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답사 | 近代 일본의 맨파워를 무더기로 배출한 가고시마市 가지야 마을

富國强兵의 원동력은 사쓰마藩의 武士교육

明治維新(명치유신)의 최대 공로자 西鄕隆盛(사이고 다카모리),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설계자 大久保利通(오쿠보 도시미치), 奉天(봉천)대회전에서 러시아軍 30만을 패주시킨 大山巖(오야마 이와오),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연합함대 사령장관 東鄕平八郞(도고 헤이하치로) 등의 인물들을 무더기로 배출한 작지만 힘 있는 마을의 이야기
明治維新의 진원지

가고시마 城山 기슭에 서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그 앞으로 市營 관광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일본의 가장 남쪽 지방은 九州(규슈)에 있는 鹿兒島(가고시마)縣이다. 가고시마縣(현)은 일본의 47개 都道府縣(도도부현) 중 하나로 14개 市(시), 73개 町(정), 9개 村(촌)으로 이뤄져 있다. 현재 현의 인구는 약 180만 명, 그중 약 55만 명이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市에 살고 있다. 가고시마市는 도쿠가와 幕府(막부) 시절, 薩摩(사쓰마)藩(번)의 大名(다이묘: 대영주)인 島津(시마즈)家의 居城(거성)이 있었던 곳이다.

다이묘의 거성 주위는 上級(상급) 사무라이들의 저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현재 가고시마市 제1의 번화가인 天文館(천문관) 대로 일대가 사쓰마번 상급 무사들의 거주지역인 「千石町(천석정)」이었다.

천석정 바깥은 하급 사무라이들의 거주 지역이었다. 하급 사무라이의 거주 지역들 중 하나가 現 JR 가고시마 中央驛(중앙역)의 북동쪽에 위치한 加治屋(가지야)町이었다. 명치유신 당시, 이곳에는 사무라이 집 70호 정도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명치유신에 의한 일본의 부국강병은 한국인에겐 재앙이 되었지만, 그것을 모르면 근대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

江戶(에도)시대 말,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 세력이 당시의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과 長州藩(조슈번: 현재의 야마구치현)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그 핵심인물이 사쓰마의 西鄕隆盛(사이고 다카모리)·大久保利通(오쿠보 도시미치), 조슈의 木戶孝允(기도 다카요시) 등인데, 위의 3人은 日本史(일본사)에서 「維新三傑(유신 3걸)」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1867년 12월에 출범한 明治(명치)정부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大개혁을 추진했다.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이 개혁을 명치유신이라 부른다.

30여 개의 町을 관할하고 있는 가고시마市, 그중에서도 가지야町을 제외하면 근대 일본사를 쓸 수 없다. 면적 1km2에 불과한 이 조그마한 마을이야말로 명치유신의 子宮(자궁)이며 근대 일본의 에너지를 육성한 요람이기 때문이다.


네이션 빌딩의 쌍벽 사이고과 오쿠보

JR 가고시마 중앙역(옛 西가고시마역) 광장에서 지하도를 건너면 그 정면으로 「나폴리 대로」가 쭉 뻗어 있다. 「나폴리 대로」를 따라 800m쯤 걸으면 「南洲橋(남주교)」라는 조그마한 다리 하나가 걸려 있다. 「南洲」라면 명치유신의 최대 공로자 사이고의 雅號(아호)다. 그 아래로 「甲突川(갑돌천·코츠키가와)」이 흐르고 있다.

남주교를 건너면 바로 「유신 후루사토(고향)館」이다. 이 기념관의 바로 동쪽 小공원이 사이고의 生家(생가) 터이고, 서쪽 小공원이 오쿠보가 성장한 곳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역사 인물은 사이고(1828~1877)이다. 그는 1868년 1월 명치 정부군의 제2인자(명목상의 제1인자인 총재는 황족이 맡음)로서 京都(교토) 근교인 도바·후시미에서 幕府軍(막부군)을 격파하고, 그해 4월 막부의 육군총감 勝海舟(가쓰 가이슈)와 회담하여 江戶(에도: 지금의 東京)의 성문을 열게 했다. 이로써 260여 년간 일본 열도를 지배했던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끝났다.

명치 정부는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사쓰마·조슈·도사의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親御兵(친어병) 1만 명을 도쿄에 집결시켜 事變(사변)에 대비하면서 1871년 7월 廢藩置縣(폐번치현: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을 단행했다. 이때 친어병의 총사령관(육군대장)으로서 諸藩(제번)의 반발을 위엄으로 누른 인물이 사이고였다.

그러나 1873년 사이고는 征韓論(정한론)을 주장하다가 竹馬故友(죽마고우) 오쿠보 등 內治派(내치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모든 관직을 던지고 낙향하여 「私學校(사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 桐野利秋(키리노 토시아키·近衛 육군소장) 등을 중심으로 한 「사학교」의 사무라이들은 사이고를 옹위하여 반란(西南전쟁)을 일으켜 北上(북상)했으나 패전했다. 사이고는 패군을 거느리고 가고시마의 城山(성산·시로야마)으로 물러나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총상을 입고 切腹(셋부쿠: 자기 배를 갈라 자결함)했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사이고는 死後(사후)에 육군대장의 지위를 회복했다. 그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믿음은 그만큼 두터웠다.

