늦게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다들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데 저는 원래 투포환 선수였어요. 늦게 시작했는데도 금메달 땄다고 원래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에요. 육상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잖아요. 기본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기술만 배우면 됐어요』
그는 항상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그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고 했다. 「한 번 이긴 사람에게는 절대 지지 않는다」, 「한 번 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체전이 있었는데 그때 3·4위 전에서 라이벌 언니랑 붙게 됐어요. 언니한테는 매일 졌어요. 이기기 위해서 혼자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도 해 보고, 연습도 더 많이 했는데 그래도 계속 졌어요. 그때 3·4위 전에서 처음으로 언니를 이겼어요. 정말 금메달 땄을 때만큼 기뻤어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유도 72kg급 결승전에 임할 때 김미정 선수는 승리를 예감했다고 했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승전 올라서는 순간 안방에 들어선 기분이었어요. 준비는 이제 다 끝났으니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金교수의 남편은 前 유도 국가대표였던 김병주 공군사관학교 체육처 교수다. 金교수는 『우리 신랑, 사람이 참 착해요』라며 웃었다. 김병주 교수가 지난 2월 26일 용인대학교 무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김병주, 김미정 교수는 부부 박사가 되었다. 김미정 교수가 가족 사진을 한 장 보여 줬다. 두 부부는 웃는 표정이었다.
『운동 마칠 무렵에 만났는데 남들 몰래 연애했어요(웃음). 그때는 삐삐가 있었잖아요. 서로 삐삐 음성 남기고 그랬죠. 둘 다 힘든 운동 하니까 위로도 많이 됐고요. 교외로 드라이브도 많이 다니고 그랬는데 스캔들 기사는 한 번도 안 났어요. 하하하』
금메달을 땄을 때 철퍽 매트 위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그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금메달을 땄을 때 그 느낌 있잖아요. 세계 1등이 되었다는 느낌. 그 느낌이 항상 저에게 힘을 줘요.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느낌이죠. 제 삶에 항상 자신감을 불어넣어 줘요.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죠』



金京郁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양궁 부문 개인전, 단체전 금메달

『상대를 이긴 게 아니라
제 자신을 이긴 것 같아요』



좌절을 이겨 내며 8년을 지내다
『멀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겠어요. 사진 찍는 건 줄 알았으면 피부 관리 좀 하는 건데. 하하』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네는 金京郁(김경욱·36) 현대 모비스 양궁팀 코치는 웃는 얼굴이었다. 지난 2월26일 오후 2시, 경기도 용인시 현대경제연구원 단지 내에 마련된 현대 모비스 양궁팀 훈련장에서 김경욱 플레잉 코치를 만났다. 그는 추운 날씨 속에 네 명의 소속 선수들과 함께 야외 양궁장을 뛰고 있었다. 그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김경욱 코치는 언제나 그늘에 있었다. 그에겐 언제나 「불운의 스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거듭되는 좌절 때문에 포기하려 했던 적도 많았다고 했다. 많이 울었다고 했다.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기회는 온다고 믿었어요. 잘 되겠지, 잘 되겠지 스스로 위로도 많이 했고요』
1988년 서울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 당시 高 3이었던 그의 선발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한국 여자 양궁의 기대주였다.
『최종 선발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무 긴장한 탓인지, 기록원이 점수 확인하기 전에 타깃에 꽂혀 있던 화살을 뽑아 버렸어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실격패 했어요. 올림픽 출전을 못했죠』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수녕이랑 다른 친구들이 개인전 1, 2, 3위를 하더라고요. 집에서 부모님이랑 같이 그 경기를 TV로 보고 있었어요.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어요(눈물이 맺혔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TV만 보시는 부모님 얼굴 보기도 민망하고, 방에 가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선발전에 떨어진 바로 다음날부터 활을 잡았다고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반드시 우승하리라 다짐했다고 했다. 연습량을 늘렸다고 했다. 혼자 야간 운동도 했다고 했다. 무리한 운동은 급기야 부상을 불렀다.
『너무 무리했어요. 어깨가 상해 버렸어요. 어깨 수술을 받게 됐는데 그 후로는 성적이 계속 좋지 않았어요. 1992년에도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죠. 그때도 제 친구가 금메달 따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어요. 혼자 속앓이 많이 했어요. 포기할까 생각도 많이 했고요』
김경욱 코치의 1등 비결은 「낙천적 성격」이라고 했다. 좌절과 좌절을 이겨 내며 8년을 기다린 끝에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결승전에서 과녁 正(정)중앙에 설치된 초소형 렌즈를 두 번이나 꿰뚫는 「퍼펙트 골드」의 신화를 만들며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기들이 다 금메달 딸 때 나만 못 딴 건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퇴물이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상관없었어요. 「나는 잘 될 거다」 하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금메달 딴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가 웃었다.
『마음이 앞서면 활은 빗나가요. 마지막 활까지 방심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열아홉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제 모든 걸 다 바친 건데 단 한순간의 흐트러짐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상대를 이긴 게 아니라 제 자신을 이긴 것 같아요』


