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계 ‘마이다스의 손’

오영식 토탈 아이덴티티 코리아 사장

네이비블루 셔츠에 검은테 안경, 주어와 서술어가 정확한 어투 때문이었을까. 오영식 토탈 아이덴티티 코리아 사장에게서는 차갑고 냉정한 금속성의 냄새가 풍겼다. 그는 “디자이너는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사장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인은 예술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지녀야 합니다. 미적 감각을 파는 비즈니스니까요. 좋은 디자인은 기업의 매출을 올리고 브랜드 가치를 높입니다. 설익은 감각만 믿고 앞뒤 없는 디자인을 했다간 자신은 물론 기업도 큰 손실을 입게 되죠.”

스스로를 ‘실천적 이상주의자’라고 정의한 오 사장의 대표작은 현대 M카드. 잘생긴 유러피언 남성들이 빨간색 치마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던 화제의 CF 속 그 카드다. 젊은층을 겨냥해 만든 이 카드의 디자인은 도발적이었다. 일정 크기와 단색으로 규격화된 기존 카드 디자인에 반발하듯 빨강과 초록, 보라와 연두 등 보색 대비가 분명한 색채를 썼기 때문. 사이즈를 기존의 절반으로 줄인 미니 카드를 선보인 것도 파격적이었다. 오 사장은 “현대 M카드 덕분에 디자이너로서 내 이름이 업계에 조금씩 알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오영식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예과 84학번이다. 그는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2년 삼성문화재단 공채 1기로 입사, 호암갤러리 전시기획자로 일했다. 그러던 중 좀 더 스케일이 크고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 CI (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를 통합하는 작업) 전문 디자인 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10년 동안 1년에 한 번꼴로 이직했다고 한다. 같은 직종에서 왜 그렇게 여러 곳을 전전했는지 궁금했다.

“국내 유명 디자인 업체는 거의 다 순회한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한 디자인 업계의 공통점은 오너 자신이 무조건 최고인 줄 안다는 거였습니다. 아랫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죠. 그런 분위기가 싫어 철새 노릇을 했어요.”

2001년에는 한국이 싫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는 게 목표였으나 곧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렇게 싫었던 대한민국을 벗어나고 보니 어떤 분야든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서울에서 살아남는다면 평생 굶어 죽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이 생기더라는 것. 2002년 1월 그는 1년짜리 어학연수를 받기 위해 독일로 떠났고, 그곳에서 네덜란드계 디자인 회사인 토탈 아이덴티티사(社)를 알게 됐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일한 곳이 이 회사였다고 한다.

“토탈 아이덴티티사는 유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디자인 전문 회사입니다. 역사가 40년이 넘은 데다 벨기에, 독일, 아랍에미리트(UAE) 등 세계 각국에 지사를 두고 있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본사 직원만 100명이 넘습니다. 20세기 디자인 히스토리를 아는 이들에게는 퍽 의미 있는 회사죠. 이곳에서 언젠가는 나도 작지만 탄탄한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디자이너 오영식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현대 M카드. 색상이 강렬하다.
2002년 말 귀국한 그는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 디자인 사무실을 오픈했다. 준비 없이 덤빈 일은 그에게 쓴 교훈과 함께 참담한 실패를 안겼다. 당시 그의 주머니에 남은 돈은 고작 1만 5,000원이었다고 한다.

재기를 위해 그가 선택한 직장이 현대카드사(社)다. 2년 동안 계약직 사원으로 일한 이 시기를 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클라이언트를 만나 마음껏 일할 수 있었다는 것.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의 후원 덕분에 그는 이 시기에 크고 작은 기록도 수립했다. 그의 머리와 손을 거쳐 탄생한 현대카드는 작년 말 각종 브랜드 관련 대회에서 우수상을 휩쓸었고, 그가 디자인한 현대카드의 연차 보고서는 세계 최고 권위의 ‘ARC 어워드’와 유럽 최고 공모전인 ‘레드 닷’에서 1등을 했다. 그의 출품작은 세계 유수의 디자인 회사들이 출품한 작품들과 함께 디자인 표본집으로 묶여 전 세계 디자인 업계에 판매되고 있다.

현대카드 디자인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무렵 그는 토탈 아이덴티티사가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현지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그 후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2003년 세계 최고 권위의 ‘ARC 어워드’와 유럽 최고 공모전인 ‘레드 닷’에서 1등상을 받은 현대카드사의 연차 보고서.
2004년 말 한국 법인으로 출범한 토탈 아이덴티티 코리아는 현재 그를 포함한 직원이 12명이다. 오 사장은 “1인당 1억 원 매출을 목표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의 대부분을 고가의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쓰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좋은 디자인은 좋은 환경에서 나옵니다. 저는 장비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아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사무실에는 최첨단 장비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생활 비용으로도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한다고 한다. 일하는 틈틈이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 그가 최근에 쇼핑한 물건들은 책 한 권 크기의 애플 컴퓨터, 스테이플러가 달린 맥가이버 칼 등으로 거의 얼리 어답터(신제품을 남보다 빨리 구입해 사용해 보는 사람들)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에게 영화 감상이나 쇼핑을 하면서도 아이디어를 얻느냐고 묻자 “아이디어는 어느 순간 떠오르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
  •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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