오쿠보와 사이고는 한마을에서 자라며 함께 공부했다. 오쿠보는 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 사이고와 결별하고 新정부의 실세가 되어 新정부의 관료체제를 창출하고 일본의 부국강병을 주도했다. 1878년 5월14일, 내무성에 등청하는 도중, 石川(이시가와)현의 사무라이 島田一郞(시마다 이치로) 일당의 습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때 나이 49세였다.


가지야 마을이 배출한 인물들

다카모리의 친동생 西鄕從道(사이고 쓰구미치·1843~1902)는 西南전쟁 때 맏형(다카모리)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陸軍大輔(육군대보: 육군차관)로서 반란 진압에 힘썼다. 원래 그는 맏형(다카모리)을 따라 낙향하려고 했지만, 맏형으로부터 엄한 훈계를 받고 동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써 사이고 다카모리를 맏이로 한 다섯 형제 중 쓰구미치만 살아남았다. 이는 사무라이 집안의 전형적인 역할분담이라고 할 수 있다.

쓰구미치는 1879년 參議(참의)가 되었고, 내각제도 발족 이후에는 해군대신·내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군인으로서는 육군중장으로부터 해군대장으로 이례적인 승진을 했다. 천황 메이지의 신임이 두터워 만년에는 元帥(원수)와 元老(겐로: 천황의 자문역)로 활약했다.

오쿠보의 성장지에서 골목길을 따라 200m쯤 걸어 큰길로 나서면 길가에 세워져 있는 「元帥公爵大山巖誕生之地(원수 공작 대산암 탄생지지)」라는 비석이 보인다. 러일 전쟁 때 봉천대회전에서 러시아 육군 30만 명을 패퇴시킨 오야마 이와오는 사이고의 4촌 동생이다. 사이고의 아버지와 오야마의 아버지는 친형제간인데, 오야마의 아버지가 養子(양자)로 가서 姓(성)이 바뀐 것이다. 오야마는 어린 시절부터 사이고의 지도를 받아 사쓰마-영국 전쟁과 戊辰戰爭(무진전쟁: 舊막부군에 대한 토벌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명치유신 후에는 사이고의 천거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유학하여 군사학을 배웠다. 서남전쟁 때는 유학 중이었는데, 정부로부터 급거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 사이고의 「上京(상경)」을 설득하는 공작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군인으로서는 육군경·참모본부장 등을 역임, 軍政(군정)·軍令(군령)의 양면에서 활약했다. 특히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모두 일본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원정군을 지휘했다. 그 후 참의·문부대신·법무대신이 되었다.

오야마 생가 터의 큰길 건너편에 가고시마 중앙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골목길을 100m쯤 걸으면 「東鄕平八郞君誕生之地(동향평팔랑군 탄생지지)」라고 쓰인 조그마한 비석이 서 있다. 도고는 러일 전쟁 때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제독이다. 그는 西南전쟁 때 영국에 유학 중이어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했지만, 그의 형제들은 모두 반란에 가담하여 모두 戰死(전사)했다. 도고는 어릴 적부터 20세 연상의 사이고를 흠모했다. 그의 영국 유학도 사이고의 주선에 의해 실현되었다.

도고의 생가 터로부터 300m쯤 떨어진 곳에 「山本權兵衛誕生之地(산본권병위 탄생지지)」라고 쓰인 작은 비석이 보인다. 山本權兵衛(야마모토 곤베에)는 러일 전쟁 때 해군대신으로서 천황에게 도고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천거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해군의 근대화에 제1功(공)을 세웠으며 그 후 수상을 두 번 역임했다.

가지야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가고시마 중앙고등학교 인근 골목길에서 「偉人顯彰館(위인현창관)」이란 간판을 건 30여 평 규모의 사무실 하나를 발견했다. 노크를 해도 내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라 직원이 퇴근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의 벽면에 일장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로 사이고, 오쿠보 등 가지야 마을이 배출한 인물들의 얼굴사진이 가득 붙어 있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앞에서 거론된 인물은 제외).

○吉田友實(요시다 토모자네): 1828~1891. 사이고와 오쿠보의 죽마고우. 메이지 천황의 측근. 초대 일본철도회사 사장.

○井上良馨(이노우에 요시카): 1845~1929. 강화도사건 때 운양호의 함장. 해군대학 초대 교장.

○村田新八(무라다 신바치): 1836~1877. 이와쿠라 도모미가 인솔한 歐美(구미)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 오쿠보가 그의 후계자로 기대했지만, 어릴 적부터 존경했던 사이고의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자결.

○시노하라 쿠니모토: 1836~1877. 近衛(근위) 육군소장직을 던지고 사이고를 따라 귀향. 西南전쟁에서 전사.

○田代安定: 일본 열대식물 연구의 제1인자. 특히 말라리아 연구로 유명.

