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인물| 정화鄭和와 실크로드, 그리고 중화中華의 영광

‘정화를 다시 보자.’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 때 환관 출신 제독인 정화(鄭和, 1371~1433년) 열풍이 불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정화가 첫 출항을 한 7월 11일을 ‘항해의 날’로 제정, 기념우표와 주화를 발행하고 국제해양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정화를 재조명하고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화는 중국 역사에서 볼 때 해외진출의 선구자이자 평화 외교활동의 상징적 인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1371년 현재의 윈난(雲南)성 쿤양(昆陽, 현재의 쿤밍)에서 태어난 그의 성은 마(馬), 이름은 싼바오(三保)였다. 그의 선조는 원나라 때 서역에서 이주해 온 이슬람 교도였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그는 포로로 잡혀가 거세된 후 환관으로 연왕(燕王) 주태를 섬겼다. 이후 연왕이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자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됐다.

그는 영락제의 지시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바닷길을 개척했다. 그는 이 공로로 영락제로부터 정(鄭)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의 원정대가 중동, 서남아, 동아프리카로 가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확보함으로써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동아프리카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를 지배했다.

그의 항해는 동남아에 중국인이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늘날 동남아 화교의 역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의 대항해는 당시로선 상상조차 못할 엄청난 업적이었지만 영락제 사후(死後) 권력투쟁으로 그의 항해 기록은 대부분 소각됐으며, 그도 중국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다.

환관 세력과 라이벌 관계였던 문신(文臣)들은 해양 무역을 금지시키면서 명나라는 해양제국의 지위를 스스로 내놓았다. 명나라는 한때 3,500척에 이르렀던 선단을 해산시키고 1500년에는 민간이 배를 건조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시켰으며, 1525년 모든 원양 선박을 없애 버렸다. 이후 중국은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폴 케네디 교수(미국 예일대)는 《강대국의 흥망사》라는 저서에서 ‘명나라가 해외에 등을 돌림으로써 세계 패권을 유럽에 넘겨주었고 이는 중국 문명이 몰락하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를 맞아 중국이 정화를 부활시키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에너지와 이를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바닷길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정화가 이끌었던 당시 선단의 명칭은 서양 취보선(取寶船)이었다. 이름 그대로 서양(말라카 해협 서쪽 지역)의 보물을 구하러 가는 배다. 당시 정화는 도자기와 비단을 향료와 유리그릇 등 진기한 물건과 교환했다. 당시 보물이 향료와 유리그릇이었다면 현재의 보물은‘검은 황금’인 석유다.

사진 제공 | 사계절 출판사(개빈 멘지스의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중에서)
중국이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확보에 혈안이라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다. 중국은 그동안 수입 증가분을 대부분 중동 지역에서 충당해 왔고, 앞으로 중동 지역이 주요 수입원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2010년까지 중동에서 전체 수입량의 80퍼센트를 들여와야 할 입장인 만큼, 중국 경제는 중동 석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은 중동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아프리카 등 새로운 공급원을 확보하는 등 에너지 수입 루트의 다변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21세기 판 ‘정화의 대항해’가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화는 색목인(色目人;당시 이슬람교를 믿는 인종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중동에서 가장 흥미 있는 설화인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신밧드의 모험》이 나온다. 신밧드가 바다에 일곱 번 나가 신나는 모험을 펼친 끝에 부자가 돼 바그다드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신밧드가 바로 정화라는 말도 있다. 그가 색목인이었다는 사실은 반미(反美) 정서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중동 정세를 감안할 때 중국에 상당히 유리한 상황까지 만들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반미 정서를 이용,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 중동 산유국에 접근하면서 역사적 인연까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해상 수송로 안전 확보는 군사적 진출의 명분도 되고 있다. 정화가 원정길에 나선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해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에너지 수송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도양을 거쳐야 한다. 중국은 인도양을 결코 미국이나 인도의 바다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파키스탄 남부 과다르항을 무상으로 건설해 주는 등 인도양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유사시 과다르항을 해군기지로 사용할 계획이다. 중국이 원양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화 대함대의 후예인 중국 해군의 잠수함 함대.
(사진 | 유용원의 <군사세계> 사이트 중에서)
중국은 석유의 수송로인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를 끼고 있는 아세안 회원국들과도 오는 2010년까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키로 합의한 바 있다.

이 협정이 체결되면 아세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동심원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중국과의 교역량이 가장 많은 아세안은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종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세안 회원국들에는 많은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중국과 아세안은 또 남중국해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인 적도 있다. 중국의 해군력이 막강해질수록 아세안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며, 남중국해의 지배권은 자연적으로 중국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이와 함께 정화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지휘하면서 한 치의 땅도 점령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우정으로 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중국의 외교정책인 ‘화평굴기’(和平堀起, 평화적으로 우뚝 일어섬)와 일치한다. 마잉민(馬英民) 중국 국가박물관 부관장은 “인도양을 침략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정화 함대는 평화적인 무역거래와 문화교류를 한 평화의 사절이었다”고 강조했다.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은 ‘세계의 중심’(中華)이 되었으나, 이후 바다를 통해 들어온 서양 제국주의에 수모를 당해야 했다는 교훈을 잊지 말자는 의도도 있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개척한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정화를 내세우면서 중국은 이처럼 다중 포석을 둔 것이다. ■
  • 200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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