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계의 전설’정연석.김영세.케빈 리가 수공예품 건물을 빚어내다

정연석 엠포리아 회장

정리 천수림 TOP CLASS 객원기자 | 사진 이창주
서울 강남구 논현동 도산대로변에 15층짜리 새 건물이 들어섰다. 오래전부터 이 건물의 정체를 둘러싸고 “국내 최초의 명품 백화점이 들어선다더라”,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는 고급 오피스텔로 분양할 예정”이라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2005년 12월 중순 문을 연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엠포리아 디자인돔(DESIGN-DOM·design+kingdom의 합성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마법’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 건물의 용도는 품격 높은 파티를 위한 문화공간이다.

이 건물은 외벽이 모두 투명유리로 덮여 있어 밖에서 건물 내부의 사람과 시설, 종업원의 움직임 등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외벽 창문의 창도 모두 크기가 다르게 설계되어 있고, 창틀 하나하나가 손으로 짜 맞춘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건물 전체가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체 같다.

외양뿐만 아니라 건물 곳곳이 혁신적이고 튀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 각 층마다 높이가 서로 다르고, 창문 아랫부분이 일몰과 일출 시 햇빛을 받으면 발광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각 층의 화장실은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일을 볼 때조차 행복감을 느끼도록 했다. 건물 전체 면적의 10%에 왕대나무, 자작나무를 심어 숲 속에 들어온 듯 포근한 느낌을 갖도록 해 준다. 건물 앞 인도(人道)에는 열선을 깔아 겨울에 눈이 오면 즉시 녹아 행인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마치 빌딩 자체가 장인(匠人)이 수공예품을 빚은 것 같다.

정연석
이처럼 튀는 아이디어의 주인공은 정연석 엠포리아 회장(51세)이다. 그의 아이디어에 날개를 달아 준 협력자는 세계 최고의 산업디자이너로 평가받는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 그는 정연석 회장이 국내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인 빌딩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이 건물 12~13층을 자신의 사옥으로 정해 버렸다.

김영세
또 한 사람, 엠포리아를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선 사람이 세계적인 파티 플래너이자 디스플레이 전문가인 재미교포 케빈 리다. 여기에 전(前) 뉴코아 사장이었던 강근태 사장이 경영 면에서 정연석 회장을 지원하고 있다.

케빈 리
엠포리아는 대지면적 260평, 건물면적 1,610평으로 지하 2층 지상 15층 건물로 총 건축비가 150억 원 이상 투자됐다. 지하 1~2층, 지상 14~15층은 웨딩파티·콘서트·이벤트홀·댄싱룸·스카이라운지이고, 2~4층은 일본식 레스토랑 ‘마루’와 중국문화원에서 후원하는 딤섬 레스토랑 ‘차이나 룸’이 들어섰다.

5~6층은 명품 수입가구인 디오리지날 브랜드를 비롯해 각종 생활디자인 관련 제품들이 전시 판매되며, 7~10층은 뷰티숍, 성형 클리닉들이 들어선다. 이 건물에 입주한 모든 점포들은 엠포리아에서 열리는 각종 결혼식, 회갑연, 동창회 등 파티 모임의 지원을 위한 배후세력의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가진 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급 소비층을 위한 파티용 건물이 과연 어떤 평을 받게 될까. 이 질문에 정연석 회장은 “우리 사회에는 결혼식, 약혼식, 동창회, 계 모임 등 수많은 행사가 열리는데, 아직도 질 낮은 파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강남 삼성병원 장례식장이 우리 장례문화에 혁명을 몰고 왔듯이 이제는 엠포리아를 통해 파티문화를 획기적으로 뜯어 고치겠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서울대 미대 출신.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과 동문으로 정 회장이 김 사장의 3년 후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좀 그렸는데, 그 당시 디자인 전망이 꽤 밝았어요. 응용미술학과를 선택했고, 부전공으로 인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입학을 하고 보니 여학생들도 많고(웃음), 좋아하는 그림만 그려도 되니 정말 즐거웠죠!”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사업 감각을 키웠다. 대학 졸업반 때 구두공장을 직접 운영한 것. 그러나 구두 사업은 7개월 만에 700만 원의 적자를 보고 막을 내렸다.

“어머니는 제 사업의 적극적인 지원자셨는데, 구두 사업이 망했을 때 어머니께서 웃으면서 ‘너 집 한 채 값 날렸다’고 하시더군요. 젊은 혈기 하나 믿고 뛰어든 무모한 도전이었죠.”


우리 문화를 세계로…

정연석 회장은 전 세계 곳곳에서 ‘최고’들을 수집해다가 엠포리아 건물에 접목시켰다.
정 회장은 구두 사업을 접은 후 삼성그룹 공채에 응시하여 삼성물산 홍보실에서 근무하다가 삼성그룹 해외마케팅&프로모션 팀장을 지냈다. 주된 업무는 삼성그룹의 해외 전시장을 기획·설계·운영하는 것이었다.

1986년 과장 진급을 하면서 ‘쟁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관리자의 길로 갈 것인가’ 고민 끝에 그는 미련 없이 쟁이의 길을 택했다. 그는 삼성에 사표를 내고 대유아키테리어라는 인테리어 회사를 차려 현대, 신세계, 애경, 한신코아 등 백화점 인테리어를 도맡아 진행했다. 가구에 심취해 수입가구회사 디오리지날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외국 출장을 다니면서 전 세계의 진기한 물건이나 미술품, 디자인 제품, 하다못해 우표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대로 수집하는 수집광이자 미식가다. 그는 엠포리아의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세계 최고 수준이어야 한다는 고집 아래 일본과 중국의 ‘최고 맛집’ 70여 곳을 찾아다녔고, 음악 밴드 스카우트를 위해 남미 콜롬비아까지 달려갔다.

또 건물 디자인 과정에서 전 세계의 잘 지었다는 건물은 직접 방문하여 철저히 조사한 후 설계에 반영했고, 좋은 자재가 나타나면 전 세계 어디라도 달려가 구입해 왔다. 그러니까 엠포리아는 그의 평생의 수집 취미가 빚어낸 ‘작품’인 셈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엠포리아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음 목표는 서울 강남의 엠포리아를 국내 주요 도시는 물론 중국, 동남아 등지에 진출시킨다는 것. 동시에 중국에 우리의 디자인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건설부 산하 국영회사인 베이징천다주식유한회사와 합작의향서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중국의 디자이너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베이징올림픽을 위한 디자인 지원 작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정 회장은 고급 수입가구회사의 회장이며, 부동산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정 회장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며칠 전에 어떤 신문에 실린 만화를 봤어요. 한 사람이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데 ‘실패’라는 깨알 같은 글씨가 씌어있었는데, 실패라는 작은 글씨들이 뭉쳐 서서히 성공이라는 큰 글씨로 바뀌더군요. 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인생이란 앞서 소개한 만화처럼 실패와 실패, 즉 도전과 도전이 모여야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 200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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