金光善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부문 플라이급 금메달

『나는 복서가 아니라 중(僧侶)이었다』



밤마다 선수촌 뒷산에서 해머질
金光善(김광선·42) 「김광선스포츠센터」 관장은 최근 교통 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고 했다. 지난 2월23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한 정형외과 입원실에서 김광선 관장을 만났다. 그는 병실에 누워 있었지만 표정이 밝았다. 金관장의 아내가 매실 주스 한 잔을 권했다.
『나는 복서가 아니라 중이었습니다』
金관장은 중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솔직히 한창 젊은 나이에 유혹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중이 되지 않고서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친구, 애인, 술, 담배 하나도 옆에 없었어요. 시합 나가기 전에는 인터뷰도 안 했어요. 땀 흘리고 먹고 자고, 땀 흘리고 먹고 자고 딱 이거 세 개 했어요』
그에게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미국 선수와 1회전 경기를 했는데 졌어요. 돌아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했어요』
그는 이기기 위해 이를 갈았다고 했다.
『밤 9시면 선수촌 뒷산에 혼자 올라갔어요. 20kg쯤 되는 해머가 하나 있는데 그거 들고 몇 시간씩 땅을 내리쳤어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운동도 됐죠. 한 시간 해머 치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요. 사실 저는 체격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키도 작고, 순발력·기술 모두 외국 선수들에 비해 뒤졌어요. 하지만 한계라는 건 없습니다. 정신력으로 못 이겨 내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그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고 했다. 무서울 게 없었다고 했다. 감독이 대진표를 안 보여 주는 게 이상하긴 했다고 했다.
『실질적으로 저는 3회전부터가 결승이었어요. 제일 힘든 상대만 저한테 다 걸렸거든요. 감독님이 제가 겁먹을까 봐 대진표도 안 보여 줄 정도였으니까요』
힘든 상대들과의 어려운 게임이었지만 링 위에선 김광선 특유의 파이팅이 펼쳐졌다. 끝내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제 나는 모두 다 이겨 봤다는 기분에 온몸이 떨렸습니다. 남자에게 올림픽 메달은 자존심 그 자체죠. 저는 모두 다 버리고, 1등을 얻었습니다. 저 자신을 이긴 겁니다』
金관장은 현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자선 단체인 「한국 올림픽 참피온 클럽」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선배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는 여전히 바쁘게 지낸다고 했다.



