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랭식 포르쉐「993 카레라」의 매력

저 차들은 왜 안 가고 서 있는 거지?

핸들을 10시10분 방향으로 잡는다. 이른 새벽 100㎞ 이상 달리는 차들이 그냥 다들 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깜빡이를 켜고 차선 변경을 해야 하지만 속도가 빠르니 깜빡이 조작할 사이에 내 차가 벌써 옆차를 지나왔다.
화살이 꽂히듯 차가 서다

운전석에 앉아 가속 페달을 밟는다. 점점 발에 힘을 주니 디지틀 속도계는 250㎞를 보여준다. 포르쉐의 초반 가속은 좀 더딘 느낌이지만 중후반 가속은 정말 무섭다. 조금 더 밟았더니 바로 270㎞인데 여기서 좀더 나가면 280~290㎞는 무난히 갈 것 같다. 무서워서 더이상 밟지 못하겠다. 지금 이 속도도 한 발은 이승에, 한 발은 저승에 양다리를 걸친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죽는 것은 눈깜짝할 사이일 거란 생각이 든다.

잡생각을 버리고 온 신경을 운전에만 집중한다. 두 손은 정확히 10시10분 방향에 놓고 핸들을 꽉 움켜쥔 채로, 등은 시트에 바싹 붙이고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시트와 페달 간의 거리도 적당히 조절되어 있다. 고속 주행 전에 타이어의 공기압도 주의깊게 맞추어 놓았다. 그런데 까마득히 앞에 가는 차들이 다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저 차들은 왜 안 가고 서 있는 거지? 실제로는 그들도 100㎞ 이상 달리고 있는데 워낙 내가 빨라서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른 새벽인데도 생각보다 차들이 많아서 내가 그들을 추돌할까봐 두렵다. 깜박이를 켜고 차선 변경을 해야 하지만 속도가 빠르니 깜박이를 조작할 시간도 여유도 없이 그 차들을 지나가 버린다. 이 속도도 익숙해지면 일상의 속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것이니까. 250㎞ 이상의 속도가 일상인 생활은 어떤 생활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결국 속도라는 건 통제할 수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 끝엔 참혹한 사고 현장만 남을 뿐…. 페달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포르쉐의 브레이크 성능은 정말이지 自他(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좀 과장하자면 화살이 꽂히듯이 차가 선다는 느낌이다.

포르쉐는 지난 40년간 계속 진화하면서 아주 정밀한 스포츠카를 만들어 왔다. 수많은 스포츠카 중에서 포르쉐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카도 없을 것이다. 최고 속도나 출력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능만을 놓고 보면 포르쉐보다 더 고성능인 차를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골수 마니아들을 거느린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 포르쉐에 맞설 만한 스포츠카 브랜드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할리 데이빗슨이 속도가 빨라서 그토록 많은 마니아들이 있겠는가? 속도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란 얘기다. 페라리의 엔초나 람보르기니, 부가티의 베이론이나 벤츠의 맥라렌 같은 차들은 고성능인데다 워낙 소량만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량생산을 하는 포르쉐와는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소량만을 만드니 高價(고가)일 수밖에 없고, 많이 만들면(그래봤자 기존 메이저들에 비하면 소량이지만) 대중적이 될 수밖에 없다. 포르쉐에서도 카레라GT 같은 초고가의 슈퍼카를 만들지만 역시 그런 차들은 고객층이 한정되어 있어 아주 적은 수만 만든다.


「993」까지가 진짜 포르쉐

911 카레라(CARRERA). 차의 이름치고는 참 독특하다. 카레라는 멕시코 말로 레이스를 뜻한다고 한다.

911은 1963년에 처음 출시됐다. 그때부터 34년 동안 줄곧 공랭식 엔진이었다가 1997년 신형 911(코드네임 996. 911은 제작 시기에 따라서 코드 숫자로 분류한다)이 수냉식으로 발표되면서 공랭시대는 막을 내렸고, 지금 생산되는 911(코드네임 997)도 수냉엔진을 쓴다. 마지막 공랭식 모델은 지금은 단종된, 1997년까지 만든 993으로 골수 팬들은 993까지를 「진짜」 포르쉐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공랭식 엔진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타악기를 두드리는 듯한, 엇박자의 둥둥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서는 아주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 소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와 비슷한 듯하고, 사나운 맹수가 적을 만나 싸울 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도 비슷하며 또한 세상의 그 어떤 소리와도 비슷하지 않다. 당신이 정말 마니아라면 멀리서 차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도 대뜸 공랭식 911이 지나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911은 엔진이 뒤에 있어서 좁고 불편한 운전석에 앉아 가속 페달을 밟으면 그 메마른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바로 귀 뒤에서 쫓아오는 듯이 들려온다.


맹수의 발톱을 감춘 아름다운 線

993의 디자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이면서도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선이 너무 부드러워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쪽이고, 특히 차의 앞쪽 옆이나 옆쪽 뒤에서 보는 線(선)은 그 라인이 환상적이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가진 차가 속으로는 맹수의 발톱을 숨기고 있다니….

자동차 메이커마다 기술력이 거의 비슷해져 가는 요즈음, 소비자들의 선택이 디자인에 달려 있다고 본다면 포르쉐의 디자인은 993에서 완성됐다.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므로 993보다 996을 더 좋아할 수도 있고 997이 더 좋을 수도 있으며, 더 옛날로 돌아가서 993 이전의 930이나 964를 최고로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다 좋겠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거의 완전한 디자인이 993에서 구현됐다고 한다면… 글쎄…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아마 20대에 타는 것과 30대의 느낌이 다르듯이 40, 50대에 포르쉐를 타는 기분은 또 다를 것 같다. 갑자기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짧은 대화가 생각난다.

여주인공 샬롯은 도쿄에서 만난 50대 중년의 남자 밥에게 포르쉐를 샀는지 묻는다. 남자가 아니라고 하자 포르쉐를 꼭 사라고 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짤막했지만 참 인상깊게 들렸다. 대체 그 여자는 왜 느닷없이 나이든 남자에게 하필이면 포르쉐를 사라고 했을까? 그 답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찾아야 할 것 같다. ■
  • 200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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