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로만손 시계 대표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시계, 우리가 만들어요”

원가 20만~30만 원짜리를 ‘유럽 왕실에 납품하는 명품 시계’로 속여 수천만 원에 판매해 온 업자가 경찰에 붙잡히는, 가짜 명품 시계 소동이 일파만파가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알아주는 시계를 만드는 우리나라 업체가 있다. 세계 70여 개국에 시계를 수출하는 (주)로만손 시계.

중동과 러시아 시장에서 로만손 시계는 스위스와 일본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로만손 시계가 선정되기도 했다. 로만손 시계는 2003년 까다롭기로 소문난 스위스 바젤 전시회 명품관에 당당히 입성했다. 스위스 유명 브랜드들 위주로 구성하는 이 명품관에 들어간 아시아 브랜드는 일본의 오리엔트, 세이코에 이어 로만손이 세 번째다.

로만손 시계의 지난해 매출은 600억 원. 올해 상반기 매출만 350억 원을 넘어 계속 신장세다. 휴대전화, MP3 등 시계를 대체하는 제품들이 많아져 사양산업으로 비쳐졌던 시계 분야에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김기문이라는 강력한 태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부분의 국내 시계 업체들이 OEM(주문자 생산 방식)에 의존하던 시절, 로만손만의 고유 제품을 들고 해외시장을 누볐다. 브랜드 가치를 얻는 것이 곧 기업의 살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 30~40kg에 달하는 세일즈 가방을 들고 세계를 누비느라 오른쪽 팔이 왼쪽보다 길다는 일화는 업계에서 유명하다. 회사 규모가 커진 요즘, 해외 영업은 실무자들에게 일임하고 있다는 김 대표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로만손 시계 본사에서 만났다. 깔끔한 매너에 조리 있는 말솜씨가 돋보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동토의 나라 러시아까지 세계를 종횡무진 누볐던 그의 청년 시절 꿈은 엉뚱하게도 낙농업이었다.

“제 마음속 한구석에는 아직도 넓은 목장을 경영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키운 꿈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농고(청주농고)에 진학했을 정도죠. 결국 딴 길로 들어섰지만, 은퇴 후에는 어릴 적 꿈을 되찾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떠올리는 그의 정신적 지주. 어린 시절 그는 몸집이 작아 친구들과의 주먹다짐에서 번번이 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와 그를 붙여놓고 “이 싸움에서 지면 절대 집에 들어올 생각 마라”고 했다. 집에 못 들어갈까 봐 기를 쓰고 덤비자 친구가 겁먹고 물러섰다. 처음으로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에 독한 맘 먹고 달려들면 안 되는 일이 없다. 강인하고, 용감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스판을 응용 디자인해서 히트를 친 트로피쉬 시계.
그가 로만손 시계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시계회사 영업이사로 있을 때 가까운 친척의 빚보증을 선 게 잘못돼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회사에까지 피해가 갈까봐 사표를 쓴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회사를 그만뒀더니 시계 업계 선배들이 ‘능력이 아깝다’며 ‘우리가 투자할 테니 시계회사를 차려보라’고 하더군요. 시계 영업이라면 자신 있었기에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계가 실용성보다 고급 액세서리처럼 되어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고급스럽고 독특하지만, 가격 부담이 없는 시계를 시장에 내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유리판을 둥글게 만들면 다이아몬드처럼 입체적인 광채를 띠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두바이에서 중동 시장 공략 시작

유리를 수없이 깎아 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1년여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든 게 커팅 글라스 시계. 세계 최초였다. 그는 이 제품을 들고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날아갔다. 이곳을 중동 시장 공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쓸데없는 짓 한다’며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브랜드 파워가 없어서 초기에는 고전했지요. 샘플을 들고 해외 출장을 갔다가 밀수꾼으로 오해받아 철장 신세를 질 뻔한 적도 있고, 중동 바이어한테 납치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자신과 거래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던 그 바이어와 벌써 20년째 거래하고 있지요.”

중동 시장에서 품질과 디자인으로 성공을 거둔 후 이번에는 스위스와 일본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러시아인들이 붉은색 계열의 금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낸 그는 로즈 골드 도금 기술을 접목한 여성용 팔찌 시계를 내놓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홍콩, 모스크바, 바젤 등에서 열리는 시계 전시회에 꾸준히 참가해 세계 바이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세계 최고의 전시회인 스위스 바젤 전시회 주최 측으로부터 명품관에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은 것은 이 같은 노력의 결과였다.

2006년 바젤 전시회 명품관의 로만손.
로만손 시계의 목표는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패션 토털 브랜드로 인정받는 것. 이를 위해 브랜드 밸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로만손’, ‘트로피쉬’, ‘TF 트로피쉬’ 등으로 브랜드 개편 작업을 완료했고, 고유의 클래식한 제품군과 함께 젊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패션 제품군을 강화했다. 김 대표는 “세계시장에서 갖는 로만손의 경쟁력은 디자인”이라며 연간 매출액의 10%를 디자인 연구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로만손의 역대 모델들과 쇼케이스.
“저희 회사에는 시계와 주얼리 디자이너를 합해 총 15명의 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수시로 해외에 나가 시장조사를 하고 있지요.”

평소 ‘사람이 만사(萬事)’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김 대표는 직원들에게 “그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를 뽑아라. 그리고 최상의 방법으로 교육하라”고 강조해 왔다. 그런 그에게 최근 빚어진 ‘가짜 명품 시계’ 소동에 대해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디자인과 품질로 소비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것 아닙니까? 명품을 좋아하는 이들의 허영심을 탓하기 전에 국내 브랜드들도 하루빨리 세계적 명품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진 : 이창주



  • 200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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