金永浩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펜싱 부문 남자 플뢰레 개인전 금메달

『참았다. 또 참았다. 그래도 참았다.
1등이 되었다』



『지금도 비디오 보면 눈물이 고입니다』
『술 한잔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아내랑 애들이 자고 있어요. 잠 깰까 조심조심 혼자 비디오 틀어서 봅니다. 올림픽 결승전 장면이요. 마지막 한 포인트 따 내고 나서 우승하는 순간만 보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가슴이 짜릿짜릿합니다. 그 느낌 하나로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계 정상에 섰던 순간의 환희를 이야기하면서 무시무시한 검객 金永浩(김영호·35)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순해졌다. 지난 2월 23일 오후 5시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펜싱장에서 김영호 펜싱 국가대표 감독을 만났다. 非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올림픽 펜싱 종목 첫 금메달을 따 낸 그는 무려 12년간이나 칼을 갈았다고 했다.
『이를테면 펜싱은 유럽의 태권도 같은 겁니다. 유럽이 펜싱 宗主國이나 마찬가지죠. 텃세도 심하고요. 동양인이 무슨 펜싱이냐, 가서 검도나 하라는 분위기예요. 저는 금메달 딸 때까지 12년 걸렸습니다. 참을성 없었으면 이미 그만뒀겠죠』
그는 세계 1등의 비결을 『인내심』이라고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전에서 탈락했어요. 그 후로도 몇 년간 세계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칼을 잡으면 죽어도 못 진다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하는데도 못 이겼습니다. 짜증을 이겨 내야 했습니다. 짜증이 극한까지 나더라도 쓰러지면 안 됩니다. 참아야 합니다. 펜싱은 화를 내는 순간 칼이 흔들려 버립니다』
그는 스물세 살 때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후 국제 경기에 출전해도 유럽 선수들은 그를 아는 척도 안 했다고 했다. 오기가 발동했다고 했다. 세계 벽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밤 8시부터 10시까지 혼자 야간 운동을 했습니다. 세계 벽을 깨부수겠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조건이 안 좋았어요. 저는 유럽 선수들에 비해 키가 작고 팔도 짧습니다. 펜싱에 운이란 건 없어요. 많이 연습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세계 대회에서 64강에 처음 올랐다고 했다. 그 다음 대회에서 32강에 들었다고 했다. 그 다음 대회에서 16강에 들었다고 했다. 서서히 외국 선수들이 자기에게 인사를 해 왔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다들 펜싱의 유럽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참고 참고 계속 참았어요. 정말 8강에 올랐어요. 5년 걸려서 4강에 올랐고 다시 4년 걸려서 결승에 올랐습니다』
금메달을 따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펜싱 국가대표 출신인 김영아씨.
『금메달 반은 아내가 딴 겁니다. 제 경기 장면 비디오를 일일이 분석해 주면서 날카로운 지적을 많이 해 줬어요. 게임의 브레인 역할은 아내가 했습니다. 1등 하려면 아내도 잘 만나야 합니다. 하하하 아내랑 칼싸움은 안 해요』



