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지르포 |「국민타자」이승엽의 부활

『전에는 열 손가락, 이제는 아홉 손가락으로 친다』

『이승엽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이승엽이 느닷없이 던진 한 마디에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이승엽이 롯데와 입단 협상을 벌였던 2003년 말부터 쭉 옆에서 지켜봤지만 이처럼 강한 투의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올해는 여기서 안 볼 줄 알았는데…』

일본 지바 롯데 이승엽(29)이 올 시즌 개막 2군 통보를 받았던 3월 말 취재를 위해 도쿄 인근의 요미우리 2군 경기장에 간 적이 있다. 변함없이 환한 얼굴로 필자를 반긴 이승엽은 『올해는 여기서 안 볼 줄 알았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지난해 난생 첫 2군행을 겪었던 뼈아픈 기억이 순간 스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2년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 또다시 2군에서의 스타트. 과연 이승엽은 이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요미우리와의 2군 경기가 끝난 뒤 이승엽의 승용차를 함께 타고 오며 이런저런 얘기가 시작됐다.

『이승엽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승엽이 느닷없이 던진 한 마디에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이승엽이 롯데와 입단 협상을 벌였던 2003년 말부터 쭉 옆에서 지켜봤지만 이처럼 강한 투의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일본에서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꼭 성공한 뒤 어디를 가든 가야죠』

일본에서 자신의 야구 인생에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었다. 올 시즌 개막 1군 엔트리 제외를 예상했느냐는 물음에는 『설마 했죠?』라며 한숨을 고른 뒤 『시즌 내내 2군에 있더라도 절대 일본 야구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라며 다시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무엇보다 이승엽은 지난해 말 일본에서의 처절한 첫 시즌을 보낸 뒤 정신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프로로 뛰면서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야구와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 어깨를 짓눌렀다. 「야구를 포기할까」, 「한국으로 돌아갈까」라는 극단적인 생각들도 한동안 꿈틀댔던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늘 영웅대접을 받았던 자신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집착이 강한 성격은 첫해 슬럼프 탈출의 걸림돌이었다.


「무어 死球(사구)」후유증

2군으로 내려간 롯데 마린스의 이승엽. 2004년 5월10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니혼햄 파이터스전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하기 쉬운 말로 일본 투수들의 변화구를 공략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지난해 이승엽에게는 작지만 한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 이승엽의 타격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정신적인 면과 관련이 있다.

2004년 4월23일 오릭스의 외국인 투수 무어에게 오른쪽 팔꿈치에 공을 맞은 사건이다. 시즌 초반 지바 마린 스타디움 주차장에 세워 둔 승용차의 유리창을 깨는 초대형 장외포로 일본 1호 홈런을 장식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 갈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금이 간 것이다.

이승엽은 일본에서의 첫 시즌을 시작하기 전부터 한 가지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동안 주니치 출신의 이종범 등의 전례를 봐서도 부상은 외국 무대에서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상 없는 한 해를 보내는 게 소망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무어 死球(사구)」는 이승엽의 잠재적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결국 이 같은 부상에 대한 강박관념을 털어 버리는 데 실패했다.

시즌 첫해 이승엽의 부진 원인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 투수들의 변화구 공략 실패라기보다는 몸쪽 공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올 시즌 야구 중계를 하는 해설자들이 이승엽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몸쪽 공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대해 이승엽은 『정말 바보 같았다. 사실 알면서도 잘 실천이 안 됐다. 일본 투수들은 워낙 컨트롤이 좋아 失投(실투)로 몸을 맞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 투수들보다 공 한두 개씩 더 몸에 바짝 붙일 뿐이다』고 말한다.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이 조금씩 걷히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올 시즌 이승엽이 몸쪽 공에 화들짝 놀라 물러서는 장면은 보기 힘들다. 지난해처럼 몸쪽 공에 어정쩡한 하프스윙으로 삼진 아웃되는 일도 별로 없다. 삼진을 당하더라도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두른다. 결국 이런 변화는 타석에서 공을 보다 길게 볼 수 있는 여유를 심어 줬다. 選球眼(선구안)이 달라진 것이다. 볼을 최대한 길게 본다는 것은 타자에게 아주 기본이면서도 중요한 얘기다.


