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성 행남자기 제품연구소 소장

노벨상 만찬장에 등장한 우리 도자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자기 제조업체 행남자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본차이나다. 1800년대 초 영국에서 개발된 본차이나는 전통적인 도자기 재료에 쇠뼛가루를 넣어 일반 자기에 비해 가볍고 견고하며 상아빛을 띤다는 것이 특징. 1942년 전남 목포에서 창립한 행남자기는 1971년 순수 우리 기술로 본차이나 제품을 만들어 청와대에 납품했고, 도자기 선진국인 유럽과 중국, 일본 등지에 수출해 오고 있다. 창립 이후 65년 동안 도자기 제조 외길을 걸어온 이 회사가 작년 12월, 2007 노벨상 시상식 공식 만찬장에 식기류를 공급해 화제. 이번에 공급된 제품은 노벨재단의 상징 색인 옐로, 그린, 코발트 계열과 ‘무광택 골드’로 표현한 식기류. 접시, 볼, 티포트, 찻잔 등 총 3000점가량이다. 노벨상 시상식에 국산 완제품 식기류가 공급되기는 처음이다. 김태성(50세) 행남자기 제품연구소 소장은 “세계 유명 도자기 회사들이 시제품을 출품한 가운데 제품 질은 물론, 생산 현장의 오염도와 불량품 체크리스트 등 ISO(국제표준화기구)에 준하는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 공급사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노벨상 시상식 식기
“이번 선정으로 향후 5년간 노벨상 시상식 만찬장에 저희 그릇이 들어갑니다. 매년 선정되는 노벨상 수상자들과 스웨덴 왕실 관계자 등 200여 명의 귀빈들이 저희 제품에 담긴 음식을 먹는 것이죠. 공급 가격과 업체 이름을 비밀에 붙이는 것이 노벨재단의 원칙이어서 마음껏 홍보를 못하고 있습니다만, 업체간 경쟁이 워낙 치열했던 터라 업계에서는 이미 저희 제품이 공급된 걸 다들 알고 있죠.”

김태성 소장은 시제품 출품에서부터 공급 업체로 선정된 후 납품하기까지 전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행남자기의 창업자인 고 김창훈 회장의 손자이자 김준형 명예회장의 4남2녀 중 막내아들. 김용주(67세) 현 회장의 친동생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이라는데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외모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젊어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20개국에 불과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그 어느 분야보다 치열합니다. 도자기 전쟁에서 최대 무기는 디자인이죠. 그래서 저희는 1989년부터 기획실 안에 디자인 부서를 두고 운영해 왔습니다.”

디자이너 컬렉션(김중만)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 필라델피아대에서 MBA를 마친 김 소장은 대한항공 기획실에서 근무하다 1990년 행남자기 플랜트 사업부에 입사했다. 그리고 막 건설 중이던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 공장으로 자원해 날아갔다.

“해외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일하고 싶어 근무환경 따지지 않고 무작정 인도네시아로 갔죠. 인도네시아 공장은 가마 만들고 레일 놓는 기초 공사부터 인부 구하는 일까지 제가 직접 다 세팅했어요. 고생 많이 했죠. 공사 도중 강도가 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가 제품연구소의 전신인 디자인부 책임자가 된 것은 1998년. 전공이나 경력이 디자인과 무관한데, 어떻게 디자인부를 끌고 나갔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디자인할 줄은 모르지만 보는 눈은 있었어요. 중ㆍ고등학교 다닐 때는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되긴 했지만 늘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았죠. 그래서 해외에 갈 때면 틈나는 대로 디자인 관련 책도 사 보고 전시회도 둘러보곤 했습니다.”

디자이너 컬렉션(이영희)
나름대로 안목을 높여 온 그는 2002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실험적인 행사를 기획했다. 국내 도자기 업체로서는 최초로 패션디자이너의 감각을 도자기에 끌어들인 것. 진태옥, 이영희, 지춘희, 이광희, 정구호 등 국내 패션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6인의 작품전은 상당한 반향과 함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이너의 영역을 허무는 이런 시도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도자기는 이제 단순히 그릇이 아니라 생활을 디자인하는 오브제예요. 그런 점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고품격 디자인 제품으로 승부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봤죠. 그래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디자이너 6인의 디자인으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꽤 고가였는데도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준비한 작품이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 팔려 나갔죠.”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6인의 작품을 60세트 준비해서 60일 동안 전시하는 행사였다. 이를 위해 3개월이나 준비했다. 감각이 예민하고 섬세한 디자이너들과 작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자기는 보통 컬러의 80%만 재현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디자이너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도자기는 고온에서 구워 내는 제품으로 광물을 이용해 색깔을 내죠. 그러니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색감이 100% 나오기란 어렵습니다. 김중만 선생님의 사진집 《네이키드 소울》에 나오는 꽃 이미지를 도자기에 표현할 때 참 까다로웠습니다.”


각 분야 디자이너들과 작업

디자이너 컬렉션(정구호).
그는 국내 작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리빙 인테리어 디자이너 아릭 레비, 덴마크의 왕실 담당 플로리스트 한스 한센, 일러스트레이터 라케 제이콥슨 등과도 계약을 맺고 작품을 선보였다. 생활 도자기와 예술 도자기의 중간쯤 되는 이 작품들은 상당히 고가임에도 혼수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김태성 소장은 “2008년 3월에는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의 작품도 출시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퀄리티에 다양한 디자인으로 행남자기 제품들은 세계시장에서 명품 대접을 받고 있다. 현재 예맨 왕실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공 퍼스트 클래스에도 행남자기 제품이 들어가고 있다. 미국의 호텔들도 식기를 행남자기 제품으로 2~3년에 한 번씩 바꾸고 있다. 김 소장은 “2015년에는 세계적인 도자기 회사인 영국의 웨지우드와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명품 도자기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이를 위해 유능하고 창의적인 디자이너 발굴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리케제이콥슨_소피에로.
“지난해부터 세계도예엑스포 행사 중 일환으로 미술관련 학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 중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행남자기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한 해 6명씩 선발하고 있는데, 이들의 작품을 제품화해 각자의 이름으로 출시할 계획이죠. 2008년부터는 사내 디자이너들의 작품에도 이름을 명시할 생각입니다. 디자이너 각자의 개인 브랜드로 제품을 출시하고 판매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불할 예정입니다.”

한국 도자기의 세계화와 명품화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에게 “주말에도 각종 미술 전시회 다니느라 쉴 틈이 없겠다”고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전시회 보러 다니는 것이 제게는 휴식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라 쉬고 있는데, 봄이 오면 제 애마인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누빌 겁니다.”

결코 나이 들지 않는 도전과 열정이 있고, 사고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사람. 그가 나이에 비해 유난히 젊어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진 : 이창주
  • 200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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