朴正林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핸드볼 금메달

『청춘 버리고 금메달 딴 거예요.
후회는 없어요』



현관문에는 「I Love Handball」 스티커
화장도 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예쁜 치마 입고 미팅도 나가 보고 싶었다고 했다. 멋진 남자랑 손잡고 데이트도 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부모님께 애교도 부려 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다고 했다. 오직 금메달을 위해서. 지난 2월26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아파트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핸드볼 금메달리스트 朴正林(박정림·35) 씨를 만났다. 현관문을 열자 키 180cm의 가정주부가 서 있었다.
『너무 답답했어요. 틀 안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건 운동밖에 없었고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정말 휴가 나왔다가 복귀 안 한 적도 있어요. 도망도 다녀 봤고요』
그는 다 버렸더니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했다.
『핸드볼은 단체 운동이잖아요. 한 명이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전체가 다 기합 받고 그랬어요. 감독님이 너무 무서운 분이었어요.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선수들 고생시키는 게 미안했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내 청춘 8년을 바쳤어요. 청춘 버리고 금메달 딴 거예요. 후회는 없어요』
그는 왼손잡이 우측 공격수였다.
『핸드볼 공이 커요. 그래서 운동화 뒤꿈치에 접착제를 잔뜩 발라 놓고 경기하는 중간중간 손가락 끝에 묻혀서 핸드볼이 손에 붙게 만들어요. 공격할 때, 세 발자국 크게 뛰고 상대 선수 제쳐서 슛할 때, 손에서 휙 공이 빠져나가 철렁 네트를 가를 때, 가슴이 확 트이는 것처럼 시원해요. 골 넣을 때 느낌이 좋아서 계속했어요』
그는 여자 선수들은 감정 기복이 많다고 했다. 그걸 조정하는 게 감독의 역할인데 남자 감독들은 절대 여자 선수들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남자들이 뭘 알겠어요(웃음). 여자 선수들은 다른 여자 선수들이랑 차별당하는 거 정말 민감하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아시는 건지 모르시는 건지 종종 같은 실력을 갖고 있는데도 누구는 더 예뻐하기도 하고 그러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미묘한 감정이 경쟁심을 유발하고 서로 더 열심히 운동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해요』
가정주부인 그는 지금도 종종 집에서 여섯 살 난 딸과 함께 당시 결승전 경기를 본다고 했다.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따 온 금메달을 보여 주며 말했다.
『지금 봐도 눈물이 나와요. 우승해서 기쁜 게 아니라 이거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 금메달 하나 따려고 그 고생을 했나. 아까운 10대, 20대 다 보내 버렸나. 딸이 자꾸 물어요. 엄마 왜 울어. 엄마 왜 울어. 그럼 이렇게 말하죠. 우리 딸 너무 사랑해서 울지』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금도 그는 아줌마 군단의 돌풍을 일으켰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이 아쉽다고 했다.
『나이 다 먹고 힘들게 훈련받고 나간 건데 아깝게 졌어요. 무서웠던 감독님이 「니들 다 훌륭한 선수들인데 내가 모자라서 졌다」고 하시니까 더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 이겨서 은퇴했어야 하는데. 너무 아쉬워요』
그는 현재 「국민생활체육 서울시 핸드볼 연합회」에서 이사를 맡고 있다. 그의 아파트 현관문에는 「I Love Handball」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全利卿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여자 1000m, 3000m 계주 금메달,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여자1000m, 3000m 계주 금메달

『매일 앉았다 일어섰다를
10분에 800번씩 했다』



『금메달 따면 좋아요. 은행이나 관공서 갔을 때 일 처리가 삭삭 쉽게 돼요(웃음)』
『10년 6개월입니다. 아~ 10년 6개월 동안 국가대표였어요. 제 허벅지 보세요. 아직도 짧은 치마 못 입고 다녀요. 아유~ 이 살을 언제 빼~』
全利卿(전이경·30)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분과 위원은 아직도 보통 사람 수준의 허벅지로 돌아가려면 멀었다며 아쉬워했다.올림픽에서 금메달 네 개를 따 낸 金씨는 지는 건 분하고 억울하다고 했다. 지면 울었다고 했다. 절대로 지고는 못 산다고 했다. 지난 3월3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인근 커피숍에서 전이경씨를 만났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쇼트트랙 한국대표 유니폼을 입고 빙판을 누볐던 전이경 선수. 그는 검은색 치마 정장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왔다.
『객관적으로 볼 때 저는 선천적인 능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떨어졌어요. 가진 게 없으면 노력이라도 더 많이 해야죠. 10분 동안 앉았다 일어섰다를 700~800개씩 했어요. 해 보셨어요? 땀이 비 오듯 쏟아져요. 아마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둘 걸요』
여고 2학년 때 쇠조끼를 입고 선수촌 뒷산을 뛸 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그만두겠다고 정말 훈련장을 뛰쳐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혹독한 훈련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 때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1990년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처음 목에 건 이후 국제 대회 금메달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두 개를 땄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두 개를 땄다. 양궁의 김수녕 선수와 함께 최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 기록이다.
『까다로운 선수가 중국의 양양이었어요. 실력은 사실 저랑 양양이랑 엇비슷해요. 실력이 비슷하면 경기 운영을 잘하는 선수가 이겨요. 게임 시작하기 전에 전략을 다 짜고 들어가는데 전략대로 되는 경우는 한 50% 정도밖에 안 돼요. 그래도 저는 지지 않았어요. 지는 건 싫고 분하거든요』
금메달을 딴 후에 그는 많이 편해지고 게을러졌다고 했다.
『금메달 따면 좋아요. 은행이나 관공서 갔을 때 일 처리가 삭삭 쉽게 돼요(웃음). 1등 될 때까지의 그 고통은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선수를 은퇴하고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자고 싶을 때 자는 거랑 먹고 싶을 때 먹는 거예요. 진짜 그러다 보니 요즘 너무 게을러졌어요(웃음)』
은퇴 이후 그는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교양체육 강사를 하기도 했다.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그는 현재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준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는 대한체육회가 양성하는 스포츠외교 전문인력 제1호로 선발되어 지난 1년간 미국 버몬트 주 세인트마이클스 대학에서 유학하고 최근 귀국했다. 전이경씨는 게으를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全炳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力道 56kg급 금메달

