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쓴 수필| 친구

서른일곱 해 만에 옛 친구를 만났다.

“아, 늙었다!”는 탄식 섞인 부르짖음이 속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미소년의 모습은 간데없고, 염색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흰머리, 두툼하게 붙은 살, 이마와 눈가의 주름들, 잇몸이 약해 새로 해 넣었다는 이빨…. 조폭 같은 세월이 어찌 그와 나라고 봐주겠는가! 친구의 눈을 통해 보면 나도 그렇게 늙었으리라.

훌쩍 세월을 건너뛰어 소년에서 장년으로 접어든 시절에 만나 보니 낯설고 서먹하다. 기억과 현실의 시간 사이에 갭이 너무 커서 하나로 잘 포개지지 않는 탓이다. 우리는 인사동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맥주 네 병을 나눠 마시며 지난 얘기를 나눴다.

우리는 중학 시절 늘 함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진로가 엇갈렸다. 풍진 세상의 거친 바람에 휩쓸려 살다 보니 소식이 끊겼다. 나는 뒤를 돌아다볼 새 없이 휘몰아치는 삶을 살았다.

친구는 대학에서 방송국 활동을 하고, 대학 졸업 후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해 발령을 기다리다가 5공 시절 방송국이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진로가 바뀌었다고 한다. 엉뚱하게 외국계 컴퓨터 회사에 23년째 근무한다고 한다. 명함을 받아 보니 상무였다. 몇 해 전 구조조정 때 100명 직원 중에서 40명을 감원했는데, 이젠 자신이 나가야 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었지만 매력적인 목소리와 눈웃음은 소년 시절 그대로다. 대학생 딸에 늦둥이 아들을 하나 더 두었다는 친구의 어깨를 보니 조금 처진 듯하다. 우리 시대의 고단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다. 내 고운 친구를 세월이 저렇게 늙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밤늦게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친구란 오래 사귄 벗을 일컫는다. 오래 사귀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좋고 싫어하는 바를 알고, 서로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살아온 이력을 꿰뚫는다. 그러니 가식과 위선을 버리고 서로에 대해 정직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는 하늘에서 달만 한 것이 없고, 음악에서는 거문고만 한 것이 없으며, 식물로는 버드나무만 한 것이 없다고 옛사람은 말했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야 한다. 참다운 친구는 하늘의 달보다, 음악의 거문고보다, 냇가의 버드나무보다 더 사람을 감격시킨다. 왜 금란지계(金蘭之契)라고 하지 않는가. 둘이 마음을 합치면 쇠도 자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고, 그 향기가 난의 향기와 같다는 뜻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지는 사람이 친구다. 오래 보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친구다. 꽃이 피었을 때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친구다. 향기로운 술과 진미가 놓인 상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친구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기꺼이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친구다. 세상은 갈수록 팍팍해지지만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데워지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사는 일에 지쳐 어깨가 축 처져 있다가도 친구를 만나면 아연 생기를 얻고 활력이 넘친다.

매화처럼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처럼 사람을 그윽하게 하고, 국화처럼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처럼 사람을 담백하게 하는 사람이 친구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나 친구와 더불어 있을 때 매화가 되고 난초가 되고 국화가 되고 연꽃이 된다. 이렇듯 진정한 친구는 나로 하여금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연꽃의 격을 갖게 만든다.

친구는 기쁨은 배로 하고 슬픔은 반으로 나누는 사람이다. 참다운 친구란 좋을 때는 초대해야만 나타나고 궂은일이 있을 때는 부르지 않아도 나타난다. 친구는 연못에 핀 연꽃이요, 청산에 녹수와 같은 사람이다. 친구는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그런 친구와 더불어 한 생을 사는 이는 복된 사람이다. ■
  • 200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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