가벼운 배트로 간결하고 빠른 스윙

2005년 4월13일 오후 일본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스와 오릭스 버팔로스의 경기. 발렌타인 롯데 감독이 결승홈런의 주인공인 이승엽을 격려하고 있다.
물론 기술적인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승엽은 『지난해에 비해 스윙이 달라진 점이 있느냐』고 물으면 『특별히 없다』고 하면서도 『뭐라고 딱 잘라 설명하기 쉽지 않은 느낌이 있다』고 여운을 남긴다.

설명하기 힘들다는 그 느낌이 뭘까. 먼저 지난해와 같은 터무니없는 오버 스윙이 적어졌다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 오픈 스탠스를 유지하는 오른발의 각도, 스윙을 시작하면서 팔을 뒤로 빼는 테이크 백의 크기 등이 미세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상반신의 회전 각도와 스윙과 동시에 발을 앞으로 뻗는 폭도 작아졌다.

이승엽은 지난 5월18일 히로시마전부터 5경기 연속으로 홈런을 칠 때 『지난해보다 투수의 실투를 놓치지 않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타석에서 투수들을 읽는 능력과 배팅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오버 스윙의 감소와 관련해 타자의 가장 큰 무기인 방망이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승엽은 한국 삼성 라이온즈 시절 보통 950g 안팎의 방망이를 사용했다. 올 시즌 초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950g 안팎의 무거운 방망이를 썼지만 5월6일 센트럴리그와의 인터리그를 시작하면서 무려 50g이 줄어든 900g짜리 방망이를 주문해 사용하고 있다. 무게가 줄어들면서 방망이의 무게중심도 약 7cm 가량 손잡이 쪽으로 이동해 이전처럼 스윙 뒤 방망이 끝이 처지지 않는다. 간결하고 빠른 스윙이 완성됐다는 얘기다.

방망이 모양도 눈에 띄게 변했다. 손잡이 부분을 각지게 파내 끝만 불쑥 튀어나온 양파형에서 탈피해 손잡이부터 끝까지 비스듬하게 깎아 낸 형태로 바꿨다. 이승엽은 그동안 손가락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양파형을 고집했는데 막상 새 방망이를 쓰면서부터 불필요한 힘이 많이 빠졌다고 한다. 이승엽은 『이전에는 열 손가락으로 쳤지만 이제는 아홉 손가락으로 친다』고 표현한다. 손잡이가 비스듬하게 깎여 있어 맨 끝에 걸치는 새끼손가락의 힘이 자연스럽게 빠졌다는 얘기다. 이승엽은 초경량 방망이로 5월 한 달간 5연속 홈런을 포함해 8홈런을 쏟아 냈다.

그렇다면 이승엽의 일본 프로야구 적응은 끝났다고 해도 좋을까?

이 질문에는 쉽게 『예』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정신적, 기술적인 면에서 지난해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현재 상태로 일본 야구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해 이제 일본 투수들을 상대로 자신의 타격감을 지키며 스윙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6월 초반 갑자기 찾아온 타격 슬럼프를 유심히 지켜보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이승엽은 지난 시즌 첫해에도 한국 투수들과는 다른 일본 투수들의 투구 패턴에 적잖게 고민했다. 볼카운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주자가 3루에 있어도 절대 쉬운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들지 않는 게 일본 투수들이다.

쉽게 말해 이승엽은 나름대로 일본 투수들의 투구 자체에 대응할 만한 스윙감은 잡았지만 그 속을 충분히 읽으려면 아직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해결 방법은 실전에서 많이 경험을 해 보는 수밖에 없지만 왼손 투수가 나올 때 보비 발렌타인 감독이 이승엽을 빼는 플래툰 시스템을 적용시키고 있어 걱정이다. 또 한국 투수보다는 일본 투수들의 실투가 훨씬 적기 때문에 이승엽이 가물에 콩 나듯 오는 한 방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매 경기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승엽은 지난 5월에만 20경기서 타율 3할6푼6리(71타수 26안타)에 8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야구 정상 정복에 대한 가능성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더욱이 퍼시픽리그보다 정교하다는 센트럴리그, 그것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낯선 투수들을 상대해 거둔 성적이어서 의미가 크다.

분명 이승엽은 달라졌다. 타자들이 한 시즌 130~140경기를 치르면서 최소한 한두차례의 슬럼프는 있게 마련이다. 물론 이승엽도 올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일시적인 침체가 있겠지만 지난해와 달리 얼마나 빨리 헤치고 나올 수 있느냐가 성공 열쇠가 될 것이다. ■
  • 200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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