『운동 선수가 물도 안 마시고 아홉 끼를
굶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겠어요』



『금메달이 예뻐서, 그래서 따고 싶었어요』
『세계 1등 하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全炳寬(전병관·37) 역도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역도 경기에서 몸무게 56kg이었던 그는 자기 몸의 세 배에 가까운 165kg짜리 바벨을 들어 금메달을 땄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금메달을 수여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금메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촌사람』이라고 했다.
『예쁘게 생겼더라고요. 금메달이 예뻐서, 그래서 따고 싶었어요』
지난 2월28일 오전 11시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역도장에서 전병관 감독을 만났다. 그는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선수 시절보다 몸무게가 더 늘어난 것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건 내가 따기 불가능한 것인 줄 알았어요. 저는 그저 차분히 준비했어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실천했어요. 그러다 보니 메달에 점점 가까워졌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어요. 그때는 52kg급으로 나갔는데 목표가 「그냥 아무 메달이나 따자」는 거였어요. 1992년엔 56kg급으로 나갔는데 금메달을 목표로 했어요. 체급을 올렸다는 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4년간 운동 계획 잘 세우고 계획대로 했더니 165kg이 들리더라고요. 예쁜 금메달 따게 됐죠』
그는 무조건 노력만 한다고 되진 않는다고 했다. 力道는 과학적인 스포츠라고 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잘 알고 힘이 움직이는 경로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체중 감량이었다고 했다. 力道는 체급별 경기다.
『체중 감량의 고통은 어느 한순간 아프고 마는 그런 고통이 아니에요. 운동 선수가 물도 안 마시고 아홉 끼를 굶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겠어요. 일반인이 아홉 끼 굶는 거랑 차원이 달라요. 감량을 시작하면 처음엔 배가 고파서 힘들고 시간이 지나면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아요. 나중엔 힘이 없어서 누워만 있어야 돼요』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가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요. 전북 진안에서 평생 농사지으시다 몇 년 전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인부 안 쓰시고 혼자 농사일하셨어요. 종종 저한테 전화하셔서 「아들아, 니가 서울에서 그 고생을 하는데 내가 너보다 더 쉽게 살아서야 되겠냐. 너랑 경쟁하느라 나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딴생각할 틈이 없었죠. 아버지가 저 금메달 따게 해 주셨어요』
전병관 감독은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면서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주셨다고 했다.
『한 번은 휴가 받아서 고향에 내려갔는데 집에 아무도 안 계시더라고요. 밤새 두 분이 농사일하시고 새벽 다섯 시 다 돼서 집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말이 안 나왔어요』
전병관 감독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아내 앞에서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만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다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흐트러짐 없이 열심히 살 겁니다』



鄭在恩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태권도부문 여자 55kg급 금메달
張知媛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부문 여자 59Kg급 금메달

