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기업을 찾아서| 전쟁에서 2등은 죽음, 경영에서 2등은 도산(倒産)을 뜻한다

이강호 한국그런포스펌프 사장

1989년 늦가을의 어느 일요일 아침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하루 전인 토요일 밤 코펜하겐에 도착한 38세의 한국인 이강호가 택시를 탔다. 한국인이 탄 택시의 목적지는 덴마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세계 펌프시장의 일인자인 ‘그런포스펌프’ 본사.

이강호는 택시 기사에게 ‘그런포스’라는 기업에 대해 아는지를 물었다. 택시 기사의 대답은, “알다마다요. 그런데 그 회사 아마 문 닫았을 겁니다”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국인은 기가 막혔다.

그런포스 본사는 1990년에 한국 진출을 앞두고 그런포스펌프의 한국 지사를 이끌어 갈 CEO를 공채했다. 경쟁률은 250 대 1. 이강호는 그 경쟁을 뚫고 최종 4명의 사장 후보로 선정돼 그런포스펌프 본사로 면접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이강호는 택시 기사에게 그런포스가 왜 문을 닫았는지 물었다. 택시 기사의 대답은 이랬다.

“펌프를 산 사람이 제품을 자주 교체할 수 있도록 좀 허술하게 만들어야 장사가 되지, 그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서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

그는 택시 기사의 이어진 설명을 듣고 새삼 한국그런포스펌프 CEO로 지원하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그런포스의 기술력을 택시 기사는 그런 식의 농담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포스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가장 많은 펌프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세계 50개국에 70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연간 매출은 25억 달러로 세계 산업·건설용 펌프 시장에서 부동의 1위다. 그런포스는 자회사 사장들을 모두 현지 국민으로 임명하고 있다.

그런포스의 창업자 폴 듀 옌센은 1975년 주식의 85%를 비영리재단에 기부했다. 그의 후손들이 소유한 15%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의 99%는 매년 펌프 개발에 재투자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전문지 <포춘> 유럽판은 2003년 1월 20일자 신년 특집에서 그런포스를‘유럽에서 근무하기 가장 좋은 10개 회사’에 선정하기도 했다.

서울 역삼동 소재 한국그런포스펌프를 찾아갔을 때 사업상의 긴 통화를 끝낸 이 사장은 펌프와 일상생활이 얼마나 밀접한지부터 설명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물이 필요하고, 물을 인간이 원하는 곳까지 공급하기 위해서는 펌프가 필수적입니다. 철강이나 제지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200톤 이상의 물이 필요하고, 1톤의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500톤의 물이 필요합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펌프는 인류에게 심장과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의 버킹검궁,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등 세계 유명 건물에는 그런포스가 만든 펌프가 설치돼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도곡동 타워 팰리스, 삼성동 I-Park 등 30층 이상 빌딩의 90%에는 그런포스펌프가 설치돼 있다.

38세에 한국그런포스펌프 CEO에 임명된 이 사장은 16년째 CEO를 맡고 있
다. 장수 비결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런포스에서 처음 제게 제시한 고용계약 기간이 22년이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으니까 예순 살까지 보장해 준 거죠.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이 자회사 사장들과 1년 혹은 3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이었던 셈입니다.”

이 사장은 장기 고용계약의 장점을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라면서 “16년 정도 경영책임을 맡은 요즈음에 와서야 시장이 제대로 보이고 미션과 비전도 뚜렷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사장은 한국그런포스펌프 출범 초기 5~6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꾸준히 인재를 모았다고 한다. 최근 5년 동안 한국그런포스펌프는 매년 20%씩 성장해 왔다. 올 매출은 530억 원 정도지만 수년 내 매출 1,000억 원대 달성은 무난하리라는 게 이 사장의 전망이다.

이 사장은 “글로벌 기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외환위기 이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손자병법》에 ‘훌륭한 지도자는 아군의 양식을 적의 창고에서 조달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의 첨단기술과 우수한 경영능력을 국내에 유치하는 것은 국익 증진에 도움이 됩니다. 또 글로벌 기업의 한국인 사장들은 확실한 한국적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그런포스펌프를 한국 기업보다 더 한국적인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글로벌 기업인 한국그런포스펌프의 CEO를 맡기 전 이 사장은 유원건설과 그 계열사인 하림통상의 해외사업본부장, 뉴욕지사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1년의 절반 이상을 미주, 중동, 유라시아 등지에서 지냈다. 이런 해외 근무 경험을 통해 그는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한국그런포스펌프가 만든 제품들
이 사장은 “취미가 외국어”라고 할 정도로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다. 6년째 배우고 있는 중국어에 대해서는 “아직은 서툴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수준급”이라고 말한다. 업무상, 혹은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외국어 익히기를 취미로 삼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테마여행으로 세계의 대학을 주로 다니는데, 현재까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40여 개 대학을 찾아봤다고 한다. 그곳에서 세계의 흐름과 변화를 느낄 수 있고 젊음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장에게 대학은 여행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회사 경영을 하면서 그는 고려대, 영국 애시리지대, 미국의 스탠퍼드대,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대학원) 최고 과정을 마쳤고 동국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인연으로 동국대에서 6년째 겸임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이강호 사장은 다국적 기업 CEO로서는 드물게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그는 1973년 육사 29기 대표로 졸업했다. 육사에서는 매년 졸업생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생도 한 명과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생도 한 명의 이름을 백년탑에 새긴다. 이 사장은 졸업할 때 대표 화랑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백년탑에 이름을 남겼다.

이 사장은 임관 후 전후방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후 주한미군 합동군사지원단의 셰퍼드 장군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때에 그는 ‘모국어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글로벌 기업 CEO로서의 든든한 밑천을 마련한 셈이다. 글로벌 기업 CEO라는 미래의 직업을 미리 예감했던 걸까. 대표 화랑 출신으로서 당연히 장군을 꿈꾸던 이 사장은 군 생활을 접고 대위로 예편했다.

“예편 이유를 지금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군 생활을 그만두는 문제를 두고 장고(長考)했고, 예편 후에는 군 생활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신의 리더십과 패기는 육사생도 때 다 배웠다고 말하는 이강호 사장은 자신의 삶과 경영에 임하는 자세를 이렇게 말한다.

“《손자병법》 첫 장 첫째 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차선은 없다.’ 전쟁터에서 2등은 죽음을 의미하며 경영에서 2등은 도산을 의미합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때마다 그 교훈을 떠올립니다.” ●
글의 주인공 이강호님은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와 육사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 동국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진흥요업 수출과장, 유원건설 해외사업본부장, 하림통상 사장을 역임했다.
  • 200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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