○黑木爲楨(구로키 타메모토): 1844~1923. 육군대장으로 러일 전쟁 때 제1군을 지휘하여 진남포에 상륙한 후 북진하여 압록강을 도하, 구련성-봉황성-요양-봉천으로 진격.

○山本英輔(야마모토 에이스케): 1878~1962. 야마모토 곤베에의 조카. 해군 항공의 중요성에 착안, 초대 항공본부장 역임. 해군대장.

○伊地知正治(이지치 마사하루): 1828~1896. 다카모리의 신임을 받아 사쓰마번의 참모로 활약. 유신 후 宮中(궁중)고문관 역임.

○牧野伸顯(마노키 노부아키): 1861~1949.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마키노家의 養子로 가서 改姓). 미국 유학 후 외무대신 등을 역임. 일본에 野球(야구)를 처음 소개.


사쓰마의 武士교육

가지야 마을뿐만 아니라 가고시마市의 다른 마을에서도 근대 일본사에 영향력을 끼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지면 관계상 그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지만, 우리 근대사와 무관치 않은 인물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화도조약 때 일본의 전권대표였던 黑田淸隆(구로다 기요다카·수상 역임), 청일 전쟁 때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러일 전쟁 때 군령부장을 지낸 伊東祐亨(이토 스케유키), 일본은행 창설자로서 대장대신 일곱 번과 수상 두 번을 역임했던 松方正義(마스가다 마사요시) 등도 가고시마 출신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최남단 변경에서 근대 일본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을 주도한 인물을 무더기로 배출한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명치유신을 주도한 후 이른바 「薩長閥(샤쓰죠바츠)」를 형성, 新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한 데 따른 시대적 현상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사쓰마 인맥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예컨대 사쓰마번은 명치유신 3년 전인 1865년에 벌써 우수한 청년 17여 명을 선발하여 막부 몰래 구미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을 만큼 선진적이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는 「젊은 사쓰마의 群像(군상)」이라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탑은 그때 유학을 간 청년들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사쓰마번의 교육 중시방침은 뿌리가 깊다. 16세기 말부터 하급 사무라이의 자제들에 대해서도 특유의 全人敎育(전인교육)을 시행했다. 그것이 鄕中敎育(향중교육)이다.

城下(성하)는 30개 정도의 鄕(향)이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향중교육은 연령에 따라 二才組(이재조: 14~25세), 長稚兒組(장치아조: 11~13세), 小稚兒組(소치아조: 7~10세)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長·小 稚兒(치아)는 매일 아침 6시에 二才의 집에 가서 2시간 동안 四書五經(사서오경) 등의 강의를 받았다. 오전 8시에는 馬場(마장) 또는 神社(신사)의 경내에서 稚兒頭(치아두)의 지휘 아래 스모(씨름)·旗(기) 뺏기·大將(대장) 지키기 등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은 朝講(조강)을 복습했다. 오후에는 단체로 山川(산천)을 찾아다녔다. 이것은 놀이를 겸한 야전훈련이었다.

二才組는 오전 중에 藩校(번교)인 造士館(조사관)에서 漢學(한학)과 習字(습자)를 배우고, 오후에는 무예를 익힌다든지 長稚兒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번의 役職(역직)을 맡은 二才는 藩廳(번청)에 출근했다. 밤에는 무사로서의 心得(심득)사항을 토의한다든지 독서를 했다. 이들은 오후 8시에 귀가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의 향중교육이 만들어 낸 대표적 인물이다. 둘은 하급 사무라이 계급이었지만, 사쓰마의 28대 藩主(번주) 島津齊彬(시마즈 나리아키라: 1809~1858)에 발탁되어 중용되었다. 나리아키라는 「幕末(막말) 제1等의 名君(명군)」으로 회자된다. 그는 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서양문명의 實用化(실용화)와 아울러 부국강병·殖産興業(식산흥업)·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업적은 가고시마市 吉野町(요시노초)에 소재한 尙古集成館(상고집성관)에 가면 알 수 있다. 상고집성관은 나리아키라 시대에 만든 기계공장의 일부를 박물관으로 개조, 1923년 이래 개관하고 있다(입장료 1000엔).

나리아키라가 추진한 집성관의 핵심사업은 용광로를 설치한 제철소, 反射爐(반사로)에 의해 砲(포)를 주조한 공장, 유리공장, 증기기관연구소 등의 운영이었다. 조선소를 건설, 서양식 범선인 昇平丸(승평환), 일본 최초의 증기기관을 탑재한 선박 雲行丸(운행환) 등을 건조했다. 또한 水車動力(수차동력)에 의한 기계방적, 인쇄·출판, 電信(전신), 製糖(제당), 제약 등의 사업도 전개되었다. 나리아키라는 幕藩體制(막번체제)의 틀을 초월한 開明藩主(개명번주)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근대 일본은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播種(파종)을 하고, 사이고와 오쿠보에 의해 開花(개화)되고, 그 후배들에 의해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 원동력은 역시 교육에 의한 인재육성이었다.■
  • 200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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