『라이벌과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라이벌 때문에 1등을 할 수 있었다』



『한국 태권도는 국가대표 선발전이 정말 치열해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張知媛(장지원·27·삼성에스원 태권도 플레잉 코치·사진 오른쪽)씨가 하얀색 승용차를 몰고 왔다. 청바지에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가 차에서 내리자 175cm의 큰 키, 운동 선수답지 않은 투명한 피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鄭在恩(정재은·27)씨가 도착했다. 동갑내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두 명을 서울 신촌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張씨와 鄭씨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 일명 「골드 메이트(Gold Mate)」라고 했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한참 동안 오고 갔다. 이들은 액세서리, 남자 친구 이야기 등을 했다. 정재은씨는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장지원씨는 아직 솔로다. 鄭씨가 애인 이야기를 신이 난 표정으로 하는 모습을 張씨는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한국체육대학교 입학 동기로 신입생 시절부터 늘 붙어 다녔다고 한다. 정재은씨의 말이다.
『서로 베스트(제일 친한 친구)예요. 힘들 때, 기분 좋을 때 항상 같이했죠. 같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었는데 둘 다 연습하느라 바빠서 그러진 못했어요』
둘 다 『우린 라이벌이 아니어서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鄭씨는 55kg급, 張씨는 59kg급 선수였다. 張씨의 말이다.
『라이벌이 한 명씩 있어요. 국내 대회 결승전만 나가면 꼭 만나게 되는 선수요. 개인적으로도 잘 알죠. 서로의 공격 패턴, 습관도 잘 알고. 서로 간의 미묘한 감정 싸움이 있어요. 그런데 매트 위에서 감정이 섞이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지게 돼요. 경기에 집중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돼요』
鄭씨가 말을 이었다.
『라이벌과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사석에서 만나면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지만 서로 속내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게 돼요』
이들은 『그러나 라이벌이 있어서 정상에 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張씨의 말이다.
『항상 긴장하게 되잖아요. 내가 쉴 때 라이벌은 운동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라이벌이 새로운 기술을 쓰면 나도 곧 따라 하게 되고. 라이벌에게 내 단점을 들키면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더 연습하게 되고요』
이제는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닌데 그들과 종종 만나긴 하는가 물었다. 張씨는 『보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라이벌이 있어서 제가 더 열심히 운동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 선수 시절 라이벌 덕분에 충분히 힘들었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鄭씨도 같은 말을 했다.
『한국 태권도는 국가대표 선발전이 정말 치열해요. 같은 체급끼리는 모두 경쟁자죠. 당연히 서로 경계하게 되고 눈치 보게 되잖아요. 친해지기 힘들죠. 아마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서로 제일 친한 친구라는 鄭씨, 張씨에게 혹 같은 체급이었어도 친해질 수 있었겠느냐 물었다.
『(동시에) 당연히 아니죠!』
『라이벌이었으면 아마 우리도 친구 되기 힘들었을 거예요. 하하하』(정재은)
『하하하 아마 서로 죽도록 미워했을 걸요』(장지원)
정재은씨가 먼저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땄다. 4년 후 아테네에서 장지원씨가 금메달을 딸 때까지 張씨에게 鄭씨는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張씨의 말이다.
『먼저 금메달 딴 재은이가 내 경기 장면을 분석해 주고, 냉정한 충고를 많이 해 줬어요. 사실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 못해서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랬는데, 재은이가 위로도 많이 해 줬고요. 재은이나 저나 태권도에는 전문가인데 누구한테 충고 듣고 그러는 거 사실 자존심 상하잖아요. 친구니까 그렇게 딱 꼬집어 말해 줄 수 있는 거죠. 정말 고마웠어요』
둘은 훗날 「금메달 도장」을 함께 차리면 대박을 낼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둘은 함께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장지원씨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면 내가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면 최선을 다하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기쁘게 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면 지금 하자. 난 멋진 여자!」

장지원 선수.
정재은 선수.



