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고졸 출신 조연환 산림청장

고시 합격한 날 아내와 부둥켜안고 펑펑 울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肉鮮)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7장 1절)

가난한 아홉 남매에게 성경의 이 구절은 허기를 달래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배가 고파 밤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날이면 형제들은 한방에 모여 가족 예배를 보았다. 그들에게 목자는 열다섯 나이에 농협 사환으로 취직한 큰형이었다. 하나님은 공평했다. 생활력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대신해 강하고 책임감 있는 맏이를 주었으니 말이다.

큰형이 가장(家長) 노릇을 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그만두던 무렵, 그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 연약했던 아이, 6·25 전쟁 중 피난 준비를 하는 그의 부모에게 친척들은 “줄줄이 어떻게 다 데리고 가려고 그래. 쟤는 사람 구실 하기 틀렸어. 그냥 버리고 가”라며 혀를 찼다.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던 이 아이가 50년 후 산림청장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4남 5녀 중 다섯째였던 이 아이가 바로 조연환 산림청장이다.

“요즘 형제들끼리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저거 버릴 놈을 그냥 두었더니 사람 구실 한다고. 이제는 다들 시집 장가를 가서 예전처럼 함께 살지는 않지만 우애만은 다른 집 형제들보다 돈독해요.”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던 큰형은 군 제대 후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식구들에게는 큰형이 군에 있던 3년 동안이 가장 힘겨운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충북 보은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시절 그의 꿈은 교사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했어요. 아이들 가르치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다음 주에 가르칠 내용을 준비하고, 어떻게 가르치면 아이들이 좀 더 흥미 있어 할까 고민하는 시간들이 참 행복했습니다.”

공주사범대학에 진학하길 희망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인문계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고를 선택하면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 그는 전교 5등으로 들어갔던 중학교를 10등으로 졸업하고, 보은농고 임업과에 진학했다. 농업과와 축산과를 마다하고 경쟁률이 낮은 임업과를 택한 것은 장학금을 타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농고에 진학하고 보니까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을 부류와 대학에 진학할 부류로 나뉘더군요. 학교 공부와 대학 시험 공부가 판이하게 달랐거든요. 실업계 학교라 국·영·수 대신 실습 수업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장학금 쪽이었어요.”

3년 동안 풀을 뽑고 약을 치며 묘목 관리를 했다. 대학 진학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고교 생활은 그에게 퍽 유익했다. 이때 배운 것들이 산림청 공무원 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이다.

보은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1967년 그는 임업직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첫 발령지인 전북 무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그때만 해도 전북 무주는 손에 꼽히는 오지였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스무 살 청춘을 보내기에는 너무 무료하고 답답한 곳이었죠. 월급의 반을 하숙비로 허비하는 것도 아깝고 해서 결혼을 남들보다 일찍 했습니다.”

쌀 한 가마니에 3,000원 하던 시절, 그의 월급은 5,000원이었다. 하숙비 2,000원을 내고 3개월 할부로 양복 한 벌을 맞춰 입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말단 공무원 생활은 명절에도 빈손으로 고향에 가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이후 전국을 누비며 5년에 1급씩 승진해 7급 공무원이 되었지만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적은 봉급에 이사 비용만 늘었다. 그가 임업직 기술고시에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78년. 안동 지방청에서 서울 본청으로 올라오면서였다.

헬기를 타고 전국의 산림을 돌아보고 있는 조연환 청장 .
“부모님 고생하시는 걸 보고 아이를 하나만 낳았어요.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니까 하나 있는 아들 유치원 보낼 돈이 없더라고요. 월급 가지고 방 하나에 부엌 한 칸 딸린 집 사글세를 내기에도 빠듯했습니다. 공무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고등고시 임업직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더군요.”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합격하면 사무관으로 등용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무관이 되면 월급이 좀 오르겠다는 생각에 얼마 후 서울 홍릉 근처에 있는 고시학원에 등록했다. 실업계 출신들에게 약한 국어, 영어, 역사를 아침저녁으로 수강했다.

퇴근 후 학원에 들러 집에 오면 밤 10시. 늦은 저녁을 먹고 다락으로 올라가면 그의 아내는 소리 없이 아이를 들쳐 업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나중에 시험에 붙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동안 아내가 아이를 업고 고샅을 몇 시간씩 배회한 사실을 알았다. 칭얼거리는 아이가 남편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1979년 1차에 붙고, 이듬해 2차에 붙었어요. 합격 소식을 접한 후 아내와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사실 처음에는 떨어진 것으로 알았어요. 발표 예정일을 며칠 남겨놓고 큰형님이 서울 중앙청에 볼일이 있어 다녀왔는데, 그곳 게시판에 내 이름이 없다고 하셨거든요. 나중에 알아보니 형님이 그때 본 것은 행정고시 합격자 명단이었습니다.”

그해 임업직 기술고시 응시자는 600명, 최종 합격자는 다섯 명이었다.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고졸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기술고시에 합격한 예는 산림청 사상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합격 사실보다 자신이 뭔가 해냈다는 것에 감격해 울었다.

“절박함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특히 영어는 기초가 없으니까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곤 했습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었으면 견뎌 내기 어려웠을 거예요.”

1982년 임정국 임정과로 발령이 난 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9급 말단직부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익힌 실무 덕이었다. 결국 2003년 4월 산림청 차장에 이어 2004년 7월 산림청장에 올랐다.

37년 공직에 있으면서 그는 크고 작은 상을 많이 받았다. 그 가운데 ‘자랑스런 방송대인상’을 받은 것이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학력 때문에 설움이 많았을 그들의 마음에 한 그루의 꿈을 심어준 것 같아서라는 것이다. ■
  • 200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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