인터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黃永祚

『동물이었습니다.
제가 사람인 걸 잊고 뛰었습니다 』

『저는 절대 남의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침에 차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돈 없어서 뛰어다녔고, 돈 없어서 자전거 타고 다녔습니다. 그게 저를 강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물 한 모금 못 마시면서 40km를 뛴 적도』
『42.195km, 끝이 보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어두웠다. 몬주익 언덕을 넘어오는 동안 잘 버텨 준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헐떡거림을 겨우 참고 계속 뛰었다. 2등이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돌아보고 싶었다. 돌아볼 힘이 남았으면 그 힘으로 더 뛰자 생각했다』
黃永祚(황영조·36). 그는 그렇게 1분 동안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을 한 바퀴 돌았다.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그는 그렇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大尾(대미)를 장식했다. 테이프를 끊자마자 그는 쓰러져 곧바로 의무실로 실려 갔다.
『神(신)은 선물을 줄 때 고통이란 도자기에 싸서 준다고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번 해 보았다는 것 자체가 순간순간의 제 삶에 강력한 에너지를 불어넣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그가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을 지난 2월27일 제주도 제주시 노형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그는 소속 선수들의 轉地훈련을 지도하며 한 달 넘게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黃감독은 식당에 들어서자 제주 돼지 오겹살과 복분자 술을 주문했다.
『저는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42.195km를 한 번 완주하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출전자 중 1등을 해야 하는 게 마라톤 선수의 목표입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오로지 1등을 위해 달렸습니다』
술이 몇 잔 더 돌았다. 黃감독은 금메달을 따는 비결을 『가장 동물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말했다.
『제가 사람인 걸 잊고 뛰었습니다.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구나」 느껴집니다. 동물처럼 뛰어야 사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마라톤은 한계와의 싸움입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동물적인 인간이 그 분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감독을 만났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봉수 감독님은 저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물 한 모금 못 마시면서 40km를 뛴 적도 있습니다. 일반인이 그렇게 뛰면 생명이 위독해집니다. 그러나 저는 감독님께 감사합니다. 그런 고통이 저를 세계 頂上에 서게 했습니다. 요즘 그렇게 훈련시키면 큰일 납니다. 버틸 수 있는 선수도 많지 않습니다』

『저는 겨우 42.195km 뛰었습니다. 인생은 그보다 더 깁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종종 아들 학교 갈 차비를 빌리러 다녔다고 했다. 그는 그런 환경이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걸어 다녔다고 했다. 뛰어다녔다고 했다.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배정받자 그는 중고 자전거를 구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사이클 선수로 운동에 입문했다.
『저는 절대 남의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침에 차비 빌리러 다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돈 없어서 뛰어다녔고, 돈 없어서 자전거 타고 다녔습니다. 그게 저를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이겨 낼 자신이 있었습니다.「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 따고 돌아왔을 때 어떤 기자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질문 아닙니까. 말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죽어서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금메달 획득 이후 그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우선 수입이 늘었다.
『감독으로 일하면 기업 임원급 대우를 해 줍니다. 아. 얼마인지 밝히기는 좀 그렇고요(웃음). 그리고 저는 부수입이 많은 편입니다. 마라톤 행사에 참여해도 수입이 생기고, 특강 나가도 수입이 생기는데, 부수입이 제 연봉보다 더 많습니다』
그는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왜 외제차인지 물었다.
『여기 이마 위에 보이십니까?(이마부터 정수리까지 7~8cm의 상처가 있었다) 교통 사고를 한 번 당했는데 국산 자동차 중 좋은 차라는 차를 타고 있었는데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저는 몸이 재산이에요』
그가 마지막 술잔을 털며 말했다.
『저는 겨우 42.195km 뛰었습니다. 인생은 그보다 더 깁니다. 저는 꿈이 많습니다.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인터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 페더급 금메달리스트 梁正模

『대한민국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 최초로 무언가를 한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도전정신이 인간의 한계를 깨게 합니다』



휴대폰 액정화면 속의 사진들
지난 3월2일 오후 5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인근 커피숍에서 梁正模(양정모·53) 한국올림픽참피온클럽 회장을 만났다. 그는 대한레슬링협회 관계자들과 협회 사무실에서 제주서 곧 열리게 될 세계청소년레슬링대회 문제를 논의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커피를 주문한 그는 자신의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의 휴대폰에는 그의 선수 시절 사진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시상식 사진 등이 담겨 있었다.
『요즘 세상이 좋아졌어요. 휴대폰으로 못하는 게 없어요. 이게 東獨 선수와의 경기 사진입니다. 이건 朴대통령으로부터 훈장 받을 때 사진입니다』
프로 레슬링이 좋았지만 덩치가 작아 아마 레슬링을 시작한 그는 처음엔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경기에 나설 때 보통 8~9kg씩 체중 감량을 해야 했다.
『물도 못 마시고, 밥은 아예 못 먹고, 몸에 힘도 없는데 사우나 들어가서 땀까지 빼가면서 8~9kg을 감량하는데요. 글쎄 産母(산모)의 고통이 크다고 하는데 아마 그보다 더 큰 고통일 것 같아요. 지방 하나 없이 온통 근육만 갖고 있는 운동선수가 8~9kg을 뺀다는 건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물에 젖은 스펀지를 꽉 짜서 가볍게 만드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스펀지는 아픈 줄 모르지만 사람은 다르지요』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한민국 국가는 올림픽 시상식장에서 연주되기 힘들 것이라고 다들 그랬어요. 금메달은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북한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호준이 사격 금메달을 땄거든요. 우리도, 대한민국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는 「도전정신」이 1등의 비결이라고 했다.
『일요일은 선수촌 외출하는 날인데 외출 나갔다 들어와서도 혼자 운동하고 그랬어요. 훈련은 지금 선수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죠. 3시간 운동하면 4kg이 빠져요. 운동 끝나면 탈진 상태예요. 어떤 날은 너무 심하게 운동해서 잠이 안 올 때도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잠을 못 자요. 그래도 다 참을 수 있었던 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성취감 느끼려면 내 욕망을 모두 희생해야』
그는 성취를 위해서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한계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성취감을 느끼려면 반드시 내 욕망을 모두 희생해야 합니다』
그가 역사상 최초로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안기고 귀국하는 날, 김포에서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가 있었다.
『온 국민이 저만 보는 것 같았어요(웃음). 길 양쪽에 서울 시민이 빽빽이 모여서 박수 쳐 주는데 지난 고통 따위는 다 잊어버렸어요.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이 그러셨어요. 「4년 후 모스크바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계속 전진해 주길 부탁합니다」 체육훈장도 받았습니다』
현재 부산에는 「양정모 올림픽제패 기념 종합연습장」이 있다. KBS에서 매년 주최하는 「올림픽제패기념대회」의 대회 팸플릿에는 양정모 회장의 선수 시절 경기 사진이 들어간다.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1976년 8월1일이 제가 금메달 딴 날입니다. 30년이 지나니 그 의미가 조금 퇴색된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도 종종 그때 생각하고 그때 사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부담감도 있어요. 저는 사람이지 神이 아니잖아요. 본의 아니게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98년에 레슬링 감독 생활을 마치며 레슬링계를 떠났다. 그 후 세상살이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세상살이에는 룰이 없어요. 변칙이 너무 많았습니다. 운동만 평생 했거든요. 사회 나와서 좌절도 맛보았고 사회 쓴맛도 보았습니다. 세상에 대해 실망할 때도 있었어요. 운동할 때는 正道(정도)만 가면 됐는데 사회에서는 정당치 않은 것들이 통용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는 금메달은 그저 상징적 의미일 뿐이라고 했다.
『어떤 분야에서 頂上에 섰다는 의미입니다. 금메달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용기와 힘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 최초로 무언가를 한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 200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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